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⑪…독일 지머만의 비밀전보
1차 세계대전⑪…독일 지머만의 비밀전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2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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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보 내용 들통나고 잠수함 공격에 미국 상선 격침…미국 참전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스코틀랜드-아이리시 후손으로 친영국적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으나, 1차 세계대전에 미국이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미국은 유럽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이 건설했고, 영국계, 프랑스계는 물론 독일계 후손이 공존하는 나라였다. 윌슨은 무엇보다도 유럽의 전쟁이 미국인들이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국은 전쟁 초기 2년반 동안에 군대만 보내지 않았을뿐 농산물과 무기, 자금을 연합국에 제공해 독일-오스트리아 동맹국의 입장에서 성가신 존재였다.

 

1915년 독일이 선언한 배타적 수역 /위키피디아
1915년 독일이 선언한 배타적 수역 /위키피디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독일의 공세는 미국인들을 자극했다.

미국인들을 자극한 첫 번째 사건이 루시타니아호(RMS Lusitania) 침몰사건이다. 독일은 영국의 해상봉쇄에 맞서기 위해 잠수함 작전을 펼쳤다. 독일 해군은 19152월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 해역에 배타적 해역(exclusion zone)을 선언하고, 이 곳을 지나는 연합군 소속 함대와 상선에 대해 무차별로 공격했다. 독일 잠수함 U-보트의 공격으로 연합군 선박은 매달 50~100척씩 격침되었다.

1915415일엔 영국 해운회사 큐나드(Cunard) 소속 대형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아일랜드 남쪽 해상에서 독일 U-보트의 공격에 격침되었다. 승선인원 1,959명 중 1,198명이 사망했고, 이중 미국인 피해자도 128명이나 됐다. 1912년 타이태닉 침몰 이후 최대 여객선 침몰사건이었다.

전쟁에서 민간인을 살해하는 것은 범죄행위다. 전세계 여론이 들끓었고, 미국인들은 비교전 국가의 국민이 피해를 본 것에 분노했다. 하지만 독일은 잠수함 작전에 제한을 두겠다고 한발 뺐고, 윌슨 대통령도 이 일로 독일과 전쟁을 하는 것은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라 판단했다.

미국의 여론이 기울기 시작했다. 전임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임 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 언론인 월터 리프먼 등은 연합국 측에 가담하기 위해 전쟁 준비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계 이민자 출신 사뮤엘 인설(Samuel Insull) 같은 사업가는 자신의 재산을 풀어 영국 또는 캐나다 지원병을 모집했고, 일부는 민병대 훈련소를 만들어 전쟁 참여를 대비했다. 미국 최대 은행 J.P. 모건은 적극적으로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연합국을 지원했다.

이에 비해 포드사 CEO 헨리 포드의 경우 전쟁 참여를 반대하며 평화주의 운동을 지원했다. 국내에서 여론이 갈라지고 있는 가운데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은 미국의 참전을 꺼리고 교전국들에게 평화회담을 촉구했다.

 

1915년 4월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 공격에 침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5년 4월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독일 잠수함 공격에 침몰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20171월에 미국을 경악시킨 결정적인 사태가 발생했다. 이른바 지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 사건이다. 독일 외무장관 아르투르 지머만(Arthur Zimmermann)이 멕시코 정부에 참전을 요청하며 반대급부로 미국의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되찾게 해주겠다고 제의한 전보가 공개된 것이다.

독일 외무부의 전보는 영국 서남부 끝자락에 있는 포트쿠르노(Porthcurno) 전신국에서 감청되었다. 전쟁 중에 독일의 해저통신케이블은 영국 해군에 의해 절단되었고, 독일 외무부는 중립국인 덴마크의 통신망과 미국의 대서양 케이블을 활용해 아메리카와 전신을 주고 받았다. 미국의 케이블은 영국 남쪽 해안을 지나는데, 대서양 건너로 교신하려면 영국 해역에서 전자파를 증폭시켜야 했다. 영국 정보당국은 독일 전보를 포트쿠르노에서 감청하고 있었다.

117일 영국 정보당국은 독일 외무장관 지머만이 멕시코 주재 대사 하인리리 폰 에크하르트(Heinrich von Eckardt)에게 보내는 전보를 낚아 챘다. 그 내용은 어마어마했다. 난수표로 보내진 독일 전보는 곧바로 해독되었다. 전보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21일부로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미국이 중립을 유지하길 바란다. 별도로 멕시코에 우리와의 동맹을 제의하고, 미국에 빼앗긴 텍사스, 뉴멕시코, 애리조나를 공격하도록 하라. 독일이 금융지원을 할 것이다. 해결방법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 멕시코 대통령을 비밀리에 만나 가능한 빨리 미국에 전쟁을 시작하게 하라. 우리는 일본을 끌어들일 생각이다. 멕시코 대통령에게 우리가 무차별 잠수함 작전을 전개하면 영국이 몇 달 내에 평화 회담을 제의할 것임을 주지시켜라.”

 

지머만이 멕시코에 제시한 실지 회복지역.  /위키피디
지머만이 멕시코에 제시한 실지 회복지역. /위키피디

 

당시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어 있었다. 앞서 1914년 미국 해군이 멕시코 내전에 개입해 서부 항구도시 베라크루스(Veracruz)7개월간 점령한 일로 멕시코 국민들 사이에 미국에 대한 적개심이 높았다. 독일이 멕시코의 국민정서를 부추겨 미국과의 전쟁을 유발하려 한 것이다.

 

영국 정부는 감청 내용을 곧바로 미국에 알려줬다.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미국의 주류를 형성하는 영국계는 즉각적으로 독일과의 전쟁을 촉구했다. 하지만 영국에 반감을 갖고 있는 독일계와 아일랜드계는 유럽의 전쟁에 참여하길 싫어 했다.

처음에는 독일의 전보 내용이 미국 참전을 유도하려는 영국의 음모라는 설이 나왔다. 윌슨 행정부는 딜레마에 빠졌다. 영국은 정보가 사실이라는 증거들을 계속 보내왔다.

그런데 독일의 지머만이 전보 내용을 사실이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는 33일 미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보 내용에 대해 부정하지 않는다. 사실이다.”고 말했다. 329일 지머만은 의회에서 전보 내용이 진짜라고 인정했다. 당시 지머만의 구상은 미국의 뒷마당인 멕시코를 끌어들여 미국의 참전을 저지하고 멕시코 전쟁에서 물자롤 소비해 유럽에 보내는 물자공급을 줄이려자는 것이었다.

 

지머만 /위키피디아
지머만 /위키피디아

 

멕시코의 베누스티아노 카란사(Venustiano Carranza) 대통령은 독일이 전한 전보 내용을 군부에 전해주고 실지 회복의 가능성을 알아보라고 했다. 군부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군부의 판단은 멕시코가 혁명 전쟁 중이어서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고, 미군이 멕시코 군에 비해 월등하게 우세하며, 독일이 제시한 금융지원은 실현가능성이 없다는 것이었다. 멕시코 정부는 독일의 제의를 거절하며 중립을 지키겠다고 통보했고, 그 사실을 미국에도 알렸다. 독일의 장난에 의해 미국과 전쟁을 벌이는 것을 피하려 한 것이다.

미국은 1917~1918년에 멕시코 베라크루스를 다시 침공할 계획을 세웠지만, 카란사 대통령이 미국이 공격하면 유전을 폭파하겠다고 강하게 나오는 바람에 포기했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유럽 전쟁이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독일의 제의를 받은 일본도 거절했다. 일본은 이미 연합국에 가담했기 때문에 편을 바꿀 필요가 없었는데다 독일령 칭다오(靑島)를 점령했기 때문에 더 얻을게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결국 지머만이 자충수를 둔 결과가 되었다.

 

지머만의 전보가 공개된 후 전보 내용대로 21일 독일은 중립국 선박에 대해서도 무차별 잠수함 공격을 퍼부었다. 2월에 미국 선박 2척이 독일군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었다. 미국 상선들은 출항하지 않고 항구에 대기하자, 윌슨 대통령은 미국 상선에 해군을 탑승시키고 무기를 탑재하라고 명령했다.

3월에 미국 상선 5척이 또 독일 U-보트에 의해 침몰했다. 미국 국민들은 분노했고, 언론들은 윌슨에게 독일에 개전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반전론자들은 매국노로 치부되었다.

윌슨 대통령은 마침내 전쟁 참여를 결심하고 42일 전쟁 비준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윌슨은 모든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전세계 민주주의를 위해 전쟁에 참여한다고 밝혔다.

46일 상원은 826의 압도적 표결로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를 의결했고, 하원은 37350으로 가결시켰다. 다음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대한 선전포고에 상원은 740, 하원은 3651로 가결했다.

 

미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지만 당장 전세에 영향을 주지 못했다. 미국 상부군 규모가 13만명에 불과했기 때문에 보명 1개사단과 해병 2개 사단만 급파했다.

19175월 미국은 장병제를 도입해 상비군을 대폭 늘렸고, 원정군 사령관 존 퍼싱(John J. Pershing) 장군을 프랑스에 파견했다. 유럽 전선의 판도는 서서히 증파하는 미군에 의해 바뀌게 된다.

 

지머만이 보낸 전보 난수표 /위키피디아
지머만이 보낸 전보 난수표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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