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발트국이 벨라루스 사태에 간섭하는 이유
폴란드-발트국이 벨라루스 사태에 간섭하는 이유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08.16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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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통합왕국 시절에 벨라루스 통치한 역사…러시아에 공동 견제

 

역사의 오랜 뿌리는 현실의 문제에 어떤 형식으로든 나타나게 된다. 동유럽 벨라루스 정부의 시위 탄압 사태에 대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의 발트3국이 일제히 유럽연합의 제재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나선 것도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쉽게 해석된다.

12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하나의 나라를 형성한 경험이 있다. 때론 이웃 강대국 러시아와 독일에 의해 점령되고 분리되기도 했지만, 이들 네 나라는 동으로 러시아와 서로 서유럽의 가교 역할을 하며 역사를 공유해 왔다.

 

벨라루스에서는 수천명의 시민들이 일주일째 선거부정을 규탄하며 재선거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 9일 실시된 벨라루스 대통령 선거에서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80%의 지지를 얻어 6연임을 하게 되었는데, 야당과 시위대는 선거애 대규모 부정이 있었다며 재선거 실시 또는 평화로운 정권 이양을 요구하고 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동쪽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영의 지지를 얻어 시위대 탄압에 나서고 있는 반면에 야당과 시위대들은 서방인 EU에 손길을 보내 루카셴코 정권에 경제제재를 가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벨라루스의 이웃 나라인 폴란드와 발트 3국이 서방진영에 우호적인 야당을 지지하며 EU의 강도 높은 제재를 요구했다. 폴란드의 마테우시 모라비에츠 총리는 EU의 단합된 조치와 벨라루스의 재선거를 요구했다. 또한 발트3국 총리들도 공동성명을 내고 루카셴코 정부의 폭력 진압을 자제하고 정치범과 구속자를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벨라루스의 주변국들 /World Maps
벨라루스의 주변국들 /World Maps

 

이처럼 폴란드와 발트3국이 공동의 목소리를 내며 러시아에 기운 루카셴코 정부를 규탄하는 것은 지정학적, 역사적 배경에 그 뿔기를 두고 있다.

발트3국의 주도국은 리투아니아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는 구 소련 시절에 개별 공화국의 체제를 형성했지만 사실상 모스크바의 소비에트 정부에 종속되어 있었다. 1991년에 폴란드와 발트 국가들이 독립하면서 과거 역사 속의 연대에 대한 향수를 되살려 연대적 움직임을 보여 왔다. 특히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EU에 가입했다.

 

리투아니아의 뿌리는 1253년에 민다우가스(Mindaugas)라는 귀족이 국가의 면모를 갖추면서 시작된다. 그는 최초의 리투아니아 왕이자 최초의 기독교 세례를 받은 왕이었다.

14세기 들어서 리투아니아 공국은 유럽에서 가장 큰 나라가 되었다. 1316년에 게디미나스(Gediminas; 1275~1341) 대공이 왕으로 즉위하고, 1572년까지 그의 왕조가 지속되었다. 이 왕조는 리투아니아를 동유럽 최강 국가로 만들었고, 따라서 리투아니아 민족은 유럽의 중심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게디미나스는 리투아니아 영토를 현재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까지 확장했고, 끊임없이 리투아니아를 넘보는 독일 중세십자군 기사단인 튜튼 기사단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의 아들 알기르다스(Algirdas) 대공의 통치기간인 14세기 중엽에 리투아니아의 영토는 동쪽으로도 확대되었다.

 

리투아니아 영토 변화 /위키피디아
리투아니아 영토 변화 /위키피디아

 

알기르다스의 열 두 아들 중 하나인 요가일라(Jogaila; 1377~1401) 대공은 계속되는 독일 튜튼 기사단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폴란드 앙주 왕조의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해 폴란드와 동맹관계를 수립했다. 그 결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튜튼 기사단을 무찔러 독일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었다. 당시 동맹 조건의 하나로 리투아니아는 로마 가톨릭교를 수용하게 되었다. 요가일라는 폴란드 여왕과의 결혼으로 두 나라를 통치하게 되면서 브와디스와프 2(Władysław II)라고 불렸으며, 야기에우워 왕가의 창시자가 되었다. 요가일라의 후계자인 비타우투스(Vytautus)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러시아 일부를 포함해 발트 해에서 흑해까지 영토를 확장시켜 리투아니아의 전성기를 이룩했다. 비타우타스의 사후 리투아니아는 명목상으로는 폴란드 왕에게 예속되어 있었지만 자치권을 가지고 정치적인 문제에서 독자적 행보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반 4세가 발트 해 진출을 목적으로 리보니아 전쟁(1558~1583)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때 폴란드가 리투아니아에게 동맹을 강요했고, 리투아니아 중소귀족들은 대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하고자 폴란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결국 1569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간의 루블린 합병 조약으로 두 나라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이 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두 나라가 독립을 유지한 연방국가로 보이지만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폴란드에 예속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의 세력이 약해지면서 주변 국가들이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상대적으로 강해진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제국은 1772-1795년에 조직적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국을 해체시켜 유럽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918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독립국으로서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다.

 

146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1466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의 영토 /위키피디아

 

리투아니아와 발트2국은 러시아 혁명 기간인 1918216일 다시 독립하게 된다. 폴란드는 이때 벨라루스등을 점령해 러시아 서부를 바짝 진출했으나, 러시아 볼셰비키군의 반격으로 후퇴한다.

1940년부터 폴란드와 발트3국은 또다시 소련, 그리고 이어서 나치독일에 점령되는 수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인 1944년에 소련이 발트3국을 재점령하여 소련을 구성하는 공화국으로 편입시켰고, 폴란드도 공산화되었다.

이런 역사 변화 과정에서 벨라루스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에 속하거나 러시아의 영토에 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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