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그후①…미국의 전쟁 광기
1차 대전 그후①…미국의 전쟁 광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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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슨 정부, 전쟁 선동조직 발족, 독일계 등록 및 감금, 독일식 명칭 개명

 

전쟁은 전선에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교전국들은 국내에서도 전선을 형성했다. 1차 세계대전에 참여한 나라들은 자국민을 상대로 국내에서 전쟁을 옹호하는 선전선동 캠페인을 벌이고 적국과의 내통자들에 대한 탄압과 간첩 몰이를 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74월 미국이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를 한 후, 우드로 윌슨 행정부는 간첩법(Espionage Act)과 보안법(Sedition Act)을 제정했다. 이 법안들은 적성국에 우호적인 행위를 하거나 미국의 전쟁 참여를 비판하는 행위를 범죄로 규정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건국한 미 합중국은 전쟁에 참여한 이후 철저하게 자유를 제한했다.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고 수단이었으며, 이를 거스르는 자는 매국노로 몰아붙였다.

윌슨 행정부는 선전기관으로 공공정보위원회(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를 신설해 전쟁의 당위성을 옹호하는 포스터를 대량으로 제작해 거리와 공장, 공공장소에 내붙였다. 유명 학자와 작가들이 이 조직에 참여해 반독일 팸플릿과 영화를 제작했다.

이 선전위원회는 언론인 출신 조지 크릴(George Creel)이 책임자를 맡았다. 크릴이 고안해 낸 것이 ‘4분 연설자들’(Four Minute Men)이란 프로그램이었다. 한 사람에게 4분동안 연설할 기회를 준다. 주제는 위원회에서 내려 준다. 연설자들이 대중들에게서 자발적인 전쟁 참여를 호소하고 반전 세력에 증오심을 키우는 선동기법이었다. 1917~1918년 사이에 4분 연설에 참여한 사람들은 750만명에 이른다. 당시 미국인구가 1억명 정도였으니, 100명중 7~8명이 한마디씩 했다. 장소는 타운미팅이나 각종 대중집회, 영화관 등이었고, 5,200개의 코뮤니티에서 연설이 이뤄졌다.

독일계 이민자 후손이나 영국을 미워하는 아일랜드인, 전쟁에 중립적인 스칸디나비아 후손들은 4분의 기회를 받지 못했다. 일종의 국민웅변대회였다. 연설은 대체로 윌슨 대통령의 영도력을 칭찬하고, 독일인들을 비난한 내용으로 가득 찼다.

이 당시 움직이는 그림, 즉 영화가 등장했다. 영화도 전쟁을 지지하고 적개심을 높이는데 활용되었다. 가장 인기를 끈 영화는 카이저, 베를린의 야수’(The Kaiser, the Beast of Berlin, 1918)였다. 이 영화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을 부추기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챌리 채플린의 어깨 총’(Shoulder Arms, 1918)도 그런 부류였다.

 

영화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가 전쟁채권 매입을 호소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영화배우 더글러스 페어뱅크가 전쟁채권 매입을 호소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준정부기관인 친위조직도 만들어졌다. 미국수호연맹(APL: American Protective League)이란 조직은 형식적으로는 민간조직이었다.

시카고의 부호 브릭스(A. M. Briggs)라는 인물은 광고전문가였는데, 미국 법무부를 불신했다. 법무부 내에 간첩들이 많다고 믿었던 그는 전쟁 지원을 위한 임의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APL을 조직했다. APL은 무보수로 일할 지원자로 회원을 구성하고, 1917322일 법무부의 인가를 받았다.

APL은 공식적으로는 비정부조직이었지만 실제로는 전쟁기간에 정부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 조직의 절대적 후원자는 당시 검찰총장 토머스 그레고리(Thomas W. Gregory)였다. APL이 정보를 모집해 FBI에 보고하면, FBI는 수사에 들어갔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브릭스와 그의 부하들은 검찰과 FBI, 군 정보기관, 국무부의 공인을 받은 보조 조직이라고 보도했다. 전성기에 APL의 회원은 25만명에 이르렀고, 미국인의 절반인 5천만명이 그들의 활동범위 내에 있었다고 한다.

 

미국수호연맹(APL) 회원증 /위키피디아
미국수호연맹(APL) 회원증 /위키피디아

 

이 친위조직은 징병을 거부하는 사람, 독일 이민자의 후손, 독일을 동정하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습격하는 일을 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준으로 비애국자들을 가려냈다. 뉴욕에서는 병역기피자들을 수색해 75,000명을 체포하는데 한몫을 했고, 클리블랜드에서는 사회주의 집회를 저지하기도 했다. 여성회원들도 모집했는데, 여성들은 공장이나 집회에 참여해 불온한 사상을 가진 사람들을 찾아내는 일을 했다. 무정부주의자, 노동자계급 선동자, 평화주의 운동가들도 그들의 감시 대상이었다.

윌슨 대통령은 이들의 반인권적 행위를 알고 있었지만, 그들을 두둔하는 그레고리 검찰총장의 말을 듣고 내버려 두었다. 이 조직은 1차 대전 종전후 그리고리 총장에 교체되면서 해체된다. 1920년대에 백인우월주의자들이 KKK(Ku Klux Klan)을 조직할 때 APL의 회원들을 대거 흡수했다.

 

독일인에게 지문 날인을 강요하는 뉴욕 경찰(1917) /위키피디아
독일인에게 지문 날인을 강요하는 뉴욕 경찰(1917) /위키피디아

 

1차 대전기간에 독일 이민자와 후손들은 미국에서 적대시되었다. 이민자의 나라가 특정 이민자를 배척한 것이다.

윌슨 대통령은 독일에 선전포고와 동시에 14세 이상 독일 출신 남성을 규제하는 포고령을 내렸다. 시민권자라도 독일출신은 예외 없이 외국인(alien)으로 분류되었다. 이 범주에 드는 사람은 지역 우체국에 등록하도록 했는데, 25만명에 달했다. 이들에게는 별도의 카드가 발급되어 항상 소지하고, 직장이나 주소지를 옮길 때에 관청에 보고하도록 했다. 19184월에는 독일출신 여성에게도 동일한 규정이 적용되었다. 규정을 어긴 6,300명이 체포되었다. 이중 죄질이 중한 사람 2,048명은 유타와 조지아주의 수용소에 감금되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 가운데는 당시 유명한 유전학자 리처드 골드슈미트씨와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 단원 29명도 포함되었다. 이 오케스트라는 수용소 내에서 멋진 연주를 들려 주기도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전쟁이 터지자 우드로 윌슨의 정적이자 전임 대통령인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미국인들의 이중국적성을 버릴 것을 주창했다. 자기의 출신 국적에 따라 편을 들지 말고 미국이 지향하는 전쟁 대의에 모두 참여할 것을 호소한 것이다. 그의 말은 독일계 미국인들에게 침묵을 강요한 것이나 다름 없다.

 

1차 대전 중 수용소에 감금된 독일계 미국인들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중 수용소에 감금된 독일계 미국인들 /위키피디아

 

독일 출신자들의 명부가 만들어지고 일부는 수용소에 구치되는 사태가 벌어지자 미국내에서 반독일 풍조가 만연했다. 중립을 지켜야 할 미국 적십자사도 독일인 성을 가진 사람의 회원 가입을 거부했고, 일리노이 주에선 독일출신자가 스파이 혐의로 린치를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 미국에 찬성하지 않겠다는 독일인도 숱하게 구치소로 갔다.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프레데릭 스톡은 독일 출신자라는 이유로 37년간 맡았던 지휘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이 오케스트라는 독일 작곡가 바그너의 음악 연주를 중단하고 프랑스의 베를리오즈를 연주했다.

전쟁의 광풍은 독일 이름 지우기로 이어졌다. 미시건주의 벌린(Berlin)은 연합군의 승전한 프랑스 도시 마른 (Marne)으로 바꿨고, 오하이오주의 벌린은 포트 로레이니(Fort Loramie), 테네시주의 저먼타운은 네쇼바(Neshoba)로 각각 지명을 변경했다. 시카고의 뤼벡, 프랑크푸르트, 함부르크 가는 디킨스, 찰스턴, 셰익스피어 가로 변경되었고, 뉴욕 브루클린의 함부르크 애비뉴는 윌슨 애비뉴로 바뀌었다.

기업은 독일 냄새가 나는 사명도 바꿨다. 시카고의 저먼 병원은 그란트 병원으로, 뉴욕의 자이언트 저먼 생명보험은 가디언 생명보험으로 개칭했다. 학교에서는 독일어 수업이 중단되었다. 심지어 음식과 개의 명칭도 바뀌었다.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란 독일식 표현의 양배추는 리버티 캐비지(liberty cabbage), 독일도시 함부르크를 상징하는 햄버거는 샌드위치로 바뀌었고, 독일종 개 닥스훈트(dachshund)는 리버티 펍스(liberty pups)로 바꿔 불렀다.

독일계 후손들은 성도 영어로 갈아야 했다. 슈미트(Schmidt)는 스미스(Smith), 뮐러(Müller)는 밀러(Miller)로 바꿨다. 살기 위해선 어쩔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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