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④…가혹한 전쟁배상금
바이마르 공화국④…가혹한 전쟁배상금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0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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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독일경제 파괴 위해 과도한 배상 요구…지급불능 선언, 루르 점령

 

독일에 대한 전쟁 배상금 청구의 원칙은 19196월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규정되었고, 구체적인 금액 논의는 배상위원회로 미뤘다. 배상위원회는 19211월에 시작되었다.

1871년 전쟁에서 프로이센(독일)이 프랑스에 50억 마르크의 배상금을 징수했고, 1871년 나폴레옹 전쟁에서 영국이 프랑스에 7억 프랑을 받아냈다. 이번에는 프랑스가 받아낼 기회였다.

독일은 처음에 배승금으로 금의 가치를 기준으로 300억 마르크를 제시했다. 독일은 50년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 받은 배상금을 기준으로 계산해 갚으면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프랑스가 부른 배상금액은 천문학적이었다. 프랑스의 요구액은 무려 2,260억 금마르크에 달했다. 프랑스의 계산법은 전쟁으로 인한 국가적 비용에다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파괴한 시설에 대한 복구비용을 더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1918년 가을에 프랑스와 벨기에 전선에서 철수하면서 공장과 교량 등 각종 시설을 무차별로 파괴했다. 그 복구비용도 내놓을라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도 프랑스 편에 섰다. 영국은 과도한 배상금 청구에 부정적이었다.

 

1920년 전쟁배상금으로 뜯겨 가는 기계가 열차에 실려 있다. /위키피디아
1920년 전쟁배상금으로 뜯겨 가는 기계가 열차에 실려 있다. /위키피디아

 

19214월 독일은 500억 마르크를 감당할수 있다는 견해를 미국에 알렸다. 미국은 1차 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이유 조약 체결도 비준하지 않고 국제연맹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더 이상 유럽문제에 끼어들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독일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벨기에가 프랑스와 영국의 요구를 절충해 타협안을 제시했는데, 그 금액이 1,320억 금마르크였다. 연합국들이 이 금액에 합의한 것은 192155일이었다.

협상에 참가한 경제학자 존 케인즈(John Maynard Keynes)는 이 가혹한 금액에 대해 독일 경제플 파괴하기 위한 카르타고 조약이라고 혹평했다. BC146년 고대 로마제국은 3차 포에니전쟁에서 카르타고를 멸망시키고 주민 대부분을 죽이고 나머지는 노예로 팔았고, 그 땅에 소금을 뿌려 농사를 짓지 못하게 했다.

역사 평론가들의 분석에 따르면 독일이 제시한 500억 마르크가 적정 배상금이고, 720억 마르크는 영국과 프랑스가 타협한 정치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이 참에 독일을 파멸시키자는 프랑스의 복수심이 배상금을 부풀려 놓았다는 것이다.

 

연합국의 전쟁배상금 액수가 알려지자 바이마르 정부는 정통성의 혼란에 빠졌다. 패전국으로서 연합국의 요구에 계속 끌려 다녀야 하느냐, 위신을 세워 제 목소리를 내야 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 중앙당 출신의 콘스탄틴 페렌바흐(Constantin Fehrenbach) 총리는 연합국의 요구를 즉각 거절했고, 국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그러나 페렌바흐가 사임하고 이어 출범한 중앙당의 비르트(Joseph Wirth) 내각은 연합국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했다.

독일 정부가 배상금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계약의무를 일부러 기피한다고 비난하는 프랑스를 무마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해서 비르트 내각은 1921년말에 첫 번째 배상금 지불을 했다. 하지만 곧바로 독일은 지급불능을 선언했다.

 

1922년 4월 독일과 러시아의 라팔로 조약 체결 모습 /위키피디아
1922년 4월 독일과 러시아의 라팔로 조약 체결 모습 /위키피디아

 

프랑스의 배상금 압박이 심해지자, 독일은 동방정책으로 기울었다. 독일은 러시아에 접근했다. 열강 간의 라이벌 관계를 활용해 프랑스와 영국을 견제하기 위한 조치였다.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 내전에 반혁명 백군을 지원했기 때문에 러시아와 적대적 관계에 있었다.

1922416일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라팔로 조약(Treaty of Rapallo)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은 독일과 러시아 사이에 전쟁 손실에 대한 상호 보상을 포기하고 무역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다. 프랑스의 배상금 압박에 눌려 있던 독일로서는 한줄기의 빛이었다.

 

루르 지방에 진주한 프랑스군 /위키피디아
루르 지방에 진주한 프랑스군 /위키피디아

 

하지만 동방과의 화평조약은 베르사이유 체제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프랑스의 레몽 푸엥카레(Raymond Poincaré) 총리는 독일이 자발적으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강제라도 받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독일은 돈이 없으니 현물로 갚겠다고 나왔다. 석탄과 목재가 배상금으로 실려 나갔다. 독일은 또 줄게 없으니 노동자라도 데려가라고 했다. 독일인 인력송출은 프랑스 기업인들에 의해 거절되었다. 민족적 감정을 해결할수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 국민들은 () 식량배급, () 배상금 지불을 외쳤다. 통계에 의하면 1922년 독일인의 연간 식량소비량의 평균은 22kg으로, 전쟁전인 191352kg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국민들은 굶주리는데 정부는 외국의 압박에 대항하지 못하고 빚 갚는데 주력하는 게 민족주의자들에겐 배상금 지불이 좋은 선동 구실이 되었다. 19226월 유대인 외무장관 라테나우가 극우 청년에게 암살되었다.

극심한 정치적 혼란으로 비르트 정부가 1922년말에 사임하고 보수 중도우파의 쿠노 정부가 들어섰다. 총리 쿠노(Wilhelm Cuno)19221226일에 현금이든 현물이든 더 이상 배상금을 지불할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프랑스와 벨기에는 배상금을 갚지 않으면 루르 탄광을 점거하겠다고 위협했다. 영국은 반대했다. 독일 석탄이 들어오지 않게 되자 프랑스 제철소의 석탄 비축량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푸엥카레 총리는 강제라도 독일 석탄을 가져오기로 마음을 먹었다.

 

1923년 루르지방 학생들이 “루르는 독일 땅”이라는 깃발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23년 루르지방 학생들이 “루르는 독일 땅”이라는 깃발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23111일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국경을 넘어 독일 최대 석탄산지 루르 지방을 점령했다. 독일의 쿠노 정부는 루르 주민들에게 소극적 저항과 불복종 운동을 지시했다. 루르의 광산노동자들은 파업으로 대응했다. 겁을 먹은 것은 루르의 독일인이 아니라 프랑스와 벨기에 병사들이었다. 독일인들은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침략군을 바라보았고, 점령군은 공격적 행위를 하지 못했다. 루르 지방의 석탄 생산이 중단되었다. 석탄을 가져가려던 프랑스와 벨기에의 의도는 무산되었다.

오히려 주민들과 마찰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이 전개되었다. 부활절 하루전인 1924331, 독일 철강회사 크루프(Krupp) 공장을 수색하던 프랑스군 1개 분대가 노동자들의 위협을 받자 그들에게 발포했다. 그 자리에서 10대 청소년을 포함해 13명이 죽고 52명이 부상당했다. 독일인들은 격한 감정 속에서 그들의 장례를 치렀다. 2년 이상 계속된 점령기간에 독일인 130명이 사망했다.

독일은 점령 첫해 4개월동안에 128,000파운드를 징수하는데 그쳤다. 그 전해 징수액의 1%에 불과한 금액이었다. 오히려 군대를 파견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더 들었다.

 

프랑스의 루르 점령(Occupation of the Ruhr)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한채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좋은 명분만 제공했다. 그들은 재무장론을 펼쳤다.

프랑스의 군사조치는 독일에 대한 국제적인 동정심을 일으켰다.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던 미국이 독일의 배상금 문제에 개입했다.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를 설득해 배상금을 조절하는 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장은 미국 연방정부 예산국장인 찰스 도즈(Charles G. Dawes)가 맡았다.

미국과 영국은 독일의 배상금 지불이 불가능하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합리적인 방법을 찾았다. 19247월 연합국은 도즈가 제안한 안을 채택했다. 도즈 안(Dawes Plan)은 배상금 총액은 그대로 두되 1924년 첫해 지불액은 10억 마르크로 하고, 5차년도인 1928년에 25억 마르크로 증액하며, 나머지는 능력이 되는대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또 배상 재원으로서는 철도 수입, 관세, 알코올세, 연초세, 설탕세로 충당하기로 했다. 이 합의로 프랑스와 벨기에는 1925825일 루르 지방에서 철수했다. 그해 찰스 도즈는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게 된다.

도즈 안에 따라 독일은 연합국 감시 하에 중앙은행인 제국은행(Reichsbank)을 설립할수 있게 되었다. J.P.모건 은행등 뉴욕 월스트리트의 은행들이 독일 배상채권 발행에 나섰다. 독일 철도와 광산, 산림, 공장설비등을 담보로 한 8억 마르크 채권 발행에 발행액의 10배 이상 주문이 몰려 쉽게 자금이 조달되었다. 독일 배상금 문제는 숨통이 트였다.

그후 국제 협력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1930년에 영 안(Young Plan)에 의해 독일 배상금은 보다 경감되었다. 두 차례의 배상금 감액 조치에 이어 1932년 로잔회의(Lausanne Conference)에 의해 독일의 배상금 지불이 종식되었다.

 

루르 지방의 위치 /위키피디아
루르 지방의 위치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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