1차 세계대전⑥…벨기에서 묶인 슐리펜 작전
1차 세계대전⑥…벨기에서 묶인 슐리펜 작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7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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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군, 벨기에군 저항에 시간 지체…마른 전투에 택시 동원, 연합군 첫 승리

 

191484일 오전 8, 독일 1, 2 ,3군이 벨기에 국경을 넘었다. 한시간 후 벨기에 국왕 알버트 1(Abert I)는 군복 차림에 말을 타고 의회로 향했다. 브뤼셀 시민들은 국왕을 열렬히 환영했다. 국왕은 감정을 억누르며 우리가 선조로 물려받은 신성한 국토를 지키자고 역설했다. 의원들은 환호와 박수로 국왕의 연설을 맞았다. 벨기에인들은 하나가 되어 독일에 맞서기로 결의했다.

독일군의 첫 번째 타깃은 리에주(Liège)였다. 리에주는 중세 때부터 상업도시로 발전해 수도 브뤼셀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인구 16만명의 교통중심지였다. 그곳에는 벨기에군이 크고 작은 삼각형 보루 11개를 설치해 32,000명을 주둔시켰다. 벨기에 군은 알버트 국왕의 지시로 독일군이 도착하기 전에 요새 앞을 흐르는 뮤즈강의 다리를 폭파시켰다.

 

리에주 전투에 앞서 파괴된 다리 /위키피디아
리에주 전투에 앞서 파괴된 다리 /위키피디아

 

독일군은 5일 국경에서 25~30km 떨어진 리에주에 도착해 곧바로 요새 공격을 시작했다. 독일군은 벨기에군을 초콜릿 군대라며 얕잡아 보았다. 독일군 참모총장 몰트케는 810일까지 리에주를 점령하라고 사령관에게 지시를 내려 보냈다.

하지만 리에주 요새는 의외로 강했다. 콘크리트 요새는 빗발치는 독일군의 포격을 버텨냈다. 쉽사리 항복할 것으로 보았던 벨기에 군의 저항도 의외로 완강했다. 벨기에군은 화력과 병력에서 독일군에 훨씬 뒤쳐졌지만 강인한 애국심으로 버텨냈다. 요새에서 벨기에군이 쏜 기관총에 독일 병사들이 쓰러져 갔다. 공격하는 자는 시체 더미를 방패 삼아 공격해 왔다. 몰트케가 지시한 810일이 되어도 리에주 요새는 끄떡하지 않았다.

하지만 보루가 하나씩 점령되면서 816일 마지막 보루가 독일군에게 함락되었다. 벨기에 병사들은 항복하고 명예롭게 포로수용소로 행진했다.

 

리에주 전투의 벨기에 병사 /위키피디아
리에주 전투의 벨기에 병사 /위키피디아

 

벨기에 영토를 무풍질주할 것으로 예상했던 독일군은 리에주에서 열흘 이상 질척거렸다. 그 사이에 프랑스군은 전열을 가다듬어 벨기에 국경으로 북상했고, 영국군도 해협을 건넜다. 벨기에는 리에주를 잃었지만 독일에 당당하게 맞설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기습공격으로 벨기에를 가로질러 파리를 점령한 후에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려 러시아를 제압하려던 독일 몰트케의 슐리펜 작전(Schlieffen Plan)은 처음부터 빗나갔다.

 

리에주를 함락한후 독일군은 파죽지세로 남하해 820일 브뤼셀을 점령했다. 독일군은 나무르(Namur)에서도 벨기에군의 완강한 저항에 4일간 발이 묶였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군이 지원했다. 하지만 초반의 승기를 잡은 독일군은 이 도시도 격파하고 프랑스 국경으로 근접했다.

독일군은 벨기에군의 저항에 슐리펜 작전이 지연되자 벨기에 시민에 대해 복수극을 벌였다. 825일 루뱅(Leuven)이라는 도시에 주둔하고 있던 독일군 병사가 어디서 날아 온지 모르는 총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독일군은 이 사건이 벨기에 파르치산의 소행으로 보고 루뱅시 민간인들을 샅샅히 조사했다 그들은 총이나 쇠붙이를 만진 흔적이 있거나, 군복을 입은 경험이 있는 자들을 죄다 끌어내 처형했다. 이 도시에서 민간인 248명이 사살되고 가옥 2천채가 불태워 졌다. 이 사실이 알려 지면서 영국과 프랑스 언론들은 벨기에의 강간’(Rape of Belgium)이라며 독일 정부와 군을 비난했다.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로 /위키피디아
독일군의 벨기에 침공로 /위키피디아

 

벨기에인들은 1830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한 이래 한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오랜 평화에 젖어 있던 벨기에인들이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채, 무기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채 독일군에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 배경에는 국왕 알베르트 1세의 장력한 지도력과 용기에 힘입은바 크다.

국왕 알버트는 전투가 시작되자 전투복을 입고 벨기에 군을 진두지휘했다. 그는 국토 대부분이 독일군에 짓밟힐 때까지 전투를 이끌었다. 벨기에 군이 역부족으로 영·불 연합군에 합류했을 때에도 그는 전쟁 4년 내내 마지막 남은 영토인 이제르강 근처 드판(De Panne)이라는 마을의 참호에서 국민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군인들과 동고동락했다. 왕비 엘리자베트는 간호사로 나서 부상 병사들을 돌보았다.

바로 건너편 독일군 참호에서 알버트 국왕 부부를 포격할수 있는 거리였는데, 독일군 지휘자들이 그곳을 향해 위험한 사격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두가지인데, 독일 장교들이 국왕을 존경했기 때문이라는 설과 알버트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사촌이기 때문에 독일황제가 특별히 배려했다는 설이 있다. 어쨌든 알버트는 후에 벨기에 국왕이 되는 왕자 레오폴트도 12살에 벨기에 군에 입대시켜 이등병으로 근무하도록 조치했다고 한다.

 

벨기에 국왕 알버트 1세와 왕비 엘리자베트 /위키피디아
벨기에 국왕 알버트 1세와 왕비 엘리자베트 /위키피디아

 

영국군이 벨기에로 진입했다. 벨기에 북부 안트워프(Antwerp)에서는 독일군과 영국-벨기에 연합군이 대치했다. 828일에서 910일까지 이어진 안트워프 전투에서 독일군의 기관총이 불을 뿜으면서 연합군을 제압했다.

 

독일군이 벨기에에서 한달 가까이 허우적거릴 때 러시아군이 전열을 갖춰 8월말에 독일 동부 국경을 공격했다. 두 개의 전선이 펼쳐졌고, 슐리펜 계획이 완전히 흐트러지게 되었다. 하지만 러시아 병사들은 오랜 행군으로 지쳐 있었다. 러시아군이 암호를 사용하지 않고 전신을 하는 바람에 독일군이 전신 내용을 가로채 적군의 동정을 꿰뚤어 보았다. 826일에서 30일까지 치러진 타넨베르크 전투(Battle of Tannenberg)에서 러시아군은 궤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했다. 독일군 손실은 1만명인데 비해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10만명에 이르렀고 9만명이 포로로 잡혔다. 대패의 책임을 지고 러시아군 사령관 삼소노프(Alexander Samsonov)는 자결했다.

 

독일군은 서부전선에서 2개 사단을 빼 동부전선 타넨베르크 전투에 투입했다. 슐리펜 작전교본에는 최우익을 강화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몰트케 참모총장은 동부전선의 승리에 너무나 도취해 그 계획을 망각했던 것 같다.

8월말, 독일군은 프랑스 국경을 돌파해 쾌속으로 질주했다. 프랑스는 국경에서 제대로 독일군을 방어하지 못했다.

독일군에 밀리던 프랑스군 참모총장 조프르(Joseph Joffre)는 독일 슐리펜 작전의 허점을 발견했다. 우익이 비어 있었다. 독일 작전대로라면 최우익이 가장 큰 원을 그리며 돌아야 하기 때문에 속도전을 요구했다.

 

프랑스 마른 전투에 동원된 파리 택시들 /위키피디아
프랑스 마른 전투에 동원된 파리 택시들 /위키피디아

 

조르프는 후퇴전술을 구사했다. 9월초 그는 프랑스군과 영국군의 퇴각을 명령했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패주하는 뒤를 따라 하루에 30km씩 진군해 파리 외곽 40km 지점의 마른 강(Marne river)에 이르렀다. 땅은 질퍽거리고 도로는 곳곳에 패어 있었다. 독일 병사들은 휴식도 취하지 못하고 3일동안 강행군을 하느라,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

독일군 우익 1군과 2군 사이에 40km의 간격이 벌어졌다. 우익에서 2개 사단이 빠져 나갔기 때문이다.

앞서 조르프는 보병 예비사단 1만명을 후방에 대기시키고 7사단 3,000명을 대기시켰다. 그리고 파리의 택시들을 징발해 두었다.

966백대의 택시는 일제히 예비병력을 싣고 파리 시내를 출발해 50km 전방에 내려놓고 돌아갔다. 그날밤 두차례에 걸쳐 택시들이 병력을 수송했다. 택시 한 대에 10명의 군인을 실었다. 독일군에 들키지 않기 위해 헤드라이트는 켜지 않고 백라이트만 켰다. 프랑스 정부는 후에 총 7만 프랑의 비용을 택시 기사들에게 지불했다고 한다.

97일 조르프는 퇴각하던 프랑스군에게 철수를 중지하고 공격을 명령했다. 영국군도 합세했다. 지친 몸을 이끌고 전진하던 독일 병사들이 당황했다. 프랑스군과 영국군은 독일 1군과 2군 사이의 50km 간격 사이로 파고들어 독일군을 분리시켰다.

연합군의 대반격이 시작되었다. 이 전투에는 프랑스군 64개사단, 영국군 6개사단, 독일군 51개 사단이 투입되었다. 양측 모두 100만명씩 투입한 전투에서 50만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전사자만 15만명을 넘었다.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는 독일로서는 최초의 패전이었으며, 프랑스와 영국군의 첫 승리였다.

 

독일은 914일 퇴각해 그동안 빼앗았던 프랑스 영토를 대부분 돌려주고 국경근처에서 진지를 팠다. 슐리펜 작전은 완전한 실패로 귀결되었다. 마른 전투 패전 이후 몰리케 참모총장은 해임되었고, 육군상 팔켄하인이 그 후임이 되었다. 이후 서부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다. 양측은 참호를 깊게 파고 장기전에 돌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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