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에 저항한 베를린필 감독 푸르트뱅글러
나치에 저항한 베를린필 감독 푸르트뱅글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2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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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경례 거부, 유대인 구명, 오스트리아문화 보호…전범재판서 무죄 입증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는 나치 전범재판소에 섰다. 히틀러의 청년조직(유겐트)에 음악을 선사했고, 나치 전당대회에서 연주를 했다는 혐의였다. 그러나 그가 나치 치하에서 베를린 필 하모닉(Berlin Philharmonic)을 지휘하고 감독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들의 해외도피를 도왔고 나치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 1886~1954)25년간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베를린필을 지휘, 감독했다. 그의 첫 번째 지휘시기는 1923~1945년로, 나치 통치기(1933~1945)를 관통했다. 그로 인해 그는 곤욕을 치르다가 1952~1954년에 복귀해 베를린필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음반 녹음은 소련의 베를린 점령 당시에 고스란히 모스크바로 이송되었다가 후에 소련이 되돌려 주어 오늘날 우리에게 전해진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는 그를 자신들의 선전도구로 이용하려 했다. 베를린필은 독일국민들이 사랑하는 오케스트라였고, 푸르트뱅글러는 국민적 존경을 받고 있었다. 나치는 그를 앞세워 순수 아리이안의 음악적 재능을 내세우고 싶어했다.

1920년 푸르트뱅글러 /위키피디아
1920년 푸르트뱅글러 /위키피디아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와 나치를 싫어했다. 그는 나치를 거리의 부랑자라 비유하며, 독일 땅에서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도 했다. 그는 특히 나치가 유대인 음악가들을 독일에서 내쫓으려는데 반감을 가졌다. 히틀러가 집권한 1933년에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브루노 발터(Bruno Walter)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났다. 나치는 그 자리에 푸르트뱅글러를 임명하려 하자, 그는 거부했다.

그는 나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에게 편지를 썼다. “좋은 음악과 나쁜 음악 사이에는 경계가 있지만, 유대인과 비유대인으로 경계선을 긋는 잘못된 일이다. 음악 분야에서 유대인들은 매우 뛰어난 사람들이다.” 그는 유대인 음악가들을 거부한다면 자신은 모든 자리에서 물러 나겠다고도 했다.

푸르트뱅글러의 공개적 도전에 나치 수뇌부의 하인리히 힘러는 그를 강제수용소에 보내자고 했다. 그런데 또다른 나치 수뇌였던 괴벨스와 헤르만 괴링이 힘러를 만류하고 푸르트뱅글러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그 덕분에 나치 초기인 1933~34년에 유대인 또는 반나치주의자였던 예후디 메뉴인, 아르투르 슈나벨, 파블로 카잘스와 같은 솔로이스트들이 베를린필과 협연할 수 있었다.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들이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는 해외 연주를 할 때 모은 돈으로 유대인들과 망명자들을 도왔다. 그는 나치식 경례와 나치가 연주를 거부했다. 1937년 파리 박람회 때 찍은 사진에 그는 유일하게 나치 경례를 하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다. 그는 히틀러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하일 히틀러’(Heil Hitler)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나치는 위대한 음악가를 이용하기 위해 그를 제국음악가협회 부회장과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이라는 공직을 주었다. 그는 그 직함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 자리를 이용해 나치의 반인종정책을 수정하고 유대인을 돕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런 것이 후에 나치 부역죄라는 덫에 걸리게 된다.

나치 집권 초기에 그는 히틀러를 만나 음악 분야에서 반유대주의를 중지할 것을 요청했지만, 히틀러는 화를 냈다고 그의 유대인 여비서 베르타 가이스마르(Berta Geissmar)는 회고록에 전한다.

히틀러 집권 이듬해인 1934, 그는 공개적으로 히틀러는 인류의 적이라며 독일의 정치적 상황이 불행에 빠지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해 나치가 퇴폐음악가로 규정한 솔로이스트 파울 힌데미트(Paul Hindemith)를 초청해 연주회를 가졌다. 나치 인종차별 정책의 총책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는 모든 공직에서 그를 쫓아낼 것을 주장했지만, 괴링과 괴벨스가 그의 이용가치를 감안해 그대로 두었다.

푸르트뱅글러는 독일을 떠나 이민을 가려 했다. 나치는 그의 여권을 정지하고, 그의 음악 활동도 중단시켰다. 그가 활동을 중단하자 많은 사람들이 베를린필을 보이콧했다. 게슈타포들은 그와 여비서 기이스마르와의 관계를 추적했다. 유대인인 여비서는 영국으로 도망쳤다. 그는 자신의 발은 묶였지만 다른 유대인 음악가들의 독일 탈출을 지원했다.

 

푸르트뱅글러의 지휘 모습 /Warner Classics
푸르트뱅글러의 지휘 모습 /Warner Classics

 

1935228일 푸르트뱅글러와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가 만났다. 괴벨스는 그를 민족의 보물이라면서 독일에 남아 나치에 충성을 서약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거부했다. 괴벨스는 잔꾀를 냈다. 그렇다면 히틀러가 독일 문화정책의 책임자라는 것을 인정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이브한 이 음악가는 이를 받아들였다. 사실이니까. 히틀러는 독재자로 문화정책도 좌지우지하는 것은 분명하지 않는가. 두 사람 사이에 타협이 이뤄졌다. 푸르트뱅글러는 독일 국적을 유지하되, 그의 음악은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는다, 모든 공적 지위에서 사퇴한다는 내용이었다. 괴벨스는 바로 이 사실을 공표하면서 후자, 즉 그의 공직 사퇴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이데올로그 로젠베르크는 푸르트뱅글러가 나치에 굴복하지 않았다며 사과를 요구했지만, 괴벨스는 그가 독일을 떠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소기의 목표를 달성했다며 더 이상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다. 여권이 다시 발급되었고, 그는 베를린필에 복귀했다. 그가 다시 나타나자 사람들은 환호했다. 연주후 그의 이름이 열일곱 번이나 울려퍼졌다.

 

나치와의 협상이 끝난 직후인 193553, 콘서트 직전에 히틀러와 나치 고위 간부들이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다른 행사에서는 나치 경례를 거부한 그였지만, 히틀러 앞에서도 그래야 할지를 고민했다. 그때 매니저가 좋은 아이디어를 냈다. 히틀러가 입장할 때 오른쪽에 지휘봉을 잡고 연주를 지휘하라는 것이다. 그는 관례에 없는 일을 했다. 히틀러가 입장하자 두손을 번쩍 들어 연주를 시작했다. 히틀러는 눈치를 채지 못했다고 한다. 히틀러가 퇴장할 때에도 지휘봉을 들고 연주를 이끌면서 경례를 피했다.

 

1938년부터 나치는 도발의 본성을 드러냈다. 그해 3월에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합병했고, 119~10일 밤에 크라스탈나흐트(Kristallnacht)라 불리는 유대인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나치는 합병한 오스트리아의 문화를 제거하려 했다. 빈 필하모닉(Vienna Philharmonic)을 없애고 빈 오페라를 베를린 오페라의 산하에, 짤스부르크 음악제를 바이로이트 음악제 산하에 각각 두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음악인들이 푸르트뱅글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나치 지도부에 그들의 정책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그는 빈필과 베를린필의 협연을 나치 지도부들에게 하면서 오스트리아 음악의 고유성을 호소하기도 했다.

나치는 푸르트뱅글러의 호소를 역이용했다. 괴벨스는 19389월 뉘른베르크에서 열리는 나치 전당대회 전야제에서 연주해달라고 요청했다. 애매한 요구였다. 그토록 꺼려했던 나치 선전에 놀아나야 하는지의 고민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빈필과 빈 오페라의 수호를 위해 그 행사에 빈 관현악단을 이끌고 갔다. 그리고 카를 뵘을 빈필의 예술감독으로 지명해달라고 괴벨스에게 부탁했다. 그 덕분에 반()유대인과 비()아리아계 단원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빈필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독일에선 불가능한 일이었다.

 

2차 대전중에 그는 점령지 프랑스에서 연주해달라는 나치의 요구를 거부했다.

하지만 1942년 히틀러 생일은 피할수 없었다. 괴벨스는 그때 사진을 영상에 담아 선전용으로 활용했다. 나중에 확인된 일이지만,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생일에 연주하는 댓가로 몇 명의 유대인 음악가를 수용소에서 석방시킬 것을 괴벨스에게 요구해 관철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그후 히틀러 생일에 다른 음악회를 핑계대거나 병원 진단서를 떼 보내면서 피했다. 1944년 히틀러 생일에는 연주를 거절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점령지 체코 프라하에서 연주회를 하기도 했다. 또 노르웨이의 오슬로에서도 연주회를 했는데, 유대인 음악가를 탈출시키기 위한 연막술이었다.

2차 대전 막바지에 푸르트뱅글러는 히틀러 저격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 19447월 일부 장교들이 주동이 되어 동부전선을 방문하는 히틀러를 저격하려던 사건이 사전에 발각되었다. 주동자들은 푸르트뱅글러가 지휘하는 콘서트에 모여 음모를 했고, 그를 가담시키려 했다는 정황이 드러났지만, 구체적으로 그가 가담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연합군이 베를린을 폭격하자 히틀러는 군수장관 알베르트 스페어(Albert Speer)에게 푸르트뱅글러의 가족을 위해 방공호를 지어주라고 지시했다. 그는 그것을 거부했지만 방공호는 만들어졌다. 군수장관 스페어가 칮아왔다. 푸르트뱅글러는 스페에에게 독일이 전쟁에 이길 것 같은가라고 물었더니, 스페어는 승산이 없다며 스위스로 건너갈 것을 권유했다. 1945128일 그는 빈에서 빈필 공연을 마치고 스위스로 탈출했다. 몇시간후 게슈타포가 그를 체포하러 찾아왔으나 허탕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후 푸르트뱅글러는 나치전범재판소에서 회부되었다. 그의 부역행위를 가장 실랄하게 비판한 사람은 1929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 토마스 만(Thomas Mann)이었다. 그에게 씌워진 대표적인 부역행위는 193823일의 나치 청년단체 유겐트(Hitler Jugend)에서의 연주와 그해 95일 나치 전당대회 전야제 연주였다.

유겐트 연주는 그도 몰랐다고 소명되었다. 그는 독일 청년들에게 클래식 연주를 선물하려 했는데, 가보니 나치 간부들이 도열했고, 제복의 소년-소녀들이 집결해 있었다고 밝혔다. 나치가 그의 명성을 이용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두 번째 연주는 전당대회와 연주회는 별개의 행사였고, 그 연주를 통해 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유대인들이 그를 위해 진정서를 냈다. 어느 유대인은 내가 오늘 살이 있는 것은 그 위대한 음악가 때문이다. 푸르트뱅글러가 나치의 감시 속에서도 다수의 유대인을 보호했고, 용기를 주었다. 역사가 심판할 것이라.”고 썼다.

 

그는 변론에 나섰다.

독일은 극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나는 독일 음악을 책임지고 싶었다. 나의 임무는 이 위기에서 독일 음악을 살려내는 일이었다. 나의 관심은 나의 음악이 선전에 활용되는 것보다 독일 음악을 보호하는데 있었다. 독일 국민, 즉 바하와 베토벤, 모차르트, 슈베르트의 백성들은 전쟁에 광분하는 정권 치하에서도 살아야 했다. 토마스 만은 히틀러의 통치하에서 베토벤이 필요 있었느냐고 하지만, 그런 공포의 시기에서 자유와 사랑을 갈구하는 독일인들이 더 베토벤을 듣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가. 나는 그들 옆에 있었다는 사실로 후회하지 않는다.”

 

전범재판소는 1947년 그에게 무혐의를 인정했다. 그는 다시 지휘봉을 잡았고, 1952년 베를린필 상임지휘자로 복귀했다. 195410월까지도 음반 작업을 하던 중 폐렴으로 요양원에 입원했다가 얼마 후 68세의 생을 마쳤다.

 

푸르트뱅글러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푸르트뱅글러 /Deutsches Historisches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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