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⑧…처칠이 자초한 오스만 수렁
1차 세계대전⑧…처칠이 자초한 오스만 수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19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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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오스만 발주 전함 2척 징발…독일의 전함 2척 미끼에 참전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의 병자로 불렸다. 크림 전쟁, 발칸 전쟁에 참전하는 바람에 경제가 극도로 피폐해 졌고, 동유럽과 북아프리카 영토는 피지배 종족의 독립과 유럽 열강의 침략으로 상실했다.

19085월 테살로니카에 주둔하던 청년 투르크당 소속 장교들이 쿠데타을 일으켜 술탄을 겁박해 입헌군주국으로 체제를 바꾸었다. 그때 세 주역 이스마일 엔베르(Ismail Enver), 메흐메트 탈라트(Mehmed Talaat), 아흐메트 제말(Ahmed Djemal)20대 후반 또는 30대였다. 세 청년은 권력을 공유해 3두 정치를 했다. 탈라트가 총리, 엔베르가 전쟁부 장관, 제말이 해군부 장관을 맡았다.

 

1914년 여름, 유럽에 전운이 고조되면서 오스만 투르크의 정치지도자들은 어느 쪽에 붙을지를 고민했다. 중립을 지키는 게 최선의 방법이고, 차선은 이기는 쪽에 붙는 것이었다. 어느 편에 서느냐를 놓고 세 리더와 각료들은 친독파와 친영파로 나뉘어 갑론을박을 벌였다. 러시아는 수백년 동안 열차례 이상 전쟁을 벌인 지긋지긋한 적국이고, 영국은 그리스 독립전쟁을 지원했고,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도 오스만의 영토를 빼앗아간 나라였다.

전쟁상 엔베르는 독일 편이었다. 그는 독일주재 무관을 지내며 독일 군부와 친교를 맺었고 독일군의 우수성을 눈여겨 보았다. 엔베르가 먼저 이스탄불 주재 독일 대사에게 동맹을 제의했다. 독일대사 반겐하임은 투르크가 독일 편에 서면 코카서스 일대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오스만 투르크의 가담을 떨떠름하게 생각했다. 빌핼름은 오스만이 오스트리아와의 이해관계가 대립하는데다 늙은 제국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독일 괴벤호 /위키피디아
독일 괴벤호 /위키피디아

 

반전은 의외의 사건에서 발생했다. 오스만은 영국 조선소에 대형 전함 2척을 발주했는데, 그 배의 건조가 마무리되어 인도되기 직전이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자 728일 영국의 해군장관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오스만의 전함 2척을 징발할 것을 각의에 제의했다. 엔베르는 런던 주재원에게서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포착하고 2척의 전함을 영국에 빼앗길 바에야 매각하겠다며 독일 정부에 타진했다.

그 무렵 독일 빌헬름 황제는 생각을 바꿔 오스만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빌헬름은 전함을 사줄 터이니 동맹을 맺자고 요구했다. 이에 엔베르와 탈라트는 친영파들 모르게 독일과 비밀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영국 각의는 82일 오스만 전함 2척을 징발해 버렸다. 대금은 준다고 했다. 하지만 오스만 지도자들의 감정은 상할대로 상했다. 이때 독일은 슬그머니 독일 전함 2척을 줄 터이니 사용하라고 했다. 괴벤호(SMS Goeben)와 브레슬라우호(SMS Breslau)였다. 특히 괴벤호는 수병 1천명이 승선하고 최산 대포를 장착한 당시 독일 최대 몰트케급 전함이었다. 오스만 지도자들은 독일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 그것이 독배인줄 깨닫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로를 한 직후인 83, 오스만은 공식적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이스탄불에는 친영파, 친프랑스파가 만만챦게 삼두 체제의 친독 경향을 견제하고 있었다.

 

괴벤호의 궤적 /위키피디아
괴벤호의 궤적 /위키피디아

 

괴벤호와 브레슬라우호는 독일 지중해 함대 소속으로 8월초 북아프리카 프랑스령 알제리 해역에 있었다. 영국은 독일 지중해 함대가 개전과 동시에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가 북해로 갈 것으로 예상했다.

독일 제독 빌헬름 수콘(Wilhelm Souchon)은 전쟁선포와 동시에 알제리를 포격하기 위해 함대를 이동시키던 중 84일 오전, 두척의 전함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상부의 명령을 일단 못들은척 하고 화풀이부터 했다. 독일 지중해 함대는 러시아기를 달고 일제리 해안의 프랑스 요새를 향해 맘껏 포격을 가한 후에 방향을 선회했다. 두 전함은 우선 석탄을 공급받기 위해 이탈리아 시칠리섬의 메시나로 향했다. 도중에 영국 전함을 만났지만 그 시각,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투는 없었다. 그날 밤, 영국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고, 지중해 함대에게 괴벤과 브레슬라우를 추격하라고 지시했다.

영국은 두척의 독일 전함이 오스만에게 인도될 것이란 사실을 몰랐다. 영국 지중해 함대를 이끄는 밀른(Archibald B. Milne) 제독은 독일 전함이 지브롤터를 향할 것으로 보고 서쪽과 북쪽을 경계하며 추격에 나섰다. 이탈리아는 중립국이었다. 영국 해군은 두척의 독일 전함이 메시나에 정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중립국 해역을 들어가지 않았다.

밀른 제독의 예상과 달리 두척의 독일 배는 동쪽으로 항진했다. 영국 해군은 독일 함선의 기만전술로 보았다. 독일 선대는 동쪽으로 질주하고, 영국 해군은 서쪽과 북쪽을 경계하며 추격했다.

쫓고 쫓기는 추격전은 6일이나 계속되었다. 810일 독일 배들은 오스만의 영역인 다르다넬스 해협에 진입했고, 영국 배는 그곳에서 오스만 해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오스만은 그때 중립국이었지만, 의도적으로 영국 함선의 해협통과를 봉쇄한 것이다. 두척의 독일 전함은 816일 유유자적하게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해 이름을 야부즈 술탄 셀림(Yavuz Sultan Selim)과 미딜리(Midili)로 바꿨다.

 

영국은 오스만의 배 2척을 징발하려다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선가는 600만 파운드로 고가였다. 영국은 전쟁이 끝날때까지 매일 1,000달러씩 지불하겠다고 제의했지만, 오스만 지도부를 설득하는데 실패했다. 독일이 제공한 2척은 겉으로는 오스만 선적이었지만, 실제로 독일 사령관과 병사가 탑승한 독일의 배였다. 두척의 배는 독일과 오스만투르크를 위해 1차 대전중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영국 처칠은 나중에 괴벤을 놓치는 바람에 엄청난 인평피해를 냈다고 후회했다.

 

1914년 10월 오스만 해군복을 입고 승선한 독일 수병들 /위키피디아
1914년 10월 오스만 해군복을 입고 승선한 독일 수병들 /위키피디아

 

친독일 성향의 오스만 전쟁부 장관 엔베르는 10월 중순까지 친영, 친프랑스파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무렵 독일 지중해 함대 사령관 수콘과 엔베르 사이에 음모가 진행되었다. 러시아 흑해 함대를 공격하자는 것이었다. 독일로서는 오스만을 끌어들여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단해 흑해 함대가 지중해를 빠져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고, 엔베르의 입장에서는 러시아와의 선전포고를 유도해 친연합군파를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양측의 견해가 맞아 떨어졌다.

1027일 오스만 해군은 야부즈와 미딜리로 이름을 바꾼 독일 전함 2척을 앞세워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북해로 향했다. 2척의 배는 오스만의 기를 내걸었고, 독일 수병들은 오스만 해군복장을 입었다. 이 전대는 독일 제독 수콘이 직접 승선해 지휘했다.

29일 오스만 해군은 흑해 연안의 에데사, 세바스토폴, 얄타 등 러시아 기지를 기습공격했다. 오스만측에선 함선 1척이 손상당하는데 불과했지만, 러시아 해군은 많은 함선과 상선이 피해를 입었다.

111일 러시아는 오스만 투르크에 대해 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맞서 오스만은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을 봉쇄했다. 곧이어 영국 함대는 다르다넬스 해협 입구인 갈리폴리를 포격했고, 1111일 오스만의 술탄은 영국과 프랑스에 대해, 러시아에 대해 지하드를 선언했다. 이로써 오스만 투르크는 본격적으로 1차 대전에 가담하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의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 /위키피디아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가르는 해협이 봉쇄되자 러시아 흑해함대가 지중해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되었다. 영국 해군장관 처칠은 러시아 함대의 출구를 뚫기 위해 19152월에 다르다넬스 해협의 지중해쪽 갈리폴리 반도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영국의 갈리폴리 공격(Gallipoli campaign)은 실패로 끝났다.

영국과 프랑스의 연합군 사상자가 25만명, 오스만군의 사상자도 25만명에 달했다. 이 전투에서 터키군은 용맹스럽게 싸웠다. 케말 파샤 등의 젊은 장군들은 이 전투 승리로 후에 터키의 영웅이 되었으며, 윈스턴 처칠은 해군장관직에서 사임해야 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전선이 확대되면서 오스만은 지쳐갔다. 오스만 투르크는 19181030일 항복하고, 3인의 지도부는 독일 땅으로 도망쳤다. 오스만 제국은 붕괴되고, 터키는 연합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1914년 11월 오스만 투르크가 연합군에 성전을 선포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1914년 11월 오스만 투르크가 연합군에 성전을 선포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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