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⑦…칭다오 전투
1차 세계대전⑦…칭다오 전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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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독일에 선전포고…칭다오 독일군 기지 점령, 영국군도 지원

 

1차 세계대전은 처음으로 유럽을 벗어나 전세계로 확대된 전쟁이다. 앞서 유럽의 여러 전쟁에서 교전국들이 아시아와 아메리카의 식민지를 뺏기 위해 전투를 벌이긴 했지만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

19148월 유럽의 전쟁은 곧바로 아시아로 확대되었다. 독일은 아시아에서 중국 칭다오(青島), 뉴기니 북동부, 사모아 등 남태평양 군도를 조차지 또는 식민지로 두고 있었다. 독일이 아시아·태평양에서 가장 중시하는 곳은 칭다오였다.

독일은 1898년 선교사 살해를 이유로 중국으로부터 칭다오를 99년간 조차 조건으로 할양받았다. 칭다오는 산둥성(山東省) 남쪽에 위치해 있는데, 독일은 반도 양측에 2개의 항구를 건설하고 요새를 구축했다. 독일은 이 곳에 도시계획에 의해 시가지를 조성하고 학교를 짓고 전기를 공급하고 상하수도를 건설했다. 1903년엔 칭타오(Tsingtao) 맥주공장을 지었는데, 그 맥주가 아직도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1911년 쑨원(孫文)이 신해혁명을 일으킨 후 이곳을 방문하고 이 도시가 향후 중국의 진정한 모델이다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이 중국의 수도 베이징 코앞에 홍콩에 버금가는 도시와 군시기지를 건설하자 영국이 위기의식을 느꼈다. 영국은 산둥반도 북쪽 웨이하이웨이(威海衞)를 임대해 군사기지를 조성했고, 러시아는 랴우둥반도에 뤼순(旅順) 항구를 건설했다가 1904~1905년 러일전쟁에서 패해 일본에게 넘겨주었다. 프랑스는 광조우만을 조차했다.

 

1906년의 칭다오 /위키피디아
1906년의 칭다오 /위키피디아

 

191484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자 아시아에서는 독일 군사기지 칭다오가 연합국의 타깃이 되었다. 칭다오는 독일의 동아시아 함대 거점이었고, 이 함대는 중국은 물론 태평양 전역을 커버하고 있었다. 1차 대전 개전 당시에 칭다오에는 독일군 3,650명과 중국인 용병 10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유럽에서 전쟁이 터진 직후 영국은 일본에 지원을 요청했다. 일본은 1902년 체결한 영일동맹에 힘입어 러시아를 물리친 적이 있어 영국편을 들기로 결정했다.

815, 일본은 독일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내용은 독일군이 중국과 일본 해역에서 철수하고 칭다오를 일본에게 넘겨주라는 것이었다. 독일은 무시했다. 다음날 일본정부는 육군 보병 18사단의 카미오 미쓰오미(神尾光臣) 중장에게 칭다오 공격을 위한 동원령을 내렸다. 823일 최후통첩의 사한이 만료되자, 일본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1914년 칭다오의 독일군 /위키피디아
1914년 칭다오의 독일군 /위키피디아

 

당시 칭다오의 독일군은 일본이 공격해올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주력 전함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항해하고 있었고, 칭다오에는 소수의 전함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순양함 카세린 엘리자베트호(Kaiserin Elisabeth)가 정박하고 있었다.

827일 카토 사다키치(加藤定吉) 제독이 이끄는 일본 함대가 칭다오 해안을 봉쇄했다. 텐진(天津)에 주둔하던 영국 해군도 일본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했다. 일본은 대형순양함 6척에 23,000명의 보병을 싣고 왔다. 영국도 2척의 전함과 인도병사 1,500명을 지원했다. 일본 해군은 정찰기를 실은 항공모함 와카미야함(若宮艦)도 이끌고 왔다.

병력수는 61로 일본-영국 연합군이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독일의 칭다오 총독 알프레드 마이어-발데크(Alfred Meyer-Waldeck)는 분산된 병력을 집중시켜 연합군에 저항하기로 결의했다. 독일황제 빌헬름 2세는 전보를 보내 칭다오를 일본에 내주는 것은 베를린을 러시아에 내주는 것과 같다며 병사들을 격려했다.

 

1914년 일본군의 칭다오 공격 /위키피디아
1914년 일본군의 칭다오 공격 /위키피디아

 

일본 해군이 칭다오 항구를 좁혀 들어왔다. 오스트리아 순양함 카세린-엘리자베트가 최선봉에 서서 일본함대를 저지했다. 92일 독일 건보트 한척이 일본 전함 한척을 격침시켰다.

96일 일본 정찰기가 와키미야호에서 이륙해 오스트리아 순양함에 폭탄을 떨어뜨렸다. 아시아에서 벌어진 첫 항공기 폭탄 투하로 기록된다. 며칠후 오스트리아 순양함과 독일 건보트가 일본 해군을 공격했지만 실패로 끝났다. 소수에 불과한 독일-오스트리아 함정들은 항구로 들어와 방어에 주력했다.

913일 일본 전함들은 칭다오 독일 요새를 향해 대대적인 함포사격을 개시했고, 그 사이에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일본 육군이 칭다오 해변에 상륙했다.

일본의 해상과 육상 봉쇄는 한달 이상 지속되었다. 1017일 독일 어뢰정 한척이 일본 해군의 포위망을 뚫고 순양함 타카치노호를 격침시켰다. 타카치노에 탔던 일본 해군 271명이 수장되었다. 독일 어뢰정도 일본군의 추격으로 격침되었다.

일본은 해군이 대량으로 전사하자 약이 바짝 올랐다. 일본의 본격적인 공격은 1031일부터 시작되었다. 뭍에 상륙한 일본 육군은 과거 뤼순 전투에서 했던 것처럼 독일군 요새 주변에 참호부터 팠다. 그후 7일 동안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일본은 엄청난 양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해댔다. 독일군도 모든 화력을 동원해 일본군을 방어했다.

112일 오스트리아 순양함 엘리자베트호가 격침되었고 독일 함정들이 차례로 격침되었다. 독일이 보유한 마지막 정찰기는 하늘을 날아 일본 정찰기와 공중전을 벌였다. 이때 독일 조종사 군터 플뤼쇼브(Gunther Plüschow)는 일본 조종사를 권총으로 쏘아 격추시켰다. 역사상 첫 공중전이라고 기록된다.

하지만 독일군에 포탄과 화약이 소진되어 갔다. 116일 밤, 독일군은 포탄과 총탄이 바닥을 드러내자, 남아 있는 함정을 모두 폭파시켰다. 다음날 아침, 독일군은 항복조건을 제시했다. 19141116일 일본은 공식적으로 칭다오를 접수했다.

 

1914년 칭다오의 영국군 /위키피디아
1914년 칭다오의 영국군 /위키피디아

 

항복한 독일 병사들은 일본군에는 우호적이었고, 일본군도 독일군의 군인정신에 감복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733명 사망에 1,282명이 부상당했고 독일군은 199명 사망에 504명이 부상당했다. 독일군 전사자는 칭다오에 매장되었고, 포로 4,700명은 일본 도쿠시마현의 반도(板東) 포로수용소에 억류되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일본은 독일 포로를 잘 대우했다고 한다. 종전후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된후 1920년 대부분의 독일군 포로는 귀국했으나, 170명은 일본에 잔류했다.

칭다오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이 귀국한 병사가 있는데, 정찰기 조종사 플뤼쇼브였다. 그는 항복 전날에 총독이 전해주는 비밀 문서와 서한을 소지하고 정찰기를 타고 날아가 중국의 어느 곳에 불시착해 구사일생으로 귀국했다.

 

이후 일본은 칭다오를 점령해 통치했는데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 때에 칭다오를 포함해 산둥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민족자결주의를 내세운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마저 일본의 요구에 찬성했다. 이에 격분해 중국 민중들은 19195·4운동을 벌였고, 결국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에서 칭다오는 중국에 반환되었다.

 

1차 대전에서 중국은 중립을 선언했다. 동아시아에서 일본을 제외하고 연합국 편을 든 유일한 나라가 태국이다. 태국은 1917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전쟁을 선포했다. 태국은 자국 항구에 정박하고 있는 12척의 독일 선박과 선원을 억류했고, 이후 억류자들을 영국령 인도로 보냈다. 태국은 이웃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로 떨어지고 버마가 영국령이 된 상태에서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살기 위해 연합군에 가담한 것이다.

1차 대전 중에 독일령 사모아는 영국령 뉴질랜드에 의해 점령되고, 독일령 뉴기니는 영국령 호주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1914년 동아시아 태평양의 분할 /위키피디아
1914년 동아시아 태평양의 분할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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