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그후③…오스만 투르크 해체
1차대전 그후③…오스만 투르크 해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6 13: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합국, 패전국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 분할…케말 파샤, 독립 선언

 

오스만 투르크는 발칸 전쟁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1차 대전 초기인 191411월부터 동맹국에 가담했다. 하지만 오스만 투르크의 전선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형성되었다. 연합국은 터키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갈리폴리를 공격함과 동시에 오스만 제국내의 각 민족들을 부추겼다. 아프리카 전선, 코카서스 전선, 중동 전선, 이란 전선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아랍민족,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인 등에게 독립을 약속하고 민족 봉기를 유도하고 지원했다.

오스만 투르크의 1차 대전은 전쟁이자 내전이었다. 집권당이었던 청년 투르크당 지도부는 민족 봉기를 저지하기 위해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 아시리아인을 집단학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전쟁 말기엔 중동, 아프리카의 영토가 연합군과 반란군에 의해 떨어져 나갔다.

 

19189월 총리 탈라트 파샤는 동맹국인 독일과 불가리아를 방문하고 돌아와 더 이상 전쟁의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독일이 곧 항복을 하게 되면 오스만 제국만이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치를수 없었다. 총리는 당 지도부를 불러 어떻게 항복하면 가장 유리하게 국토를 보전할수 있을지를 의논했다. 그들은 연합국 중에서 미국이 가장 우호적일 것이라 판단했다. 미군과는 교전한 적이 없고,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터키 민족의 정체성은 인정해줄 것으로 믿었다. 당 지도부는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지만, 미국은 영국의 조언을 구해 오스만 투르크의 협상 제의를 거부했다.

오스만 지도부는 전쟁 책임자들이 물러나야 협상에서 보다 유리한 것을 얻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에 권력의 세 주역인 탈라트(Talaat)와 엔베르(Enver), 제말(Djemal)은 사퇴하고 아흐메트 이제트(Ahmed Izzet Pasha) 장군을 총리로 내세워 협상을 주도하게 했다.

3인은 곧바로 잠수함을 타고 독일로 도망쳤다. 그후 탈라트는 1921315일 베를린에서 아르메니아인에 의해 암살되었고, 제말은 1922721일 조지아(그루지아)에서 아르메니아아 비밀조직에 의해 암살되었다. 엔베르는 192284일 범투르크주의 운동의 일환으로 중앙아시아 타지키스탄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가 전사했다.

 

1919년 그리스 해군 순양함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고 있다.
1919년 그리스 해군 순양함이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고 있다.

 

19181030, 오스만투르크는 그리스 렘노스 섬의 무드로스 항구에 정박한 영국군함 아가멤논호(HMS Agamemnon)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불가리아에 이어 두 번째 항복이었다. 술탄 마흐메트 5세는 퇴위하고, 마흐메트 6세가 올랐다.

무드로스 협정(Armistice of Mudros)은 영국과 오스만 투르크 사이에서 체결되었다. 조약이 영국에 유리하게 규정되자, 프랑스가 붊만을 터트렸다. 연합국 사이에서 오스만의 영토를 놓고 각축전에 들어갈 조짐을 보였다.

연합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장악하기 위해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에 군대를 파견했다. 1112일 영국군이 먼저 진입했고, 12월초 프랑스군이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19192월에는 이탈리아군이 이스탄불 갈라타에 진입했다.

연합군은 수도 이스탄불을 장악해 군정을 실시하면서 늙은 제국의 영토 분할을 추진했다. 각국은 거대한 영토에 자기 몫을 챙기려고 덤벼들었다. 술탄 메흐메트와 내각은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다. 외국군의 주둔에 터키인과 오스만 투르크 병사들이 저항할 조짐을 보였다.

 

그리스는 차제에 소아시아 반도를 차지하겠다고 별렀다. 그리스는 1917630일 늦게 연합국에 가담해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스는 처음엔 중립을 지키다가 영국이 갈리폴리 전투에서 대패한 후 터키 소아시아 반도의 옛 그리스 땅을 회복시켜준다는 조건을 제시하자 참전요구에 응했다.

그리스 지식인들은 독립 후에 메갈리 이데아(Megali Idea)라는 민족주의 이념에 빠져 있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활동하던 소아시아반도 서해안과 에게해 섬들, 크레타, 키포로스섬을 모두가 그리스 영토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그리스주의자들은 그들을 억눌렀던 오스만투르크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 선봉에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Konstantínos I)가 앞장섰다. 그는 스스로 총사령관에 취임해 군대를 터키로 투입했다. 19195, 서쪽에서는 그리스가, 동쪽에서는 아르메니아가 침공해왔다.

 

1919년 5월 23일, 연합군 점령에 항의하는 이스탄불 시위대.
1919년 5월 23일, 연합군 점령에 항의하는 이스탄불 시위대.

 

하지만 아나톨리아 앙카라를 중심으로 세력을 형성하던 오스만 투르크 군부는 정전협정을 거부하고 저항했다. 투르크 장교단은 독립운동을 벌였다.

술탄은 장교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갈리폴리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스타파 케말(Mustafa Kemal) 장군을 파견했다. 케말은 청년투르크당의 핵심세력이었고, 1차 대전에서 독일과 동맹을 맺는 것을 반대했지만, 어쩔수 없이 엔베르등 지도부의 방침에 따라야 했다.

무스타파 케말은 술탄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1919519, 케말은 아나톨리아 북부 삼순(Samsun)에 도착해 장교들을 모아 놓고 술탄제를 폐지하고 공화국을 선언했다. 외세의 침략에 저항하던 터키 군인들이 모두 케말을 지지했다.

드디어 무스타파 케말이 이끄는 장교단이 독립운동을 일으켰다. 이들이 주장한 독립은 술탄으로부터의 독립, 서방 제국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한 터키 영토 분할
1920년 세브르 조약에 의한 터키 영토 분할

 

이런 위기 속에서 1920년 선거로 구성된 오스만 투르크 의회는 케말파가 압승했다. 의회는 자결권, 이스탄불의 안보, 해협의 개방, 항복조항 폐기를 요구했다. 민족주의 시위대들은 이스탄불의 공공건물을 점령하면서 투쟁을 벌였다. 연합군은 시위대를 체포했다. 의회는 시민 체포에 항의했다. 영국의 앞잡이가 된 술탄 메흐메트 6세는 의회를 해산했다.

의회가 해산된 후 연합국들은 본격적으로 오스만 투르크의 땅 갈라먹기에 나섰다. 연합국은 터키 땅을 분할하는 내용의 세브르 조약(Treaty of Sèvres)을 술탄에게 강요했다. 조약의 내용은 오스만투르크를 완전하게 해체하는 것이었다.

세브르 조약에 의하면, 오스만 투르크는 유럽의 이스탄불과 아시아의 아나톨리아 북부만을 소유한 작은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게 되었고, 시리아와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통치국이 되었다. 에게해의 섬들도 그리스령이 되었다. 동쪽의 아르메니아는 독립했고, 쿠르디스탄은 자치권을 획득했다. 게다가 소아시아의 이즈미르와 그 주변 지역은 5년간 그리스의 통치를 받되 그 후에는 주민 투표를 해서 그리스 혹은 오스만제국 어느 나라에 편입하기로 되었다.

세브르조약을 받아들일 경우 오스만 투르크는 소아시아의 일부를 제외하고 모든 영토를 잃고, 그리스 영토는 소아시아까지 확장되도록 되어 있었다. 1920810일 술탄 메흐메트 6세의 정부는 세브르조약을 비준했다.

 

세브르 조약이 체결되자 그리스는 아나톨리아 반도 서부로 진격해 왔다. 영국의 데이비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총리는 그리스가 소아시아를 공격하면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스군은 19211월에서 4월까지 소아시아 서부 대부분을 점령했다.

터키에는 두 개 정부가 섰다. 이스탄불에는 오스만 투르크 술탄이 명맥만 유지했고, 앙카라엔 케말이 이끄는 터키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무스타파 케말은 임시정부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이스탄불 의회가 해산된후 의원들은 앙카라로 피신해 앙카라 의회와 합쳐 대국민의회(GNA: Grand Nationa Assembly)를 구성했다. 이제 정통성은 앙카라 정부가 쥐게 되었다.

 

케말 파샤의 터키공화국은 그리스를 비롯한 외국군대,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라는 두 개의 적과 싸웠다. 터키 의회는 무스타파 케말을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케말이 지휘한 공화국군은 19218월에 앙카라 근처 사카리아 전투에서 그리스군을 물리쳤다. 뒤이어 이즈미르를 되찾았다.

그리스군이 패배하자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3국은 이스탄불 주변과 보스포러스 해협의 경계를 강화했다. 터키 민족주의자들은 총궐기를 단행해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유럽군을 위협했다. 영국이 선전포고를 했지만, 국내에 반전 여론이 비등해지자 전쟁을 포기하고 협상을 요구했다.

 

1922년 터키공화국 군대가 스미르나를 탈환하고 있다.
1922년 터키공화국 군대가 스미르나를 탈환하고 있다.

 

192210월 영국과 프랑스 등 연합국은 터키 문제 해결을 위해 이해 당사국을 스위스 로잔에 초청했다. 연합국은 앙카라의 공화국 정부는 물론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도 초청했다. 연합군은 터키의 두 개 정부를 활용해 분할통치(divide and rule)를 시도했다.

케말은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를 인정하지 않았다. 술탄 메흐메드 6세가 로잔 회의에 초청받자 케말은 의회에 술탄제 폐지를 요구했다. 하지만 앙카라 의회는 술탄제 폐지와 술탄을 축출하는 것을 망설였다. 의원들 상당수가 입헌군주제를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케말은 무장 군인을 동원해 의회를 위협했다. 결국, 앙카라 의회는 영국군이 이스탄불을 점령한 때로부터 술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술탄제를 폐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그해 1117일 메흐메드 6세는 궁궐을 탈출해 영국 군함을 타고 몰타로 망명했다. 이로써 오스만 투르크는 36대 메흐메트 6세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캐말은 술탄제를 폐지한후 터키인들의 정서를 고려해 메흐메드 6세의 조카 압둘메지드 2세를 칼리프로 계승해 이슬람의 정신적 수장으로 남게 했다.

 

1923년 로잔 조약에 의한 터키공화국 영토
1923년 로잔 조약에 의한 터키공화국 영토

 

술탄을 제거한 후 앙카라 정부는 스위스 로잔에서 열린 회담에 참가했다. 1923724일 체결된 로잔 조약(Treaty of Lausanne)은 세브르 조약을 폐기하고, 터키공화국이 확보한 영토를 인정했다.

로잔 조약은 또 터키에 사는 그리스인, 그리스에 거주하는 터키인을 각각 자국으로 송환하는 내용에도 합의했다. 양국으로 이동한 인구는 모두 160만명으로 추산되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그리스인은 122만명, 터키로 돌아온 이슬람교도는 35~40만명에 달했다. 인구 교환은 강제성을 띠었다. 터키의 그리스인들은 국적이 박탈되고 강제로 추방되었고, 그리스의 터키인도 마찬가지였다. 인도가 독립할 때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이동하던 것과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케말 파사의 앙카라 정부는 그해 1029일 터키공화국 수립을 만방에 선포했다. 이듬해 423일 앙카라 정부는 칼리프제마저 폐지하고,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고위직 간부 150명에 대해 추방령을 내렸다.

캐말은 그후 15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하며 공화국 터키에 많은 개혁을 이뤄냈다. 터키에선 그를 아타튀르크(Atatürk: 터키의 아버지)라는 호칭을 부여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