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②…굴욕적인 평화조건
바이마르 공화국②…굴욕적인 평화조건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03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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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브레멘 소비에트 진압…가혹한 베르사이유 조약 강요

 

좌파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운동, 우파 자유군단의 조직화라는 극심한 혼란속에서 패전국 독일은 1919119일 제헌의회를 구성할 총선을 실시했다. 20세 이상 성인 남녀가 투표하는 최초의 선거였다. 선거 결과에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Friedrich Ebert) 임시정부를 지지하는 사회민주당, 중앙당, 민주당의 연합이 76% 이상을 차지하고, 독립사회민주당과 공산당 등 극좌계열은 참패했다. 에베르트는 압도적인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총리에는 사민당 소속 필리프 샤이데만(Philipp Scheidemann)이 선출되었다.

사민당은 독립사민당과 결별하고 헌법제정에 착수했다. 베를린은 스파르타쿠스 봉기로 테러의 위협에 높았기 때문에 제헌의회는 중부 바이마르(Weimar)에서 헌법제정 작업에 착수했다.

 

제헌의회가 열리는 기간에도 독일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바이에른 주에선 독립사민당 소속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총리가 극우민족주의자인 안톤 마르크팔라이 백작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총선에서 다수파를 차지한 사민당의 요하네스 호프만(Johannes Hoffmann) 내각이 들어섰다.

191946일에 독립사민당과 공산주의자, 무정부주의자들 연합해 소비에트 정부를 출범시켰다. 주동자는 극작가 출신의 에른스트 톨러(Ernst Toller)였는데, 카페 회원들이 주도한 혁명이라 해서 커피하우스 무정부주의 정권이라고도 불렀다. 이 정부는 연약해서 며칠을 가지 못하고 13일에 러시아 혁명에도 참여한 공산주의자 오이겐 레비네(Eugen Leviné, 1883-1919)가 정권을 잡았다.

공산주의자들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지를 받았다. 그들은 붉은군대를 창설하고 공화국 정부의 지폐 발행을 중단하고 식량 배급을 통제했다. 바이에른 공산정권은 레닌의 지령에 따라 귀족과 상류층을 체포하고 그 중 8명을 간첩 죄목을 씌워 처형했다.

바이에른 주에는 두 개의 정권이 대치했다. 호프만의 사민당 정권은 밤베르크에 위치했고, 레비네의 공산당 정권은 뮌헨에 자리를 틀었다. 양측 군대는 418일 다하우에서 붙었지만 소비에트 진영이 승리했다. 소비에트군은 3만명으로 호프만의 병력 8,000명보다 숫적으로 우세했다.

여기에 베를린의 에베르트 정부는 호프만 정부를 지지하며 1차 대전에 참여한 퇴역병사들로 구성된 우익 자유군단(Freikorps)을 파견했다. 자유군단은 51일 뮌헨을 돌파하고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우익 군사조직은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로 보이는 1,000~1,200명을 사살하고 우두머리 레비나를 체포해 총살했다. 56일 바이에른 소비에트 정부는 공식적으로 해체되고 호프만의 사회민주당 정부가 들어섰다. 하지만 실질적 권력은 우파진영이 장악했다. 이런 바이에른의 분위기는 극우 나치주의자들이 준동하는 토양을 형성했다.

앞서 독일 북부 브레멘(Bremen)에서도 19191월에 25일간 소비에트 공화국이 들어섰지만 에베르트 정부가 보낸 자유군단에 의해 진압되었다.

 

1차 대전 전의 독일 포젠과 실레지엔 지역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전의 독일 포젠과 실레지엔 지역 /위키피디아

 

또 독일 영토내 포젠(Posen) 지역에 살고 있는 폴란드인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던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Ignacy Paderewski)의 연설로 시작된 폴란드인 독립운동 세력은 1차 대전 참가자들로 군대를 조직해 포젠 일대를 거의 장악했다. 때마침 파리에서 열리는 강회회의에서 연합국들은 폴란드인들의 궐기를 주목학도 포젠 지역을 독일에서 떼내 폴란드 영토로 넘겨줄 것을 의논하게 된다.

포젠 봉기에 힘입어 실레지아에서도 폴란드인들에 의해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다.

 

1차 대전 전의 독일 포젠과 실레지엔 지역 /위키피디아
1차 대전 전의 독일 포젠과 실레지엔 지역 /위키피디아

 

국내혼란만으로도 지칠 지경인데 이번에는 연합국들이 무거운 압력으로 에베르트 정부를 짓눌렀다.

연합국들의 강화회의는 1919118일부터 파리에서 처음 열렸다. 전승국 27개국 대표들이 참가했는데, 주로 영국, 프랑스, 미국, 이탈리아등 주요 4개국에 의해 주도되었다. 러시아는 내전중이어서 회의에 참가하지 않았다. 독일 대표는 처음부터 배제되었다.

연합국중 프랑스가 가장 강경했다. 서부전선이 프랑스 국경에서 펼쳐지는 바람에 프랑스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30명이 죽고 10~30세의 성년남성인구의 25%가 사라졌다. 프랑스 장군들은 독일을 해체해 군소국가로 만들 것을 주장했다. 프랑스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Georges Clemenceau)미국과 영국은 전쟁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그렇지 않았다.”며 라인강 서부의 라인란트(Rhineland)를 분리해 독일을 왜소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데이비드 조지(David Lloyd George) 총리는 생각이 달랐다. 영국 총리는 언젠가 유럽이 화평을 유지해야 하고, 프랑스가 대륙에서 강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당시 에베르트 정부는 독일이 항복한데다 옛 제국주의를 붕괴시키고 민주적 바이마르 정권을 창출했으므로 연합국의 평화조건이 가혹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전쟁 전의 영토로 돌아가고 1871년 독일이 프랑스에게 물렸던 배상금 정도를 지불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57일 파리 연합국 회의가 독일에 제시한 조건은 가혹했다. 알사스-로렌을 떼주는 것도 모자라 포젠을 폴란드에게 돌려주고 동프로이센을 분리해 그 사이에 회랑지대(Corridor)를 형성할 것을 요구했다. 이 조건대로라면 독일 국토의 13%가 떨어져 나간다. 군대도 항공기, 탱크, 화학무기 등을 폐기하고 10만명 정도로 축소해 치안에만 주력하게 했다. 전쟁 배상금은 가히 놀라웠다. 1,320만 마르크의 금을 배상금으로 지급하라고 했다. 무엇보다 독일 우파들을 자극한 조건은 독일을 전정범죄국으로 규정한 사실이다. 전쟁은 누가 먼저 선전포고를 했느냐보다 서로 적대감이 높아진 상태에서 연합국과 동맹국이 연쇄적으로 개입하며 일어난 것이다. 세르비아 정부의 사주를 받은 테러리스트가 먼저 오스트리아 황태자를 저격했고, 러시아가 먼저 총동원령을 내렸다. 적어도 형식 논리는 그러했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분리된 독일 영토 /위키피디아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분리된 독일 영토 /위키피디아

 

에베르트 정부는 물론 우익, 좌익 모두 연합국의 평화조건을 거부했다. 오죽했으면 당시 파리 협상에 참여한 영국의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고대 로마제국이 카르타고에 요구한 항복조건에 비유하며 과도하고 지나친 요구라고 비판했다. 영국 총리도 너무나 가혹한 응징 때문에 훗날 독일의 복수가 있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의 페르디낭 포슈(Ferdinand Foch) 장군은 평화조건이 독일에 너무 관대하다고 비판했다. 협상에 참여한 포슈는 승전국의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해 독일이 다시 프랑스를 위협하지 않도록 약소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연합국의 합의에 대해 또다른 항복이자 반역이라면서 이는 평화가 아니다. 20년간의 정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영국 총리와 프랑스 장군의 예언은 맞았다. 14년후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럽의 평화는 깨졌다.

 

라인란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라인란트의 위치 /위키피디아

 

전승국들은 628일에 빌헬름 1세가 1871년에 프랑스를 굴복시키고 독일 황제로 취임한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프랑스와 독일의 영광이 교차하는 순간이었다. 베르사이유 조약(Treaty of Versailles)은 전승국들 사이에서 합의된 결과일뿐, 패전국에겐 명령에 지나지 않았다.

에베르트 정부는 처음엔 조약을 거부했지만 조약에서 참여하지 않으면 전쟁을 재개할 것이란 위협에 하는수 없이 대표단을 보내 서명하게 했다.

 

1919년 6월 28일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베르사이유궁에 모인 독일 대표단 /위키피디아
1919년 6월 28일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베르사이유궁에 모인 독일 대표단 /위키피디아

 

독일 우익들은 강한 굴욕감을 느꼈다. 그들은 전승국 요구를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인 에베르트 정부와 협상파들을 배신자라고 공격했다. 전선에서 등뒤에 칼을 꽂은(stab-in-the-back) 사람들이라는 저주와 비난이 사민당 지도부를 향했다. 극우파의 세균이 배양될 토양이 형성된 것이다. 이제 에베르트 정부의 위협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에서 시작되었다.

 

한편 바이마르의 제헌의회는 공화국 헌법을 마무리하고 731일 의결했다. 811일 에베르트 대통령이 서명함으로써 바이마르 헌법이 새 공화국의 헌법으로 제정되었다. 바이마르 헌법은 종래 제정시대 헌법과는 달리 민주주의 원리의 바탕으로 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했다. 아울러 대통령제를 두어 이원집정부제를 실현했다. 바이마르 헌법은 당시 유럽의 어느 헌법보다 민주주의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에베르트와 사민당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지지는 영원하지 않았다. 이듬해인 192066일 총선에서 집권 연합정당이 43석의 의석을 얻는데 그쳤다. 그후 14년동안 바이마르 정부는 16차례나 내각이 바뀌었다. 8개월마다 정권이 교체된 것이다. 이 와중에 극우파들이 서서히 의석들을 차지해 나갔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당도 바이마르 헌법이 만들어 놓은 공간을 활용해 세력을 키워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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