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⑩…레닌, 독일군 후원으로 귀국
1차 세계대전⑩…레닌, 독일군 후원으로 귀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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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 후 동부전선에서 이탈…루마니아, 연합군 지원 믿고 참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교전국의 후방이 와해되기 시작했다. 프랑스인들은 석탄이 부족해 한겨울에 냉방을 하지 못한채 떨어야 했고, 빵의 공급에 제한이 가해졌다. 독일에서도 육류는 구경하기 힘든 귀중품이 되었고, 국민들은 내핍에 시달리면서 각종 질병이 번져 나갔다.

러시아는 특히 심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연전연패 하면서 전쟁 초기인 1915년말에 수백만명의 병력을 잃었다. 모든 물자가 전선에 동원되는 바람에 러시아인들은 심각한 연료와 식량 부족을 겪어야 했다.

 

1917년에 접어들면서 수도 페테르부르크에서 군중들이 빵집을 약탈하고 시위와 폭동이 계속되었다. 수십만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빵을 달라고 요구하며 경찰서를 파괴했다. 차르 니콜라스 2세는 군대에 시위대를 진압하도록 명령했으나, 기병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볼린스키 연대가 차르의 출동명령 거부하고 장교를 살해한 후 반란에 가담하고, 다른 연대가 줄줄이 혁명 참여를 선언했다. 반란군은 구치소를 쳐들어가 정치범을 석방하고 무기를 탈취해 수도를 장악했다.

니콜라이 2세는 수도를 떠나 피신했다. 그는 페테르부르크를 탈환하려고 4개 연대를 파견했으나, 차르의 군대는 대부분 탈영해 버렸다. 드디어 알렉세예프 장군은 차르가 퇴위해야 사태가 수습된다고 요구했다. 차르 니콜라이는 퇴위했다. 이어 알렉산드르 케렌스키(Alexandr Kerensky)의 사회혁명당 정부가 들어섰다.

 

1897년, 레닌(가운데 앉은 이)와 노동자계급 해방투쟁연맹 회원들 /위키피디아
1897년, 레닌(가운데 앉은 이)와 노동자계급 해방투쟁연맹 회원들 /위키피디아

 

블라디미르 레닌이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신문을 통해 알게 된 것은 1917315일이었다. 그는 당시 스위스 취리히에 망명해 있었다. 그는 망명자들과 함께 기뻐하며 러시아 공산혁명을 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볼셰비키들에게 전보를 보내 케렌스키 정부에 대한 불신임을 촉구했다.

레닌은 어떻게 해서든 러시아로 귀국해 볼셰비키를 지도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스위스에서 러시아로 입국하는 모든 길이 차단되어 있었다. 러시아의 적대 진영인 독일 또는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지나야 했다.

레닌은 러시아의 적국인 독일에게 길을 열어달라고 요청했다. 독일 총참모본부는 러시아 정국을 흔들어 놓기 위해 레닌의 귀국을 허용했다. 독일은 포로 교환이라는 명분을 제시하며 레닌에게 밀봉열차(sealed train)를 제공했다.

레닌은 독일의 첩자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는 열차에 올라탔다. 밀봉열차는 여러 국가를 통과하면서 세관과 출입국 절차를 생략하는 비공식 특별열차였다. 이 열차에는 블라디미르 레닌(Vladimir Lenin)과 부인이자 혁명동지인 네데즈다 크루프스카야(Nadezhda Krupskaya), 그리고 30명의 혁명가들이 탔다.

취리히에서 출발한 비밀열차는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독일 북동부 항구도시 자스니츠에 일행을 내려 주었다. 레닌은 거기서 페리를 타고 스웨덴 트렐레보리 항에 도착해 러시아령 핀란드 헬싱키를 거쳐 416일 혁명의 도시 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레닌이 망명길에 나선지 조국 땅을 밟은 것은 10년만이었다.

 

1917년 4월 레닌이 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내릴 때의 열차 /위키피디아
1917년 4월 레닌이 페테르부르크 핀란드역에 내릴 때의 열차 /위키피디아

 

독일의 의도는 적중했다. 귀국 다음날 레닌은 볼셰비키 간부회의를 소집하고 4월 테제를 발표했다. 레닌은 케렌스키의 과도 정부를 부르조아지 정권으로 규정하고 프롤레타리아트를 대변하는 볼셰비키의 계급투쟁을 선동했다. 전쟁에 지친 병사들과 굶주린 러시아 인민들은 레닌을 지지했다. 레닌은 117일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초기 볼셰비키 정권은 취약했다. 1차 대전 중이어서 독일군이 서부지역을 점령해 모스크바로 진격해오고 내부적으로는 사회혁명당과 비러시아계 소수민족, 지주층 등 반혁명세력의 저항이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레닌은 혁명의 완수를 뒤로 미루고, 일단 생존하기로 결심한다. 혁명이 실패하고 소비에트 정권이 무너진다면 혁명의 기반이 사라지게 된다. 일단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독일과의 휴전을 제의한다. 독일의 조건은 가혹했다. 볼셰비키는 까다로운 조건을 거부했지만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은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페트로부르크에서 100km까지 밀고 들어오자 조건을 받아들였다. 러시아는 19183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Brest-Litowsk) 조약을 체결해 동부전선에서 발을 뺀다.

조약은 러시아에게 가혹했다. 러시아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점령한 지역을 넘겨준다는 조건이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 인구의 4분의1이 거주하고 공업 및 농업의 3분의1을 생산하는 알토란 같은 영토를 넘겨주었다. 게다가 핀란드, 우크라이나, 그루지야, 라트비아등 발트 3국의 독립을 인정해야 했고, 전쟁배상금 15억 달러를 물어야 했다.

굴욕적 정전협정은 사회혁명당은 물론 러시아 민족주의자, 군부를 자극했다. 레닌은 이 조약으로 볼셰비키가 숨쉴 틈을 얻게 됐다고 주장했지만, 볼셰비키에 중립적이던 많은 러시아인들의 등을 돌리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의해 독일에 할양된 영토 /위키피디아
1918년 3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 의해 독일에 할양된 영토 /위키피디아

 

볼셰비키만 숨쉴 틈을 얻은 게 아니었다. 독일도 동부전선에서 발을 뺄 여유가 생겼다. 독일은 동부 전선에서 40개 사단을 빼돌려 서부전선에 투입할 여력이 생겼다.

독일은 1918년 서부 전선에 춘계 대공세를 감행했다. 1918321일부터 시작된 서부전선의 공세는 실패했다. 미군의 파병 숫자가 늘어난데다 동부 전선 점령지를 콘트롤하기 위해 병력을 잔류시켜야 했기 때문에 서부전선에 신규로 투입되는 병력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1차, 2차 대전 전후 루마니아 영토 변경 /위키피디아
1차, 2차 대전 전후 루마니아 영토 변경 /위키피디아

 

러시아의 이탈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나라는 루마니아였다.

루마니아 왕가는 독일 황실은 호엔쫄레른가(Hohenzollern House)였다. 카롤(Carol)왕이 재위할 때만 해도 루마니아는 독일 황실에 대한 의리를 지켜 중립을 지켰다. 전쟁이 터진후 191410월 카롤이 숨지고 동생 페르디난드가 왕위에 올랐다. 페르디난트는 형과 생각을 달리했다. 페르디난드는 이 기회에 헝가리에게서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를 되찾아야 한다는 귀족들의 주장에 공감했다. 트란실바니아에는 인구 500만 가운데 280만명이 루마니아인이었다.

영국과 프랑스가 군사 훈련단을 보내왔고, 러시아가 무기와 탄약 공급을 약속했다. 연합국은 루마니아가 자기네 편에 선다면 20만 병력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페르디난드는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2년동안 군비 확충에 나서 1916년 여름에 보병 21개 사단, 기병 2개 사단을 확보했고 3개 사단을 증편해 총 병력 50만명을 준비했다. 전쟁 전보다 두배나 많은 숫자였다.

1916827일 루마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국왕 페르디난드는 혈연보다는 루마니아의 이익을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분노했다. 빌헬름은 호엔쫄레른 가문의 호적에서 페르디난드를 삭제해 버렸다.

하지만 병력 수만 늘렸을 뿐, 루마니아 군대의 질은 수준 이하였다. 장교들은 전투 경험이 없었고, 보급물자도 부족해 6주치 식량을 확보한 채 전쟁에 뛰어들었다.

루마니아는 러시아에 기대서 오스트리아의 트란실바니아를 공격했다. 초창기에는 숭전고를 울렸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곧 허점이 드러났다. 빈약한 도로망와 험준한 산길은 진격을 지연시켰고, 측방 연락을 불가능했다. 게다가 독일, 불가리아, 터키마저 루마니아에 선전포고했다.

1917년초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발하고 러시아군이 총구를 거꾸로 돌리면서 전세가 역전되엇다. 독일군이 루마니아 전선에 투입되면서 루마니아군은 사방에서 포위되었다. 191712월 수도 부쿠레슈티가 함락되고, 191817일까지 전 국토를 유린당하며 참패했다.

루마니아는 191858일 부쿠레슈티 조약을 맺고 동맹국에 항복했다. 40만명이 넘는 장병을 잃었고, 가옥과 학교, 공공기관과 산업시설이 파괴되었으며,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

하지만 페르디난드 국왕은 끝까지 항복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918년말 터키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연합국에 항복했다. 이어 독일이 1111일 항복문서에 서명하기 하루 전날인 1110, 페르디난드 국왕은 부쿠레슈티 조약을 파기하고 참전을 선언했다.

덕분에 루마니아는 1차 대전의 수혜국이 되었다. 루마니아는 1919년 베르사이유조약에 전승국으로 참여해 그토록 원하던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와 베사라비아(Bessarabia), 부코비나(Bukovina)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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