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부상③…대공황이 제공한 기회
히틀러의 부상③…대공황이 제공한 기회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11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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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총선에서 18.3% 지지 얻어 제2당 부상…히틀러 대선에 출마

 

192910월 뉴욕증시 붕괴로 시작된 미국의 대공황은 독일을 강타했다. 독일에 들어왔던 미국의 투자가들이 떠나갔다. 1920년대 후반에 자금의 흐름은 도스안(Dawes Plan) 합의에 따라 독일에 미국의 투자가 이뤄지고 미국의 자금이 전쟁 배상금으로 풀려 프랑스에 상환하고 프랑스가 미국의 채무를 갚은 형태의 투자가 이뤄졌다. 이 흐름이 끊긴 것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실업률이었다. 1928년에 연평균 140만명이었던 실업 인구는 1929년에 190만명을 넘어섰고, 1930년에는 310만명, 1931년에 450만 명으로 증가했다. 1932년에 560만명까지 치솟았다. 인구의 3분의1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대공황은 나치에게 훌륭한 선동의 소재였다. 나치는 유대인들이 장악한 금융회사들의 과도한 욕심 때문에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당시 유럽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유대금융가문 로스차일드는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헸지만, 발상지인 프랑크푸르트에선 가문이 단절되어 있었다. 로스차일드 이외의 상당수 유대자본이 독일 금융계에 진출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1931년 베를린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독일군 /위키피디아
1931년 베를린에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식량을 배급하는 독일군 /위키피디아

 

바이마르 공화국은 출발부터 허약한 체질이었다. 그런 체제가 14년을 버텼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었다고 평가하는 역사평론가들도 있다.

대공황기에 독일 정부는 잘못된 처방을 내렸다. 재정을 확대하고 수요를 확충하는 정책을 펼쳐야 했는데, 거꾸로 갔다. 1920년대 초반에 겪었던 극심한 인플레이션의 고통이 정책 리더들의 뇌리에 사로잡혀 디플레이션 정책을 취한 것이다.

당시 독일 군부는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대공황이 터지자 참모총장 쿠르트 폰 슐라이허(Kurt von Schleicher)는 금융전문가인 하인리히 브뤼닝(Heinrich Brüning)을 추천해 1930330일에 브뤼닝 내각이 출범했다.

브뤼닝은 디플레이션 정책을 채택했다. 그 목적은 두가지였다. 첫째는 재정적자를 축소해 재정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고, 둘째는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전쟁배상금 상환을 지연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브뤼닝은 중앙당 출신으로 의회에서 지지기반이 약했다. 그가 제출한 예산축소 법안은 의회에서 거부되었다. 그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에게 헌법에 보장된 긴급명령권을 선포하자고 요구했다. 바이마르 헌법 제48조엔 국가 위기시에 국회와 상의하지 않고 대통령이 긴급명령을 선포할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9307월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의회에서 거부된 법안을 긴급명령으로 선포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긴급명령권 발동으로 의회는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사실상 과거 황제국 시절처럼 1인에 의해 통치하는 시대로 돌아가게 되었다. 긴급명령권은 점증하는 좌익과 우익의 폭력을 진압하는데는 유효했지만, 대통령을 황제로 만드는 극단적인 독재의 요소를 내포했다.

 

1930년대 대공황기의 독일 실업률 추이 /위키피디아
1930년대 대공황기의 독일 실업률 추이 /위키피디아

 

재정축소에 대한 반발은 컸다. 역대 바이마르 정부는 내전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동자, 농민, 소상공인들의 이익을 위해 다양한 복지혜택을 베풀었다. 노동자 임금은 유럽 경쟁국보다 높아졌고, 1927년부터 해고수당이 보장되었다. 그런데 예산 축소로 해고자에게 지급되는 해고수당이 줄고 임금도 삭감되고 농민에게 돌아가는 혜택도 줄었다. 부도 위기의 기업에 대한 지원금도 배제되어 기업 부도가 늘었다.

의회 해산 이후 실시된 1930914일 총선은 브뤼닝 정부의 예산축소에 대한 심판의 선거였다. 히틀러는 대대적인 선전전을 펼쳤다. 대공황은 유대 금융가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유발되었다고 소리쳤다. 그의 주장은 불황에 찌들린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갔다. 이에 비해 좌파진영인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은 서로에 대한 적개심으로 극우세력의 공세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이 선거에서 나치당은 크게 승리했다. 전국적으로 18.25%의 지지율을 획득해 107석의 의석을 얻어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올라선 것이다. 1924년과 1928년 선거에서 단지 14석과 12석의 의석을 차지했던 것에 비하면 격세지감이었다.

1당은 사회민주당으로, 24.53% 지지로 10석을 잃은 143석에 머물렀다. 공산당도 13.13%를 얻어 77석으로 제3당이 되었다. 나치가 95석으로 추가하고, 공산당이 23석을 추가하면서 극우와 극좌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독일국가인민당, 독일인민당등은 대패했지만 그들은 극우 나치와 볼셰비키 혁명을 막아야 한다는데 공감대를 형성하고 브뤼닝의 중앙당과 대연정을 구성했다. 히틀러의 나치는 두 번째로 많은 의석을 차지했지만 정권을 획득하는데는 실패했다.

 

1926~1936년 사이 독일의 국민총생산(GNP)과 물가지수 /위키피디아
1926~1936년 사이 독일의 국민총생산(GNP)과 물가지수 /위키피디아

 

그러나 시간의 그의 편이었다. 히틀러는 당내에 좌파성향이 짙은 그레고르 슈트라서(Gregor Strasser)를 부총재직에서 해임하고 자신의 심복인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를 그 자리에 앉혔다.

공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 갔다. 브뤼닝 연정의 경제정책은 계속 실수를 연발했다.

같은 독일민족의 나라이자 1차 대전 때에 동맹국이었던 오스트리아에선 최대은행 크레디탄슈탈트(Creditanstalt)19315월에 파산 위기에 처했다. 연쇄적으로 유럽 은행들이 휘청거렸고 로스차일드마저 자금을 탈탈 털어 오스트리아 은행 지원에 나서야 했다. 독일 중앙은행인 제국은행(Reichsbank)에서도 급격하게 자금이 빠져 나갔다. 19315월 첫째주에 15,000만 마르크, 둘째주엔 54,000만 마르크, 그다음 이틀 사이에 15,000만 마르크가 빠져나갔고, 19~20일에는 중앙은행의 파산이 예고되었다. 미국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은 1년에 한해 독일의 전쟁배상금 지불유예(모라토리엄)를 선언했다. 프랑스가 반발했지만 미국의 영향력을 무시할수 없었다. 독일의 은행들도 연쇄적으로 도산하고, 기업들이 파산했다.

브뤼닝의 디플레이션 정책은 한 분야에선 성공했다. 전쟁배상금을 상환하지 않게 된 것이다. 19326월 로잔 회의(Lausanne Conference)에서 독일이 배상금 지불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확인되어 전쟁배상금 지불이 종식되었다.

전쟁배상금을 지불하지 않게 되었을뿐, 브뤼닝의 경제정책은 실패로 귀결되었다. 공공지출이 급격하게 삭감되면서 실업자의 수가 크게 증가했다. 1932년 독일의 산업생산량은 1928년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같은 기간에 주가는 3분의1로 곤두박질했고, 실업률도 7%에서 28%로 무려 4배 이상 증가했다.

지주들도 브뤼닝 정부에 항의했다. 엘베강 동쪽 토지소유자들은 정부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게다가 브뤼닝이 노동자들에게 토지를 나눠줘 지주들의 원성을 샀다. 독일 동부의 융커 계급이 브뤼닝에 등을 돌렸다.

 

브뤼닝은 사회를 혼란하게 하는 공산당의 붉은전선(Roter Frontkämpferbund)과 나치의 돌격대(SA: Sturmabteilung)를 해산하려 했다. 그런데 군부가 나치 SA 해산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 군부는 재무장을 할 경우 SA 요원들을 활용할 생각이었다. 그해 제네바 군축회의에서 독일도 다른 강대국과 동등한 위치에서 무장을 할수 있도록 국제적인 승인이 나 있는 상태였다. 브뤼닝을 총리로 천거했던 군부의 지도자 슐라이허는 브뤼닝을 탐탁치 않게 생각하게 되었다.

 

1932년 4월 독일 대통령 선거(2차) 결과 /위키피디아
1932년 4월 독일 대통령 선거(2차) 결과 /위키피디아

 

바이마르 헌법에서 대통령은 임기 7년이고 재선에 대한 제한은 없었다. 1932년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힌덴부르크는 84세의 고령이었고, 노인성 치매 증세가 있었다. 측근들이 한번 더 하라고 권유했고, 브뤼닝 총리의 중앙당도 그의 재선을 밀었다. 사회민주당도 힌덴부르크를 지지했다. 힌덴부르크는 마지막 노욕을 부렸다.

그 때 힌덴부르크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히틀러였다. 히틀러의 당시 나이는 43. 육군 참모총장 출신과 하사 출신의 대결이었다. 공산당에서 에른스트 탤만도 출마했다.

313일 실시된 1차 선거에서 무소속 힌덴부르크가 49.6%, 히틀러 30.1%, 공산당의 탤만 13.2%의 지지를 얻었다. 아무도 과반의 지지율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4102차 선거가 실시되었다. 2차 선거에서 힌덴부르크는 53.0%로 가까스로 과반을 넘었고, 히틀러는 36.8%, 탤만은 10.2%를 획득했다.

히틀러는 비록 대통령 선거에서 졌지만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자리잡았다.

 

1932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히틀러 /위키피디아
1932년 대통령 선거에 입후보한 히틀러 /위키피디아

 

노정객의 당선에 가장 앞장섰던 브뤼닝 총리가 결국은 팽당했다. 1932531일 재선에 성공한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을 총리에서 해임했다. 브뤼닝은 아쉬움을 표시했지만 대통령에게 긴급명령권을 요청한 것도 자신이었다.

힌덴부르크는 국민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의회에서도 역할이 미미했던 프란츠 폰 파펜(Franz von Papen)을 새 총리로 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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