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 최초 통영 해저터널에 숨은 사연
동양 최초 통영 해저터널에 숨은 사연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8.19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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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일제시대에 완공, 일본인 휘호 남아 있어…이순신장군 승전지

 

경남 통영과 미륵도 사이 지하에 통영 해저터널이 있다. 국가등록문화재 20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터널은 1932년 일제 시대에 건립되었으며, 동양에서는 최초의 해저 구조물이라고 한다.

 

통영 해저터널 /문화재청
통영 해저터널 /문화재청

 

당시 통영군수였던 일본인 야마구치가 자작 휘호로 쓴 龍門達陽”(용문달양)이란 글씨가 아직도 남아 있다.

이 글은 이중의 의미가 숨어 있다. 고사성어의 원래 뜻은 잉어가 거친 여울목 물살을 거슬러 오르면 용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용의 문(龍門)을 통해 태양(일본)이 있는 곳에 도달한다"는 뜻도 숨어 있다.

 

통영 해저터널 출입부의 휘호 /문화재청
통영 해저터널 출입부의 휘호 /문화재청

 

길이 461m, 5m, 높이 3.5m인 이 터널은 해수면 아래로 최대 10m 깊이까지 내려가 있다. 터널부는 철근콘크리트조로 이루어져 있다.

이 터널을 건설하게 된 것은 일본 어민들이 통영에 많이 이주하면서 통영과 미륵도 사이의 거리를 단축하기 위해서였다. 19275월 터널 공사에 착수하여 193212월까지 5년여의 공사를 거쳤다.

 

통영 해저터널의 위치 /카카오맵
통영 해저터널의 위치 /카카오맵

 

해저터널 건설에는 사연이 있다. 그곳은 착량지였다. 착량(鑿梁)이란 파서 다리를 만들다란 뜻으로 당항포 해전에서 참패한 왜적들이 쫓겨 달아나다 미륵도와 통영반도 사이에 있는 해협에 다리()를 만들어 도주했던 곳이다. 수많은 왜병들은 이곳을 달아나다가 죽었다. 지금 그곳엔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착량묘(鑿梁廟)가 세워져 있다.

일본인들은 조상들의 시체가 있던 곳 위를 지나갈 수 없다 해서 다리를 짓지 않고 해저터널을 만들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곳에 통영대교와 충무교가 있다.

원래 이름은 태합굴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가리키는 의미다. 문화재 당국이 터널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할 때엔 통영태합굴이라는 가칭을 썼다가 이름이 논란이 되어 결국 지금의 이름이 되었고 한다.

 

착량묘 /문화재청
착량묘 /문화재청

 

터널 공사는 우선 판대목(통영반도와 미륵도 사이의 좁은 해협) 양쪽에 방파제를 설치하고 바닷물의 유입을 차단했다. 그리고 방파제 공간에 거푸집의 설치와 콘크리트를 타설해 터널을 구축했다. 터널이 완성된 이후에는 다시 방파제를 철거하는 과정을 택하면서 매우 큰 위험을 감수해 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사망하거나 인명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구체적인 사고 내용조차 밝혀지지 않았다.

어쨌든 당시 기술로는 상상키 어려웠던 통영해저터널 공사가 완공되자 사람들은 배를 타고 건너던 길을 해저 육상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우마차와 차량의 통행이 가능해졌고, 물류 거래가 원활해졌다.

통영터널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터널이 노후되고 터널 안으로 바닷물이 스며들었다. 결국 충무교의 완공(1967)을 계기로 차량통행은 완전 금지됐다. 지금은 사람만 다닐 수 있는 관광자원으로 재탄생했다.

 

통영 해저터널 /문화재청
통영 해저터널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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