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대전⑫…아발란치에 깔린 병사들
1차 세계대전⑫…아발란치에 깔린 병사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3 15: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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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티롤 공격…적보다 무서운 건 지형과 기후

 

이탈리아 북부 남티롤(South Tyrol)은 알프스 산맥 남쪽 사면에 있는 주(), 인구 53만명 가운데 62%가 독일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의 북티롤과 동티롤, 이탈리아의 트렌티노와 합쳐 티롤 백작령(County of Tyrol)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였다. 1805년 나폴레옹이 프랑스에 협조하는 독일 바이에른 왕국에게 티롤 백작령을 넘겨 주었는데, 티롤 귀족들과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프랑스와 베이에른의 연합공격을 막아 냈다. 나폴레옹 몰락후 1차 대전초까지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티롤 지방(붉은 색)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티롤 지방(붉은 색) /위키피디아

 

이탈리아가 1차 대전에 연합국측에 참가한 것은 알프스 산맥의 티롤 백작령과 아드리아해 연안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뺏기 위해서였다.

이탈리아는 1882년부터 독일,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체결해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영토 내에 이탈리아인들이 많이 사는 트렌티노(Trentino)와 연안주(Littoral)를 회복하기 위해 1902년 프랑스와 비밀조약을 맺었다. 조약 내용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공격할 경우 이탈리아는 중립을 지키겠다는 것이었다.

191481차 대전이 발발한 후, 연합국측이나 동맹국측 모두 한 나라라도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외교전을 펼쳤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탈리아가 동맹국 측에 가담할줄 알았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프랑스와의 비밀조약에 의거해 동맹국측에 군사력 제공을 거절하자 실망했다. 이에 오스트리아측은 이탈리아를 끌어들이기 위해 프랑스가 점령하고 있는 아프리카 튀니지를 가져 가라고 했다. 연합국측도 이탈리아에게 선물을 주었다.

이탈리아는 양측의 조건을 재다가 연합국의 조건을 받아들여 1915523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하고, 6개월후에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를 했다. 이탈리아는 알프스에서 아드리아해 동해안에 이르기까지 350km의 긴 전선을 펼치며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벌였다.

 

1차 대전 직전의 티롤 백작령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직전의 티롤 백작령 /위키피디아

 

특히 티롤을 둘러싼 알프스 전투는 산악 지형과 기후와의 싸움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주력군은 러시아와의 전투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티롤에는 예비병력 17,000명만 남아 있었다. 이탈리아군은 30만명으로 201의 절대적 우위에 있었다. 화력에서도 이탈리아군은 101로 압도적이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선 티롤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민병대를 조직했다. 인스부르크와 잘츠부르크의 남자들은 대부분 총을 들었다. 15세 학생에서 70세 노인까지 티롤을 상장하는 독수리 마크를 달고 나섰다. 한 번도 군사훈련을 받아보지 않은 24,000명의 티롤 민병대는 돌로미테(Dolomites) 고지를 지켰다.

이탈리아 총사령관 카르도나(Luigi Cadorna)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는 그깟 민병대 쯤이야 쉽게 돌파할 것이라 생각하고 티롤의 수도 인스부르크를 향해 진격했다.

 

이탈리아의 알피니 부대 /위키피디아
이탈리아의 알피니 부대 /위키피디아

 

돌로미테 지역의 콜디라나(Col di Lana) 산은 해발 2,462m. 오스트리아 군은 이 산에 방어 기지를 구축했다. 이탈리아는 산악전에 유능한 알피니(Alpini) 부대를 산 자락에 주둔시키고 산 정상을 행해 포격을 가했다.

티롤의 민병대들은 이탈리아의 포격을 뚫고 여름 내내 진지작업에 나섰다. 7월인데도 고지대에는 눈이 내렸다. 평지의 참호 작업은 흙을 파내는 것이었지만, 알프스의 참호는 돌산을 깨서 터널을 뚫는 대역사였다. 목재를 운반하기 위해 빙하에서 녹아내리는 물을 건너야 했다. 산 아래 이탈리아군의 포격을 피해 산에 굴을 뚫었다. 암벽에서 돌을 캐내고 그 안에 숙소를 만들었다. 보급품을 운반하는 일에도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다. 평지를 지날 때엔 이탈리아 저격수의 표적이 되었다. 암벽을 오르다 실족해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티롤인들은 로프에 매달려 50kg나 되는 보급품과 무기를 날랐다.

정상에서 200m 아래에 있는 이탈리아군이 진지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의 진지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수시로 포격을 가했다. 잠깐 참호 바깥을 내다보던 오스트리아 병사는 이탈리아군의 저격에 사망했다.

 

오스트리아군이 판 동굴 진지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군이 판 동굴 진지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군의 진지가 구축될 무렵인 117일 이탈리아 알피니 부대는 콜디라나 산을 향해 총공세를 가했다. 산 아래에서 무차별 포격이 전개되는 가운데 이탈리아 알피니 부대는 절벽 틈새로 기어 올라왔다. 소수의 티롤 민병대들은 절벽 사이를 넘나들며 완강하게 저항했다. 이탈리아의 오합지졸들은 정상을 탈환하는데 실패했다.

1915년 한해 동안에 이탈리아군의 피해는 부상 장교 199, 사망 장교 104, 실종 장교 14, 부상 사명 5,160, 사망 사병 1,050, 실종 사병 435명이었다. 실종자는 눈사태(avalanche)로 사망이 확인되지 않은 자를 말한다. 전투보다 무서운 것은 아발란치였다. 언제 어디서 알프스의 눈사태가 덥쳐 올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탈리아군은 마지막 수단을 연구해 냈다. 정상 아랫부분까지 터널을 뚫어 폭파시키는 방법이었다. 19162월에 날씨가 풀리자 주세페 가리발디(Giuseppe Garibaldi) 중령은 정상을 향해 갱도 작업을 지시했다. 공병대와 굴착기가 동원되고 터널작업이 시작되었다. 터널 작업은 2개월이 걸렸다. 오스트리아 군도 정상부에 폭파에 대비해 대피터널을 만들었다.

416일 밤 이탈리아군은 터널을 폭파시켰다. 콜디라나산의 정상부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100m 너비의 분화구가 생겨났다. 150명의 오스트리아 병사는 폭발과 함께 사라졌다. 다행스럽게 일부 병사가 터널 속에서 살아 남았지만, 이탈리아군에 체포되었다.

이름 없는 산 하나를 점령하기 위해 이탈리아는 엄청난 희생을 치러야 했다. 이탈이아인들은 양털이라는 뜻의 콜디라나 산을 피의 산이라는 의미로 콜디상귀(Col di Sangue)라고 불렀다.

 

콜디라나 전투에 희생자를 기리는 성당 /위키피디아
콜디라나 전투에 희생자를 기리는 성당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군에겐 알프스 전투가 산 너머 산이었다. 엄청난 희생을 내며 콜디라나 산을 점령한 다음에 해발 3,360m의 마르몰라다(Marmolada) 산으로 향했다. 12월초 내내 눈이 내리거나 눈보라가 몰아쳤다.

1213일 금요일, 그날은 산타 루치아(Saint Lucia)의 날이었다. 그날 따라 날씨는 모처럼 개고 춥지도 않았다.

오스트리아 1개 대대가 빙하 절벽 아래에 진을 치고 있었다. 계곡 아래에는 이탈리아군이 진지를 틀고 오스트리아 군을 향해 포격을 가했다. 오전 530, 이탈리아의 포탄 한발이 산의 설원에 떨어졌다.

포탄이 산을 흔들더니 커다란 눈더미가 비탈을 타고 내려왔다. 눈더미는 점점 속도가 붙고 압력이 가해지면서 시속 300km로 쾌속 질주했다. 20만톤 100의 거대한 눈사태가 계곡을 휩쓸고 지나갔다. 참호는 사라졌고 대포는 공중에 날아올랐고 막사는 휩쓸려 내려갔다.

첫 번째 아발란치로 오스트리아군 270명이 죽었다. 이어진 아발린치로 이탈리아군과 지원차 온 보스니아군을 덥쳤다. 죽은 사람의 숫자는 명확치 않다. 전사 기록자들은 양측 모두 합쳐 1만명이 사망했을 것으로 본다. 이 산사태는 1970년 페루의 우아스카란 눈사태(Huascarán avalanche)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아발란치 사고로 기록된다. 전사 기록자들은 이 사고를 백색 금요일’(White Friday) 사고라고 명명했다.

 

1916년 12월 13일 금요일, 눈사태로 폐허가 된 오스트리아 진지 잔해 /위키피디아
1916년 12월 13일 금요일, 눈사태로 폐허가 된 오스트리아 진지 잔해 /위키피디아

 

이탈리아는 1차 대전에 참전해 53만명의 사망자와 120만명의 부상자를 냈지만, 알프스의 돌덩이 산과 달마치아의 일부를 얻는데 그쳤다.

이탈리아는 1차 대전이 끝나고 런던과 베르사이유에서 열린 종전 회담에서 미국, 영국, 프랑스와 대등한 자격으로 빅4에 끼이려고 했지만, 세 나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이탈리아는 독일의 식민지를 달라고 했는데, 연합국들이 이를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국내에서는 전쟁 후유증으로 경제 파탄이 심각해 졌다. 결국 전쟁 후유증으로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등장하게 된다.

 

티롤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위키피디아
티롤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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