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부상⑤…집권 6개월만에 독재 구축
히틀러의 부상⑤…집권 6개월만에 독재 구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13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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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회 방화사건, 전권위임법, 장검의 밤 사건 통해 권력 장악

 

1933130일 나치당의 아돌프 히틀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 앞에서 총리 취임 선서를 했다. 취임식은 단촐했고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1차 대전을 진두지휘했던 참모총장 출신의 힌덴부르크는 육군 하사 출신 히틀러의 야망을 모르고 있었다. 내각 11명중 나치는 총리와 내무장관, 무임소장관 등 3명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대중을 동원했다. 그날 저녁 지지자들은 총리실 뜰에 운집했고, 히틀러는 창가에 얼굴을 내밀어 지지자들의 열광적인 호응에 답했다.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한 1933년 1월 30일 저녁,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히틀러가 총리에 취임한 1933년 1월 30일 저녁,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다음날부터 세상은 바뀌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에게 의회 해산과 총선 실시를 요구했고, 대통령은 이를 받아들였다. 나치는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했다. 선거운동은 폭력적이었다. 히틀러 정부는 야당을 탄압했다. 좌파 정당의 집회는 금지되었다. 중도 정당 후보들은 위협을 받거나 공격을 받았다. 히틀러에게 반대하는 제국 의원들은 불법적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던 중에 227일 저녁 제국의회 의사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방화범은 네덜란드 출신의 공산주의자 루베(Marinus van der Lubbe)였다. 24살의 이 청년은 파시스트에 저항하는 독일 노동자를 대변해 의회를 방화했다고 밝혔다. 단순범이었다.

하지만 나치는 이 사건을 부풀렸다. 배후에 국제공산주의조직 코민테른Comintern이 개입되었으며, 독일 공산당이 루베의 배후라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힌덴부르크에게 대통령의 긴급명령권을 발동해 제국의회 방화포고령(Reichstag Fire Decree)을 내리자로 건의했다. 힌덴부르크는 엉겹결에 히틀러의 말에 따랐다. 비상사태령은 바이마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을 제한하는 내용을 담았다. 집회가 금지되고 반정부 인사를 체포하고 탄압할수 있는 합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나치의 돍격대 SA는 반정부 인사에 대해 백주에 테러를 가하고 비공식 장소로 끌고가 고문과 살해를 저질렀다. SA는 스스로 제2의 경찰이라 주장하며 이리저리 눈치 보는 진짜 경찰을 대신해 나치의 목적을 실천했다.

 

1933년 2월 27일 제국의회 방화 /위키피디아
1933년 2월 27일 제국의회 방화 /위키피디아

 

35일에 바이마르 공화국의 모든 정당이 참가하는 마지막 총선거가 실시되었다. 공포 분위기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288)의 지지를 얻었으나 과반수를 차지하지 못했다. 히틀러에 의해 그토록 탄압받던 사회민주당(18.25%), 공산당(12.32%), 카톨릭 중앙당(11.25%)은 여전히 확고한 지지층을 형성하고 있었다. 나치당은 알프레드 후겐베르크(Alfred Hugenberg)가 이끄는 극우민족주의 정당인 독일국가인민당(52)과 연대해 겨우 과반수를 형성했다.

 

315일 나치당과 독일국가인민당 소속 각료들이 좌파 정당과 혁명분자를 쓸어버리는 내용의 전권위임법(Enabling Act)을 제정하기로 의결했다. 이 법은 헌법을 개정해야 할 사안이었기 때문에 제국의회 의석의 3분의2의 찬성을 필요로 했다. 반나치 정당 소속 의원들이 거부하면 법안 통과가 무산될 판이었다.

중도파 의원들에 대해 무차별 위협과 폭력이 가해졌다. 중앙당은 결국 나치에 항복했다. 공산당 의원 81명은 의회방화 사건으로 체포되었고, 사회민주당 소속 의원 26명이 구금되었다.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결연히 법안을 반대했다. 사민당 대표 오토 벨스는 나치 SA가 의사당에 진입해 난동을 부리는 가운데서도 민주주의의 죽음을 애도하는 연설을 했다. 법안은 32583%의 얍도젹 지지로 통과되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법안에 서명했다.

전권위임법은 의회의 참여와 동의 없이 내각 회의에 법률을 공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사실상 정당 제도가 붕괴되었고, 히틀러와 나치가 다른 정당과 협의 없이도 마음대로 법안을 공포할수 있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속전속결로 처리되었다. 공산당이 해체되고, 사회민주당도 금지되었다. 노조활동도 금지되었다. 사민당 간부들은 집단수용소로 끌려갔고, 그 중 상당수가 살해되었다. 부르죠아지 정당들은 자진해서 나치에 협조했고, 1933년 중반쯤에는 사실상 나치당 하나만 남게 되었다.

곧이어 독일의 주들이 전격적인 조치에 의해 해체되고 각 주의 총리 자리에 중앙정부 내무부가 파견하는 지방장관에 의해 메워졌다.

 

남은 것은 관료와 군부였다.

193347일 히틀러 내각은 직업공무원 정비법을 공포해 공직에서 민주주의자, 자유주의자, 유대인들을 해고하고, 그 자리를 나치 당원으로 대체했다.

군부는 만만치 않았다. 제국의 군대는 베르사이유 조약을 파기하고 패전의 치욕을 되갚아 제국의 영토를 확장하겠다는 히틀러의 공약을 반겼다. 군부는 힌덴부르크의 지지를 업고 있었다. 그런데 군인들은 나치 SA가 권력을 잡은양 천박하게 하는 행동들에 대해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 SA는 자신들이 제국의 실질적 군대가 되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였다. 제국의 군부와 나치의 SA가 한판 대결을 벌여야 할 일촉즉발의 상황이 되었다.

 

SA의 대장 에른스트 룀(Ernst Röhm)은 바이에른의 뮌헨 출신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고, 전역후 일찍부터 나치당에 가입해 뮌헨 비어홀 폭동에도 참가했다. 그는 바이에른에서 돌격대(Sturmabteilung)를 창설해 나치의 준군사조직으로 육성했다. 1933말에 SA 대원들은 300만명에 이르렀다. SA 대원들은 갈색 제복을 입었다. 갈색은 독일의 대지() 색깔을 의미했다.

히틀러가 집권한후 대원들 중에 상당수는 자신들이 독일 정규군을 대체할 것이라 믿었다. 지도부는 자신들이 나치의 전위대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들은 거리 투쟁에 바람몰이에 나섰고, 공산당사를 공격했고, 나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에게 테러를 가했다.

19331월에 히틀러가 정권을 잡자 룀은 제2의 혁명론을 펼쳤다. 새로운 혁명을 통해 착취적인 자본가에게서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자에게 나눠주고, 토지를 실업자에게 배분하자는 것이었다. 그의 논리는 나치당 내에서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한 개인적인 의견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장은 SA 대원들 사이에선 큰 기대를 모았다. 돌격대는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에 전쟁후 전역한 자유군단 출신들이 많았지만, 대공황 이후에는 실업자들이 대거 참여했다. 대원르은 군대라는 새로운 일자리를 원했다.

 

1929년 SA 부대 /위키피디아
1929년 SA 부대 /위키피디아

 

룀은 히틀러가 총리가 된 이후 나치당의 2인자까지 올랐다. SA는 룀의 지휘에 따라 움직였고, 나치당에서는 독립적인 존재였다.

하지만 히틀러가 집권한 이후 SA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행인이 SA 대원에 폭행을 당하고, 외국인들이 SA의 조사를 받아 대사관에서 항의가 들어왔다. 게다가 정규군을 SA로 대체해야 한다는 룀의 주장에 군부가 긴장했다.

히틀러는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제국의 군대를 살리고 SA를 억누르기로 결심했다. 헤르만 괴링과 하인리히 힘러 등 히틀러의 측근들은 그의 생각을 전적으로 지지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와 제국의 군대가 동원되었다.

1933630일에서 72일까지 히틀러는 룀을 비롯해 SA 지도부에 대해 대대적인 검거작전을 펼쳤다. 공식적으로는 85명이 죽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100명 이상이 죽었다. 룀도 동료 나치 당원에 의해 처형되었다.

이 처형극 도중에 히틀러의 정적인 쿠르트 폰 슐라이허 전 총리, 반 히틀러파였던 에리히 클라우제너, 룀의 부관이었던 에드문트 하이네스, 나치당내 정적이었던 그레고르 슈트라서, 뮌헨 폭동을 진압했던 구스타프 폰 카르도 암살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 또는 룀 처형 사건(Röhm Purge)이라 부른다.

이 사건 이후 독일 군부는 히틀러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힌덴부르크 대통령도 SA 숙청사건에 대해 히틀러에게 칭찬의 메시지를 보냈다.

히틀러는 이 사건을 통해 사조직이 아니라, 정부의 공식 조직에 의해 국가를 통치한다는 이미지를 세웠다. 아돌프 히틀러가 130일 총리에 취임해 독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데 6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193482일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했다.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없애고 대통령과 총리를 겸한 총통제를 실시하고, 그 자리에 오른다. 총통에 대한 호칭은 지도자(Führer)라고 했다.

 

1933년 뉘렘베르크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에른스트 룀 /위키피디아
1933년 뉘렘베르크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에른스트 룀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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