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③…1920년 좌와 우의 협공
바이마르 공화국③…1920년 좌와 우의 협공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04 13:4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익 쿠데타에 총파업으로 승부…루르 폭동에 우익 군대 투입

 

전쟁터에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서 있던 독일 군인들이 귀국했다. 돌아와 보니, 일자리가 없었다. 부인은 군수공장에 나가 돈을 더 많이 벌었고, 돌아온 남편에 시큰둥해 했다. 아무도 대우해주지 않았다. 보상은커녕 전범이란 낙인이 찍혔다. 이 모든 게 등 뒤에서 칼을 찌른 사회민주당과 유태인 때문이란 소문이 돌았다. 공산주의 혁명을 막고 자유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으로 예비역들의 준군사조직이 생겼다. 다수의 전역자들이 그 조직에 가입했다. 자유군단(Freikorps)이란 조직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들은 정부군 또는 정규균이 아니었다. 일종의 의용군 부대였다.

 

19196월 베르사이유 조약이 체결되고 1920110일부로 발효되었다. 조약에 의해 독일군 병력수는 10만명으로 제한되었다. 당시 바이마르 정부의 정규군 숫자는 35만명, 비정규군인 자유군단의 수는 25만명에 이르렀다.

연합국들은 독일 정부에 1920331일을 시한으로 10만명 이상의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했다. 229일 국방장관 구스타프 노스케(Gustav Noske)는 자유군단에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에 헤르만 에르하르트(Hermann Ehrhardt)가 이끄는 자유군단 소속 여단이 해산 명령을 거부했다. 이 여단은 베를린 근교에 주둔하며 6,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에르하르트는 31일 여단을 사열시키며 정규군 소속 장군 발터 폰 뤼트비츠(Walther von Lüttwitz)를 초청했다. 뤼트비츠 장군은 훌륭한 부대의 해체를 바라지 않는다고 부추겼다. 뤼트비츠는 우익 지도자들과 만나 향후 방향을 의논했다.

수도 인근의 부대가 반기를 들 조짐을 보이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통령이 뤼트비츠를 만나자고 했다. 310일 뤼트비츠는 대통령 집무실에서 에베르트와 노스케를 만났다. 그 자리에서 뤼트비츠는 우익 정당의 요구를 제시했다. 그는 의회 해산, 총선 실시, 외교장관과 재무장관의 교체를 주장하면서 자신을 참모창장에 기용할 것을 요구했다. 에베르트 대통령은 일언지하에 뤼트비츠의 제안을 거절했다.

 

카프 반란에 등장한 독일 제국기 /위키피디아
카프 반란에 등장한 독일 제국기 /위키피디아

 

다음날인 11일 뤼트비츠는 에르하르트에게 출동준비 여부를 묻자, 에르하르트는 13일 새벽에 베를린을 접수하자고 했다. 그들은 공산당 지도자 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를 살해한 자유군단 장교들을 영입했다. 13일 아침, 뤼트비츠는 에르하르트 여단을 이끌고 전격적으로 베를린으로 진격했다.

국방장관 노스케는 정부군 사령관 제크트(Hans von Seeckt)에게 수도 방어를 지시했지만, 제크트는 쿠데타군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명령했다. 아군끼리는 총을 쏘면 안 된다는 이유였다. 뤼트비츠와 에르하르트는 아무런 저항 없이 베를린을 접수했다.

쿠데타 세력들은 독일을 우파 전체주의 국가로 만들어 제국을 통일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우피 민족주의자로 일려진 독일민족인민당 소속 볼프강 카프(Wolfgang Kapp)를 총리로 임명했다. 카프는 한때 동프로이센 농업신용조합 대표를 역임했던 인물인데, 쿠데타군의 얼굴마담으로 등장했을 뿐이다.

 

쿠데타군이 밀려 오기 직전에 에베르트 대통령과 구스타프 바어우(Gustav Bauer) 총리를 비롯해 내각은 베를린을 떠났다. 정부 수뇌부는 드레스덴으로 피신했지만 그곳에도 쿠데타군이 그들을 체포하라는 지시가 내려와 있었다. 하는수 없이 남부 도시 슈투트가르트로 가서 정부를 수립했다.

독일은 둘로 갈라졌다. 북부와 동부 군대는 쿠데타군을 지지했고, 남부 군대는 에베르트 정부를 지지했다.

슈투트가르트의 사회민주당 정부는 군대로 쿠데타군을 이길수 없었다. 사민당 정부는 전국 공장에 총파업을 지시했다. 사민당 소속 노조는 물론 독립사회민주당, 공산당 소속 노조도 슈투트가르트의 지시를 받들어 총파업에 나섰다. 독일 역사상 최대의 파업이 일어났고, 참가자만 1,200만에 이르렀다.

 

1929년 3월 13일 베를린에 진입한 우익 쿠데타군 /위키피디아
1920년 3월 13일 베를린에 진입한 우익 쿠데타군 /위키피디아

 

공무원도 파업에 참가해 온나라가 마비되었다. 베를린의 수도, 기름, 전기 공급이 중단되었고, 쿠데타군의 명령과 지시가 전달되지 않았다. 쿠데타군은 파업 참가자의 직장복귀를 명령하고 전기 공급을 약속했지만 소용 없었다.

이때 베를린에 남아 있던 독립사민당, 중앙당, 독일인민당, 독일민족인민당의 4개 정당 지도자들이 모여 두 정부의 타협을 모색했다. 중립적인 4개 정당은 조기총선 실시, 내각 교체, 쿠데타 지도부에 대한 사면 등을 조건으로 카프 정부의 해체를 요구했다. 에베르트 정부도 이 조건을 수용했다.

318일 카프는 사임하고 스웨덴으로 망명했고, 뤼트비츠는 헝가리로 도망가고, 에르하르트는 바이에른에 숨어버렸다. 이로써 카프 반란(Kapp Putsch)이라 불리는 우익 쿠데타는 4일만에 끝났다.

 

하지만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 최대 석탄산지인 동부 루르(Ruhr) 지역의 노동자들이 폭동을 일으켰다. 이번엔 공산당, 독립사민당, 무정부주의자등 좌파들이 사민당 정권을 위협했다.

루르지방 위치 /위키피디아
루르지방 위치 /위키피디아

 

루르 탄광 노조도 보수주의자들의 카프 반란에 저항해 총파업에 참가했다. 파업은 사민당이 주도하고 독립사민당과 공산당이 동조하는 형식으로 전개되었다. 313일 파업 첫날에 보훔의 광산근로자 2만명이 참가했다. 14일엔 공산당, 독립사민당 등 좌파정당은 이 기회에 프롤레타리아트독재 정부를 수립하기로 기획했다. 좌파 노조가 주도권을 가지면서 루르 전역에 노동자 평의회가 구성되고, 정치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루르 적군(Red Ruhr Army)을 조직했는데, 참가자는 5만명에 이르렀다. 이 숫자는 그들이 소지한 총기의 수를 기준으로 한 것이고, 실제 인원은 8만명에 달했다는 분석도 있다.

317일 루르 적군은 우익 자유군단의 주둔지를 급습해 600여명을 체포하고 도르트문트를 점령했다. 붉은군대는 320일 에센에서 중앙위원회를 구성하고 루르지방의 행정을 장악했다. 하지만 봉기자들은 하나의 리더십을 갖추지 못했고 공통된 정치 프로그램도 없었다.

 

우익 카프 반란이 소멸된 후 322일 에베르트 정부는 총파업 중단을 선언했다. 루르의 붉은 군대는 해산하지 않았다. 에베르트 정부는 베를린에 돌아간후 324일 루르 노조에 30일까지 파업을 종식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정부측 대표와 루르 노동자 대표 사이의 협상이 깨졌다. 루르 적군은 다시 총파업을 선언했다. 3만명의 광산근로자가 참여했다. 루르 지역의 도시들이 공산주의자에게 넘어갔다.

 

도르트문트의 루르 적군들 /위키피디아
도르트문트의 루르 적군들 /위키피디아

 

42일 에베르트 정부는 폭동을 진압하기 위해 정부군과 자유군단을 루르에 투입했다. 이들 군대 대다수가 카프 쿠데타의 지지자들이었다. 에베르트 정부는 우익 쿠데타에 좌익을 이용하고, 좌익 폭동에 우익을 이용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인 것이다.

우익 병사들은 무차별로 난사했다. 붉은군대는 숫자만 많았을 뿐 무기나 군사훈련을 받은 적이 없는 노동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4년 동안 실전 경험을 가진 우익 병사들은 붉은군대를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렸다. 우익 군대는 무기를 소지한 자에게 즉석에서 사살했다. 43일 에베르트 대통령은 군에 즉결처분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야 했다. 붉은 군대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양측은 엄청난 피해를 냈다. 노동자 군대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고, 정부군은 208명 사망에 123명의 실종자를 냈다. 자유군단도 273명을 잃었다.

 

우익 쿠데타와 좌익 폭동의 영향은 선거결과로 나타났다. 에베르트 정부는 카프 쿠데타측과의 약속에 따라 620일 조기총선을 실시했다. 이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참패했다. 연정을 구성했던 사민당, 중앙당, 민주당의 의석이 70%에서 43%로 뚝 떨어졌고, 좌파 정당인 독립사민당과 우파정당인 독일민족인민당, 민족당이 의석을 크게 늘렸다. 좌와 우의 협공에 중도정당이 약화되고, 양쪽 극단세력이 세를 확대한 것이다. 에베르트 정부는 우파 정당인 독일인민당을 연정세력에 포함시켜 겨우 과반으로 내각을 구성했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은 수시로 내각이 교체되는 불안정한 구조를 이어가게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