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①…실패한 공산혁명
바이마르 공화국①…실패한 공산혁명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01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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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르트 정부, 군부와 손잡고 공산혁명 진압…스파르타쿠스 봉기 실패

 

191811월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던 시기의 사회적 상황은 1년전 러시아 혁명의 상황과 닮아 있었다. 전쟁에 패배했고 황제와 지방 군주들은 물러나 지배계급에 공백이 생겼고, 민중들은 전쟁의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1년 사이에 독일은 러시아의 코스를 답습했다. 군인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역해 반란을 일으키고 좌파가 준동했다. 혁명세력 사이에 균열이 일어나 온건파와 혁명파가 대립했다. 독일에서도 똑같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났다. 독일은 러시아보다 수준 높은 공업화를 이룩해 프롤레타리아트 계층이 두터웠기 때문에 칼 마르크스의 이론에 따르면 공산혁명의 조건이 무르익어 있었다.

하지만 독일의 공산혁명은 실패했다. 중도좌파인 사회민주당이 구질서의 대변자인 군부와 손잡고 공산 혁명을 진압하고 의회민주주의를 수립하는데 성공했다.

 

1919년 1월 스파라타쿠스 봉기 때의 바리케이드 /위키피디아
1919년 1월 스파라타쿠스 봉기 때의 바리케이드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전인 19121월 독일 제국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Social Democratic Party)397석 가운데 110(34.8%)을 차지해 제1당이 되었다. 하지만 사민당은 전쟁을 막지 못한 원죄가 있다.

사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는 러시아가 독일을 공격할 경우 조국을 수호해야 한다며 전쟁 지지를 선언했고, 사회당원 다수가 제국의 전쟁채권 발행에 찬성했다. 이에 비해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카를 리프크네히트(Karl Liebknecht), 후고 하제(Hugo Haase) 등 사민당내 소수 좌파는 전쟁을 반대한 이유로 감옥에 갇히거나 군대에 끌려갔다.

전쟁이 장기회하면서 사민당 내에는 국민들의 염전 분위기에 편승해 반전 요구가 높아졌다. 19172월 러시아 혁멍 직후에 3만명이 참여하는 총파업 투쟁이 전개되었고 파업 지도부가 반전운동의 리더가 되었다.

전쟁 막바지인 1918년말 에베르트가 이끄는 사민당은 반전론자들을 당에서 축축했고, 그들은 후고 하세를 중심으로 독립사회민주당(Independent Social Democratic Party)을 창당했다. 독립사민당은 평화주의와 볼셰비키적 혁명론을 주장했다.

 

혁명적 분위기는 어느날 갑자기 다가왔다. 1918114일 킬(Kiel) 항구의 해군병사들이 출항명령을 거부하며 폭동을 일으켜 러시아의 소비에트를 본따 사병 위원회를 조직했다. 킬 반란 이후 혁명운동은 하노버, 브룬스위크, 프랑크푸르트, 뮌헨 등지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특히 프로이센에 이어 두 번째로 큰 바이에른 왕국의 수도 뮌헨에서는 최초로 소비에트 정권이 수립되었다.

117, 그날은 맥주 축제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날이자, 러시아 혁명 1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옥토버페스트가 열리는 광장에 6만여명 정도의 인파가 몰렸다. 독립사민당 소속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가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종전과 8시간 근로시간, 실업수당 등을 요구하고, 바이에른 왕국의 왕 루트비히 3세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퇴위를 주장했다. 그의 연설에 감명 받은 군중들은 병사들의 막사로 몰려갔고 대부분의 군인들이 혁명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날 밤, 루트비히 3세는 추방되었다. 다음 날인 118, 아이스너는 700년 이상 이어진 비텔스바흐 왕가를 전복시키고 바이에른 왕국을 바이에른 자유주로 선포하고, 자신은 총리가 되어 바이에른주의 권력을 장악했다.

 

바이에른 자유주 /위키피디아
바이에른 자유주 /위키피디아

 

사민당과 독립사민당원들은 공장을 접수해 노동자 평의회를 구성했다. 그들은 군대를 접수해 지휘관들을 무력화시키고 사병 평의회를 조직했다.

119일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전국 21명의 왕과 대공 등 21명의 군주가 줄줄이 사임했다. 이제 봉건질서 위에 군림하던 귀족들은 완전히 제거되었다. 제국의 마지막 총리였던 바덴공은 사민당의 에베르트에게 총리직을 맡으라고 권했다. 에베르트는 수락했다.

에베르트의 총리직 승계는 황제로부터 위임받은 바덴 총리의 제의로 이뤄진 것이기 때문에 합법적이었고, 정통성이 있는 절차였다. 극심한 혼란기에도 적법성을 갖는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독립사민당의 혁명파들은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선포를 준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감옥에 갇혀 있던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막 석방되었다. 이런 움직임에 선수를 친 사람이 사민당 대표였던 필리프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었다. 그는 독립사민당에게 주도권을 뺏기지 않기 위해 제국의회 창문에서 군중들을 향해 공화국을 선포했다.

하지만 그날 저녁 혁명파 100명은 제국의회를 점령하고 인민대표자회의를 구성했다. 온건파 사민당 혁명파 사민당의 한판 대결이 예고되었다.

 

사태의 반전은 1110일 저녁에 있었다. 총리실 비밀회선으로 전화 한통이 걸려왔다. 벨기에 스파의 군사령부로부터 온 전화였다. 총리가 된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은 에베르트는 비밀회선이 있는줄도 몰랐다고 한다.

전화는 빌헬름 그뢰너(Wilhelm Groener) 1참모차장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그뢰너는 힌덴부르크 참모총장과 루덴도르프 참모차장의 실각으로 실질적으로 군부의 총사령관이었다. 두 사람의 정확한 통화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역사 기술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그뢰너는 독일의 볼셰비키 혁명을 막아야 하며, 이를 위해 군부가 에베르트 정부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으며, 이에 에베르트는 군부의 위계질서를 보장했다는 것이다.

에베르트-그뢰너 밀약은 패전국 독일의 공산혁명을 저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에베르트는 구질서를 척결하지 않고 혁명세력을 진압하는데 그들을 활용한 것이다.

다음날인 11일 독일은 프랑스 파리에서 연합국이 제시한 강화조건을 수용해 전쟁을 끝냈다.

 

에베르트는 군부의 지지를 얻은후 자신감을 가졌다. 그는 우선 강경파 독립사민당을 포용하는 전략을 취했다. 사민당 3, 독립사민당 3명의 동수로 6인 대표자회의를 구성하기로 했다. 사민당 대표는 에베르트, 샤이데만, 오토 란츠베르크였고, 독립사민당측은 후고 하제, 빌헬름 디트만, 에밀 바르트였다.

6인 위원회는 사실상 사민당에 의해 주도되었다. 사민당 3인은 정치경륜이 많은 노련한 전략가들인데 비해 독립사민당 3인은 경험이 없는데다 통일된 의견을 갖지 못했다.

에베르트는 독립사민당을 끌어 안고 전국적인 시위를 진정시켰다. 1112일 에베르트 정부는 민주강령을 발표했다. 봉건적 신분질서를 해체하고, 검열과 체포로부터의 보호, 여성을 포함한 20세 이상의 참정권 부여, 모든 정치인 사면, 집회·결사·언론의 자유 보장 등을 약속했다. 무엇보다도 노동자들이 수십년간 주장해온 하루 8시간 노동제를 선포했다.

에베르트의 민주화 원칙 발표는 노동자들의 합의도 이끌어내 파업 중단 약속을 얻어냈고, 노사 임금협상과 부당노동행위에 대한 감시기구로 중재위원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하지만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중심으로 하는 스파르타쿠스 연맹(Spartakusbund)은 독립사회당의 온건화에 불만을 품고 그해 12월 독일공산당(Communist Party)을 창당했다.

라이프찌히, 함부르크, 브레멘, 켐니츠, 고타 등의 도시에선 노동자-병사 평의회가 시 행정부를 장악했고, 브른스위크, 뒤셀도르프, 뮐하임, 쯔비카우 등에선 황제파들이 체포되고, 함부르크와 브레멘에서는 적군(Red Guards)들이 조직되었다.

 

이 무렵, 전선에서 돌아온 예비역 군인들이 자유군단(Freikorps)이라는 민병대를 조직했다. 참호 속에서 몇 년을 버티며 살아남은 그들은 다시 시민의 삶으로 돌아가는 게 두려웠다. 이들은 황제에게 배신한 킬의 해군 병사들과도 달리 황제에 충성하던 군인들이었다. 장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자유군단은 자발적인 지원군을 받아 조직규모를 키우며 우파의 전위대를 자처했다.

 

1216일 좌파들은 전국의 평의회(소비에트) 대표들을 베를린으로 불러 제1회 노동자-병사 총회를 소집했다. 에베르트 정부는 이 총회를 무산시키기 위해 그뢰너 참모차장에게 군의 동원을 요청했다. 1215일 에베르트와 그뢰너의 지시를 받은 1개 연대가 회의장을 향해 총격을 가했다. 회의를 준비하던 적군은 비무장 상태에서 16명이 사살되었다.

공산당의 로자 룩셈부르크는 군의 해산을 종용했지만 에베르트는 그뢰너에게 10개 사단의 투입을 요청했다. 하지만 독일군은 더 이상 전의를 상실한 군대였다. 그들은 고향에 돌아가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함께 보낼 생각뿐이었다. 군대는 베를린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해산되었다. 그들 중 고향에 돌아가야 아무런 소용이 없는 군인들은 자유군단에 지원했다.

 

1918년 12월 베를린 시청을 장악한 반란군 /위키피디아
1918년 12월 베를린 시청을 장악한 반란군 /위키피디아

 

1223일 베를린 방어를 책임지던 인민해병사단 소속 병사들이 총리실을 점거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에베르트와 사민당 지도부는 이 사건이 공산당의 지시로 이뤄졌다고 판단하고 그뢰너에게 군의 투입을 요청했다.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에베르트의 지시를 받은 군대가 투입되었지만 오히려 반란군의 공세에 사상자만 내고 퇴각했다. 정부군은 곧바로 해산했고, 일부는 자유군단에 편입되었다. 총리실을 점거했던 군인들도 더 이상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고 사단본부로 돌아갔다.

 

이 사태는 공산당에게 헛된 꿈을 키우게 만들었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선거를 통해 공산정권을 수립할수 없다고 판단하고 혁명적 봉기를 시도했다.

해를 넘겨 191914, 에베르트 정부는 해병의 반란을 저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독립사민당 소속 베를린 경찰서장을 해임했다. 이를 기회로 공산당, 독립사회당은 다음날 항의시위를 준비했다.

15일 의외로 시위대에 수십만명의 군중이 참여했다. 시위대는 베를린 시가지와 역사, 중도적 언론사 사옥을 점거했다. 주동자들은 53명의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했다. 공산당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에베르트 정부의 전복과 무장투쟁을 호소했다. 러시아에서 블리디미르 레닌이 페테르스부르크에 도착해서 곧바로 케렌스키 정부 전복과 혁명을 주장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 베를린에서 벌어진 것이다.

16일 혁명위원회는 더 큰 규모의 시위를 벌이며 의회 광장을 메웠다. 일부는 무기를 들고 에베르트 정부 전복을 주장했다.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혁명군 /위키피디아
1919년 1월 스파르타쿠스 혁명군 /위키피디아

 

에베르트 총리는 군대를 투입했다. 독립사민당이 중재에 나섰으나 실패했다. 19일 정부군의 진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독일군은 예전의 용맹성이 떨어졌다. 그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특히 자국민을 진압하는데 미온적이었다.

결국 12일 자유군단이 투입되었다. 자유군단의 사령관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마음껏 쏴라.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다. 자유군단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156명의 사망자를 낸채 시위는 진입되었다. ‘스파르나쿠스의 봉기’(Spartacist uprising)로 불리는 이 무장폭동은 독일 역사상 첫 공산혁명으로 기록된다.

자유군단의 불법적 행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115일 베를린의 한 주택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칼 리프크네히트가 함께 있다가 자유군단에 체포되었다. 공산당을 대표하는 두 지도자는 자유군단 본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버려졌다. 자유군단이라는 사설조직에 의한 린치는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어쩌면 에베르트 정부가 원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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