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④…무천행사가 오늘날 단오제로
사라진 고대왕국 예국④…무천행사가 오늘날 단오제로
  • 아틀라스
  • 승인 2019.04.25 1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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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사군 지배받다가 신라 북진에 고구려에 복속…동해안에 500년 군림

 

한국의 고대사학자들은 삼국사기를 정사로 받들어 모시고, 삼국유사를 보조사료로 삼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우리의 조상들이 쓴 사서에는 정작 예국에 관한 기사가 드믈다. 예국의 정치, 사회, 문화에 관한 내용은 중국인 진수가 쓴 삼국지 동이전에 오히려 자세하게 나온다. 삼국지는 당대에 쓰여진 사서이므로, 1,000년 후에 고려인이 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보다는 자세하고 정확할 수밖에 없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밝힌 예국의 생활상을 들여다 보자.

규모: 예의 호수는 2만으로, 1호를 5인 가구로 보면 인구가 10만명쯤 된다. 부여의 호수가 8만이니, 부여보다 작고, 고구려의 3만과 엇비슷하며, 옥저 5천에 비하면 큰 나라다.

읍락국가체제: 대군장이 없고,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 관직에 후()읍군삼로가 있어 백성(하호)를 다스렸다. 스스로 고구려와 같은 종족으로 생각했다. 사람들의 성질은 삼갈 줄 알고, 성실하다. 즐기고, 탐욕함이 적고, 겸손하고, 부끄러워 할 줄 알아, 고구려에 구걸하지 않았다. 언어와 법속은 대체로 고구려와 같은데 의복만은 조금 달랐다.

책화(責禍)제도: 산천을 중시하여 산천으로 각각 부()를 나누었고, 서로 들어와 허튼 짓을 못하게 했다. 읍락끼리 서로 침범을 하면, 서로 꾸짖어 소나 말로 갚는데, 이를 책화라 한다. 사람을 죽이면 죽음으로 갚아 도둑이 적다.

족외혼: 같은 성씨끼리는 혼인하지 않고 꺼리는 것들이 많았다.

질병으로 사람이 죽으면 서둘러 버리고, 옛 집을 버리고 새로 집을 짓는다. 마포가 있으며 양잠을 하고 면을 짠다. 별자리를 보아서 그 해의 풍년이 들 지를 알고,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다.

) 무천(舞天): 항상 시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밤낮없이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추니, 이름하여 무천이라 했다.

호랑이 신앙: 범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지낸다.

) 전술: 창은 길이가 3장이나 되니 여러 사람이 함께 긴 창을 들기도 한다. 보병전에 능하다.

특산물: 낙랑단궁이 나오고 바다에서는 반어피가 나며 얼룩표범이 있고 또한 과하마(果下馬)가 나온다. 과하마는 높이가 석 자인데 타면 과일나무 밑을 지나갈 수 있고 해서 과하(果下)'라고 했다.

 

삼국지 동이전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예국은 공동체적 유대가 강하게 유지되고 있었음을 알수 있다. 하지만 국가라는 개념보다는 부족의 개념이 강했다. 산천을 경계로 한 일정 지역 내의 경작지는 읍락 공동 소유의 개념으로 운영한 것으로 보인다.

구슬과 옥을 보배로 여기지 않을 정도로 탐욕이 없고, 호랑이를 신으로 섬기며, 무천과 같은 공동의 축제의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사회분화가 덜 이뤄진 초기 공동체사회로 파악된다.

55일 강릉 단오제가 예의 무천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강릉 단오장의굿당 /문화재청
강릉 단오장의굿당 /문화재청

 

예국은 처음에 고조선에 복속돼 있다가 기원전 108년 한()나라가 원산, 안변 일대를 중심으로 임둔군(臨屯郡)을 설치하자 예국을 그 지배 하에 넣었다. 기원전 82년 임둔군을 폐하고, 기원전 75년에는 현도군(玄免郡)을 요동으로 옮기면서 한()은 한반도 동부지역에 예국과 옥저 지역 7개현은 새롭게 설치된 낙랑군 동부도위(東部都尉)의 지배 아래 두었다. 동부도위의 치소(治所)는 예국의 불내성(不耐城)으로, 지금 함경남도 안변에 해당한다.

()은 서기 30년 동부도위마저 폐한후 예국과 옥저를 낙랑군 관할로 남겼다. 낙랑군은 거수(渠帥)라고 불리는 예국 부족장들을 현()의 후(), 즉 현후(縣侯)에 봉했다. 이때부터 예국의 현후(縣侯)들은 낙랑군의 간접지배를 받으면서 읍락내의 일을 자치적으로 처리했다.

예국은 2세기말 한()의 세력이 약화될 무렵에 고구려에 복속한다. 한이 멸망하고, 중국 중원에 위()가 들어서자, 고구려와 위가 만주와 한반도를 놓고 패권전쟁을 벌였고, 예국도 그 싸움에 휘말렸다.

서기 245(고구려 동천왕 19), 위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침공해 동천왕이 옥저로 피신할 때, ()의 예하에 있는 낙랑과 대방군이 예국을 침공했다.

 

정시(正始) 6(245) 낙랑태수 유무, 대방태수(帶方)태수 궁준(弓遵)이 고개 동쪽의 예가 고구려에 속하게 되자, 군사를 일으켜 이를 쳤다. 불내후(不耐侯) 등은 읍을 들어 항복했다. 8년에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니, 불내(不耐)를 예왕으로 봉했다.”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킨 (313) 후 예국은 다시 고구려에 복속하게 됐다.

예국이 언제 멸망했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이사부가 실직군주(505)에 이어 하슬라군주(512)에 임명되면서 동해안 일대에 대한 신라의 지배력을 확고히 한 시점을 전후로 예족은 북한 지역으로 밀려나 동해안에서 소멸된 것으로 관측된다. 그후 신라를 공격하는 말갈의 기사는 예족이 아닌, 진짜 말갈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 시기에 예족(濊族)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이때 이사부는 국방장관격인 병부령을 밭고 있었다.

 

진흥왕 9(548) 2, 고구려가 예인(穢人)과 함께 백제의 독산성(獨山城)을 공격하자 백제가 구원을 청했다. 임금은 장군 주령(朱玲)을 보냈다. 주령은 굳센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들을 공격하여, 죽이거나 사로잡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예()의 자리에 말갈을 대신 끼워 넣었지만, 6세기 중엽에 예인(濊人)의 존재를 표현했다. 예족이 고구려 땅으로 건너가 복속하고, 전투시 고구려군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국은 처음엔 한사군의 지배를 받다가 고구려에 복속하고, 나중엔 신라에 의해 영토의 대두분을 뺏겼지만, 한반도 동해안에 적어도 500년 안팎의 긴 세월을 보내며 실재했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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