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대전 그후⑤…영국에 이용당한 아랍인 봉기
1차대전 그후⑤…영국에 이용당한 아랍인 봉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7.28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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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절된 아랍 통합…영국, 아랍국가 약속하고 프랑스와 영토분할

 

아랍 민족주의는 오스만 투르크 치하에서 아랍인의 자율권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1908년 이스탄불에서 청년투르크당이 혁명에 성공한 이후 투르크 민족주의를 아랍인들에게 강요하면서 아랍인들의 반발심이 높아졌다. 그러나 아랍 지역은 부족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오스만이 내려 보낸 총독에 협조하는 부족과 반발하는 부족으로 갈려 있었다.

아랍의 정신적 중심은 무하마드가 이슬람을 창시한 메카다. 메카의 지배자는 부족장 또는 토후라는 개념의 아랍어인 샤리프(Sharif)라 불렀는데, 1차 대전 발발 전후에 메카 샤리프는 후세인 빈 알리(Hussein bin Ali)였다.

후세인은 이스탄불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1908년에 메카의 샤리프가 되었다. 그는 청년투르크당의 강압 통치와 투르크족 우월주의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지도부는 그의 역모 가능성을 의심해 여러 차례 샤리프 교체를 시도했다.

 

 

후세인 빈 알리 /위키피디아
후세인 빈 알리 /위키피디아

 

1914년말에 오스만 투르크는 독일 편에 서서 연합군에 선전포고를 했다. 후세인은 이 기회에 아랍 단일국가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서 영국과 접촉했다. 상대는 카이로 주재 헨리 맥마흔(Henry McMahon) 중령으로, 수에즈운하를 지키기 위해 파견한 영국군 사령관이었다. 맥마흔 경은 오스만 투르크의 배후를 교란시키고, 1차 대전에 참여한 인도 이슬람교도 병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메카를 활용할 필요성이 있었다. 서로의 이해가 맞아 떨어졌다. 두 사람 사이의 서신교환은 19157월부터 19163월까지 10차례나 교환되었다.

두 사람은 서신을 통해 아랍 민족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키면 영국이 지원한다는 조건에 합의했다. 후세인은 시리아 알레포에서 예멘의 아덴까지 하나의 아랍국가(Arab State)를 수립하고 영국이 승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맥마흔은 흔쾌히 후세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 약속을 맥마흔-후세인 서신교환(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이라 부른다.

 

후세인의 아들 파이잘(Faisal bin Hussein)은 아랍민족주의 비밀단체들을 찾아다니며 봉기를 지원해 달라고 요청했다. 19157월 파이잘은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시리아 지도자 알 파타트(al-Fatat), 알 아흐드(Al-'Ahd)에게서 북위 37° 이남 지역 가운데 지중해에서 페르시아 경계, 페르시아만, 아라비아에 이르는 지역의 아랍민족을 규합해 독립국가를 만들자는 제안을 받았다. 시리아 지도자들은 이 조건을 영국이 받아들이면 봉기에 합류하겠다고 밝혔다. 후세인은 그 내용을 서신에 담아 맥마흔에게 보냈고, 맥마흔은 답신에서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구두 약속, 서신 약속을 신뢰한다. 비록 공식 조약은 아니었지만 아랍인들은 영국인의 서신 약속을 믿고 1916610일 오스만 투르크에 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첫 봉기에 가담한 인원은 5,000명에 불과했다.

영국은 아랍 반란군에게 무기를 제공하는 한편 병사들을 지도하고 교육시키기 위해 장교들을 보냈다. 그중 한명이 아라바아의 로렌스로 알려진 토머스 로런스(Thomas Edward Lawrence). 로런스는 영화로도 만들어져 유명세를 탔지만 실제 그의 역할은 과장되었다는 게 역사 기술자들의 설명이다. 실제로 전투에서 큰 도움을 준 영국인은 거투르드 벨(Gertrude Bell)이라는 여성이라고 한다. 그녀는 아랍에 심취해 아랍의 역사와 지형, 문화를 숙지했고, 그의 정보가 전투에 활용되어 승리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아랍 반란군은 후세인의 장남 알리(Ali)와 셋째 아들 파이잘이 이끌었다. 그들은 오스만 투르크의 메카 요새를 공격했지만, 투르크 군의 반격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2만명의 병력을 아라비아 반도 서부에 주둔시켰다. 투르크군은 독일의 우수한 화기를 보유한데다 아라비아 사막의 자발 샤마르(Jabal Shammar) 토후국의 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군의 공격을 쉽게 방어했다. 투르크군은 오히려 메카를 향해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투르크군의 메카 포격은 역효과를 나타냈다. 반군은 투르크가 이슬람의 성지를 파괴했다고 선전하면서 아랍인들의 궐기를 부추겼다. 반군의 초기 패배는 영국군의 무기 지원과 아랍인들의 참여로 서서히 만회되고 공격개시 한달후인 79일에 아랍군은 메카를 탈환했다.

 

아랍군에는 베두인족이 용병으로 참여했다. 베두인족은 아랍인 대의보다는 돈을 요구했다. 그 돈을 영국과 프랑스가 지원했다. 프랑스는 1916년말까지 125만 프랑, 영국은 1918년에 매달 22만 파운드를 베두인 용병 자금으롷 지원했다는 자료가 있다.

메카 탈환 후 아랍 반군은 게릴라전을 펼쳐 오스만 투르크가 다마스쿠스에서 메디나까지 놓은 헤자즈 철도(Hejaz railway)를 공격했다. 수시로 철도 운행이 중단되면서 투르크 군은 보급이 끊겨 서서히 아라비아 반도에서 철수하게 된다.

반군은 19177월 아라비아 해의 도시 아카바(Aqaba)를 점령하고 북상했다. 아랍 반군이 승기를 잡아나가자 반군에 참여하는 수도 3만명으로 늘어났다.

 

1917년 5월 아카바 만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한 아랍 반군 /위키피디아
1917년 5월 아카바 만을 공격하기 위해 집결한 아랍 반군 /위키피디아

 

하지만 영국은 아랍인들과의 약속을 배신했다.

191613일 영국과 프랑스는 비밀리에 협상을 벌여 오스만 투르크가 지배하던 아랍 영토를 나눠 먹기로 했다. 한편에선 아랍 민족주의를 부추기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권을 나누는 강대국의 이중 전략이자, 속임수였다. 협상의 주역은 영국의 외교관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와 프랑스 외교관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çois Georges-Picot)였다. 이때 체결된 비밀협정이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이라 한다.

영국과 프랑스의 두 대표는 오스만투르크가 패망한 후 중동지역을 둘로 나눠 영국은 지중해와 요르단강 사이 해안 지역 일부와 지금의 이라크, 요르단의 B구역을 가져가고, 프랑스는 이라크 북부 일부와 시리아, 레바논의 A구역을 차지하기로 합의했다. 두 사람의 합의는 그해 5월 양국 정부에 의해 공인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수니파와 시아파의 종파 갈등이나 부족성이 강한 아랍 무슬림의 역사·문화·종교적 요인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저 영국과 프랑스는 자를 대고 일직선으로 국경을 그었다. 당사자인 아랍 세력은 배제됐다. 수니파가 살던 알레포는 시아파가 지배하는 시리아와 묶였고, 수니파의 도시 모술은 시아파 도시 바그다드와 한 나라가 됐다. 여기엔 1910년 중반 발견된 이라크와 쿠웨이트의 석유를 차지하려는 영국의 노림수가 크게 작용했다.

이 협정 내용은 비밀에 붙여졌지만, 영국은 연합군의 일원인 러시아에게도 알려줬다. 하지만 19171123일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블라디미르 레닌은 제국주의 야욕을 폭로하기 위해 프라우다와 이스베스티아지에 비밀협정 내용을 공개했다. 영국을 철석같이 믿었던 아랍인의 배신감은 컸다.

 

사이크스-피코 분할합의안 /위키피디아
사이크스-피코 분할합의안 /위키피디아

 

영국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대인들게도 손을 내밀었다. 1917112일 영국의 아서 밸푸어(Arthur Balfour) 외무장관이 런던 피카딜리에 있는 리오넬 월터 로스차일드(Lionel Walter Rothschild) 남작의 집에 들러 편지를 손수 건넸다. 로스차일드 경은 이 편지를 영국 시오니스트 단체에 전달해 공개했다. 이 편지가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으로 불리는 것으로, 유대인 국가, 즉 지금의 이스라엘을 건국하는 단초가 된다.

편지 내용 가운데 논란이 되었던 대목은 민족적 고향’(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이다. 밸푸어는 유대인 국가(state)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고향’(home)이라고 명시했다. 아랍인들의 반발을 의식한 것이다. 하지만 전세계 유대인들은 이 말을 유대국가로 알아 들었다.

영국이 유대 금융가에게 구애한 것은 당시 유럽 금융계를 좌지우지하던 로스차일드 가문에게서 전쟁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였다는 게 정설이다. 전쟁 3년째가 되어가던 1917년에 영국은 전비가 바닥이 났다. 이런 상황에 영국 정부는 팔레스타인에 유대인 정착지를 약속하면서 유태 금융인들에게 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건설한 헤자즈 철도 /위키피디아
오스만 투르크가 건설한 헤자즈 철도 /위키피디아

 

1918101. 아랍 독립군은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Damascus)에 입성했다. 그날 아침 9시 영국군의 지휘를 받는 호주 제10 경기병 여단이 다마스쿠스에 진입해 터키 주둔군의 항복을 받아냈고, 아랍군이 그 뒤를 따랐다.

아랍인들은 후세인의 아들 파이잘을 아랍국가(Arab State)의 국왕으로 옹립하고 다마스쿠스를 수도로 삼았다. 파이잘이 아랍 민족주의를 토대로 세운 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이스라엘 포함), 시나이 반도를 합친 대시리아를 의미했다.

곧이어 1030일 오스만투르크는 연합군에 항복했다. 공동의 적이었던 오스만 투르크가 패배하자, 이젠 영국·프랑스의 제국주의와 아랍 민족주의가 대립했다.

1920년 프랑스군이 레바논 산악지역을 침공했다. 이유는 영국과의 비밀 협정에 근거한데다 900년전 십자군 전쟁 때 프랑스 기사단이 점령한 레바논과 시리아를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프랑스는 다마스쿠스를 점령해 위임통치를 시작하면서 파이잘 국왕을 내좇아 버렸다.

파이잘은 런던으로 찾아가 호소했다. 영국은 그를 자기네 점령지역인 이라크의 위임통치 수반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그는 곧 위임통치 수반직을 사퇴하고 국민투표를 거쳐 1921년 이라크 국왕에 오른다. 파이잘은 영국군 점령하에서 반쪽 국왕으로 연명하게 된다.

()시리아는 프랑스령 시리아와 영국령 이라크로 분단된다. 영국은 또 아랍 민족에게 주기로 약속했던 팔레스타인 땅도 전쟁 자금을 제공한 유태인에게 내주었다.

 

1918년 영국이 후세인에게 제시한 아랍국가의 영토 /위키피디아
1918년 영국이 후세인에게 제시한 아랍국가의 영토 /위키피디아

 

아랍 봉기의 주도자 후세인은 아들들을 전쟁터에 내보내고 191610월에 스스로 아랍 국왕(king)에 올랐고, 메카 주변의 나라를 헤자즈 왕국(Kingdom of Hejaz)이라 불렀다. 하지만 아라비아 반도의 동부에 있던 네지드 토후국(Emirate of Nejd)의 이븐 사우드도 술탄(sultan)이라 칭하며 오스만 제국과 동등한 지위임을 선포했다. 아라비아 반도의 두 나라 사이에 주도권 분쟁이 격화되어 갔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영국은 밸포어 선언과 사이크스-피코 협정을 인정하라고 후세인에게 압박했다. 후세인은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 비준을 거부하고 오스만투르크와 체결한 세브르 조약 비준도 서명하지 않았다. 그러자 영국은 메카에 대한 원조금을 줄여 나갔다. 전쟁 중에는 매달 20만 파운드씩 주던 원조금을 19195월에 10만 파운드로 줄이고, 10월에 75,000 파운드, 그후 25,000파운드로 축소하더니 1920년 초에는 그나마 중단했다.

1921년 영국은 3만 달러를 줄 터이니 두 협정에 서명하라고 압박했다. 하지만 후세인은 끝까지 서명하지 않았다. 후세인은 맥마흔에게 약속을 지킬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시리아에 외국군(프랑스군)이 주둔하는 것과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세우는 것을 반대했다.

 

터키에서 케말 파샤가 주도하는 독립운동이 성공해 192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을 폐지하고 1924년 술탄의 칼리프 지위도 박탈했다. 칼리프는 이슬람의 최고 종교 지도자 자리다. 이에 후세인은 스스로 칼리프라고 선언했다. 후세인의 칼리프 선언에 아랍권이 분열했다. 특히 이웃 네지드(Nejd)의 사우디 가문이 강하게 반발했다.

네지드 술탄국은 메카를 쳐들어갔다. 결과는 뻔했다. 헤자즈는 오스만 투르크와의 전쟁에 국력을 소진하고 주력군이 중동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네지드는 메카, 리야드, 제다 등을 순식간에 점령했고, 후세인은 급히 맏아들 알리를 헤자즈 왕으로 옹립하고 트랜스요르단(지금의 요르단)으로 피신했다. 네지드의 술탄 이븐 사우드는 1926년 헤자즈를 정복하고 헤자즈의 국왕을 겸했다. 1932년 이븐 사우드는 네지드와 헤자즈를 통합해 사우디 아라비아 왕국을 선포했다. 이 가문이 지금의 사우디아라비아 왕가를 이어가고 있다.

 

한편 후세인이 피신한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은 둘째 아들 압둘라(Abdullah)가 에미르(Emir)였다. 후세인은 자신이 국왕이라 생각하고 트랜스요르단의 정치를 좌지우지하려 했다. 그러자 아들 압둘라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을 철회하고 후세인을 아카바로 유배를 보냈다.

후세인은 마지막으로 넷째 아들 자이드(Zaid)가 사는 영국령 키프로스로 건너가 여생을 보내다가 1930년 신체에 마비현상이 생겼다. 이에 둘째 아들 압둘라가 아버지를 트랜스요르단으로 모셔왔으나 후세인은 이듬해인 19316월에 요르단 암만에서 사망했다. 70대 후반의 나이였다. 그의 시신은 예루살렘의 모스크에 묻혔다.

파이잘의 후손은 이라크 왕가를 이어갔으나 1958년 군사쿠데타에 의해 단절되었고, 압둘라의 후손들은 아직도 요르단 왕가를 계승하고 있다.

 


<참고자료>

wikipedia: Arab Revolt

wikipedia: Middle Eastern theatre of World War I

wikipedia: Partition of the Ottoman Empire

wikipedia: Middle East

wikipedia: History of the Middle East

wikipedia: Hussein bin Ali, Sharif of Mec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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