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그후②…독일의 편에 선 불가리아
1차대전 그후②…독일의 편에 선 불가리아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5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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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었던 땅을 모두 되찾았으나, 연합국 공격으로 동맹국중 가장 먼저 항복

 

동유럽의 불기리아는 1차 세계대전 중에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불가리아가 연합국측에 붙으면 오스만 투르크가 차단하고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공략해 러시아의 흑해함대의 통로를 열수 있다. 거꾸로 불가리아가 독일측-오스트리아 측에 붙으면 오스만투르크까지 잇는 긴 띠가 형성되어 연합국측을 갈라치게 된다. 불가리아는 2차 발칸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당시 발칸국가 중에서 최가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였다.

불가리아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중립을 선언했다. 하지만 빨리 끝날줄 알았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연합국과 동맹국들이 경쟁적으로 불가리아에 제휴의 손길을 내밀었다.

 

불가리아인은 오랜 역사 과정에서 유라시아 초원의 유목민족과 그리스계 트리카아족, 슬라브족의 피가 섞이면서 형성된 인종으로, 동유럽 슬라브족과의 유대감이 약했다. 중세 시대에 두차례의 제국(6811018, 11851396)을 형성하며 동유럽을 호령했고, 1878년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애서 벗어나 세 번째 제국을 형성했다. 불가리아의 군주는 스스로 동로마제국, 러시아 제국의 황제와 동등한 지위의 차르(Tsar)라 불렀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불가리아의 차르 페르디난트 1(Ferdinand I)는 독일 혈통이었다. 그는 독일 귀족 가문(Saxe-Coburg and Gotha-Koháry)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났다. 그는 러시아의 야욕을 견제하려는 불가리아 귀족들의 추천으로 군주에 선발되어 독일-오스트리아와의 친연성이 있었다.

 

1918년 소피아를 방문한 독일 빌헬름 2세와 불가리아 페르디난트 1세. /위키피디아
1918년 소피아를 방문한 독일 빌헬름 2세와 불가리아 페르디난트 1세. /위키피디아

 

1914년 여름,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를 공격하면서 유럽 전쟁으로 확대되었을 때, 불가리아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중립을 지켰다. 한해 전에 끝난 발칸 전쟁의 피로감이 후유증이 해소되지 않은데다 교전국 모두가 적대국이었다. 총리 바실 라도슬라포프(Vasil Radoslavov)는 독일 하이델바르크대학에서 공부한 친독파였지만 발칸 전쟁에서 외교에 실패한 오류를 되새기며 새로운 상황전개를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교전국들도 속전속결을 통해 전쟁을 조기에 매듭지으려 했기 때문에 불가리아의 중립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해를 넘겨 1915,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터키 해협의 갈리폴리반도 공격에 참패하고,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가 독일에 패주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연합국들은 불가리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불가리아가 오스만 투르크의 후방을 공격하면 보스포루스와 다르다넬스 해협을 장악하는 게 쉬웠다.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위키피디아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위키피디아

 

영국은 불가리아의 참전을 요구하기 위해 반대급부를 제시해야 했다. 불가리아가 피를 흘릴 댓가로 줄수 있는 것이 마케도니아였다.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2차 발칸 전쟁에서 세르비아와 그리스에게 분할된 지역이었다. 영국은 세르비아에 영향력이 큰 러시아를 설득했다. 러시아 외무장관 사조노프는 세르비아에 마케도니아를 넘겨주고 불가리아를 끌어들이자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세르비아는 보스니아를 오스트리아에 내줄지언정 마케도니아를 내줄수 없다고 완강하게 버텼다.

불가리아가 요구하는 마케도니아는 지금의 북마케도니아공화국의 영토보다 넓은 광역 마케도니아(Vardar Macedonia)였다 여기에는 그리스 지역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스도 불가리아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급한 연합국은 오스만 투르크를 공격하면 투르크의 유럽지역인 트라키아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하지만 불가리아는 이 기회에 광역 마케도니아를 모두 되칮겠다는 욕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도 불가리아에 손을 내밀었다. 독일은 세르비아와 그리스가 차지하고 있는 마케도니아 전부를 가져가라고 제의했다. 이에 불가리아는 2차 발칸 전쟁에서 오스만 투르크에게 뺏긴 트라키아의 일부를 추가로 달라고 했다. 독일은 동맹국인 오스만 투르크에 불가리아의 요구를 들어줄 것을 설득했다. 오스만은 영국과 러시아의 협공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불가리아마저 배후를 공격하면 사면초가가 될 우려가 있었다. 차라리 영토 일부를 주는 게 나을수도 있었다. 오스만은 마지못해 독일의 제의를 수락했다.

두 진영의 제의 가운데 불가리아에겐 독일의 제의가 유리했다. 독일은 게다가 연합국에 붙어 루마니아를 공격해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면 그 영토도 인정하겠다고도 했다. 불가리아 입장에선 2차 발칸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모두 되찾고 설욕을 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1차 대전중 불가리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만나는 장면을 그린 엽서 /위키피디아
1차 대전중 불가리아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만나는 장면을 그린 엽서 /위키피디아

 

1915년 여름,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선 연합국과 동맹국의 외교관들이 들락거리면서 뜨거운 외교전을 펼쳤다. 이때 연합국측에서 불가리아를 압박하려다 실수를 저질렀다. 연합국의 한 대리인이 불가리아 곡물을 매집해 식량위기를 초래하려고 시도했다. 이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고 모의자가 체포되었다. 불가리아는 독일-오스트리아로 기울어 졌다.

191596일 불가리아는 공식적으로 동맹국으로 가담하기로 결정하고 라도슬라포프 총리와 독일 대사 사이에 협상을 벌였다. 양측은 불가리아가 마케도니아 전체와 트라키아 일부, 루마니아의 실지를 회복하고, 독일이 금융지원을 하는 내용에 합의를 보았다.

922일 불가리아는 총동원령을 내리고, 1014일 세르비아에 대해 선전포고를 했다.

 

불가리아 군은 의외로 강했다. 42만명의 불가리아군은 속공 작전을 펼쳐 2개월만에 세르비아 영토 절반을 점령했다. 영국군은 터키 해협의 갈리폴리에 갇혀 있었고 러시아군은 독일에 밀리면서 세르비아를 도와줄 수 없었다. 세르비아는 불가리아-오스트리아의 협공에 영토의 대부분을 잃었다.

불가리아는 점령지에서 세르비아인을 가혹하게 처리했다. 수르둘리차(Surdulica)라는 곳에서는 세르비아인 2,000~3,000명을 처형했고, 1917년까지 2만명의 세르비아 민간인과 저항군을 살해했다고 한다.

불가리아는 루마니아로 쳐들어갔다. 루마니아 국왕은 불가리아 차르와 이름이 같은 페르디난트(Ferdinand), 독일 황실인 호엔쫄레른 가문이었다. 불가리아 왕실과 루마니아 왕실은 인척관계에 있었다. 전쟁에서는 인척이 소용 없다. 불가리아는 1917년 오스트리아, 독일과 연합으로 루마니아를 공격해 수도 부쿠레슈티를 점령했다.

 

1차 대전중 불가리아군의 공격 /위키피디아
1차 대전중 불가리아군의 공격 /위키피디아

 

하지만 1918년 들어 미국이 참전하면서 전세가 역전되고 불가리아는 영국, 프랑스, 세르비아, 그리스의 합동공격을 받게 되었다. 차르 페르디난트는 불가리아의 살 길을 선택해야 했다. 국왕은 동맹국 가운데 가장 먼저 연합국에 항복을 제의했다.

복수심에 가득찬 세르비아가 불가리아가 패주할 때 영토내로 진입하려 시도했으나, 영국이 말렸다. 세르비아가 거꾸로 인종청소의 보복을 치를 우려가 있는데다, 영국은 전쟁을 확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1918928일 그리스 테살로니카에서 연합국과 불가리아 사이에 살로니카 정전협정(Armistice of Salonica)이 체결되었다. 협정조건은 불가리아에게 굴욕적이었지만 영토는 보전했다. 불가리아가 전쟁에서 빼앗은 모든 땅을 돌려주는 조건이었다. 군대수도 15만명으로 제한되었다.

 

1918년 살로니카 정전회담 /위키피디아
1918년 살로니카 정전회담 /위키피디아

 

페르디난트 1세는 정전협정 체결 직후인 103일 전쟁의 책임을 지고 장남 보리스 3(Boris III)에게 양위하고 물러났다. 페르디난트는 양위 후에 본향인 독일내 영지가 있는 코부르크(Coburg)로 돌아갔다. 그는 그나마 아들에게 제위가 이어진 것에 만족하며 예술과 철학, 역사를 공부하고 원예와 여행으로 소일하며 지냈다.

페르디난트는 오래 살았다. 하지만 노후에 못 볼 꼴을 보았다. 아들 보리스 3세가 1943년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를 방문한 후 원인 모를 사고로 죽었고 2차 대전 이후 자신의 왕국이 무너지고 공산화되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그는 1948년 독일 코부르크에서 사망하기 직전에 불가리아에 묻어달라고 했는데, 불가리아 공산정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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