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 아시아 은(銀)의 전쟁
임진왜란과 아시아 은(銀)의 전쟁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23 18:1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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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제적 은 수입국…일본, 조선 은제련 기술 훔쳐가 전쟁 자금 조달

 

임진왜란은 1592년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1598년까지 7년간 한반도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은 조선과 일본, 중국의 명()나라가 한반도에서 치른 국제전쟁의 성격을 띠었다.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중국()을 치러 갈 터이니 길을 빌려달라”(征明假道)고 조선에 요구했고, 중국을 상국으로 받들던 조선은 이를 거절했다. 전쟁은 참혹했다. 선조 임금은 의주까지 피난했고, 전쟁 7년간 전국이 유린됐다.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기도 하지만, 경제와 무역 전쟁의 연장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의 경제적 측면에 관한 연구는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진행됐고,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면 임진왜란이 발발한 동북아의 경제적 변동을 살펴보기로 하자.

 

 

유럽의 신대륙 발견()의 국제교역화

 

중국이라는 구대륙과 스페인이 개척한 아메리카 신대륙을 짧은 기간에 대량의 무역겨래로 연결한 매개체는 은()이라는 상품이었다.

()은 당시 국제적으로 기축통화였으며, 중국 명나라에선 때마침 납세의 기준이 되었다.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국부론>에서 은의 글로벌 무역이 무서운 힘으로 전파된데 놀라움을 표시하면서 구대륙의 중국과 신대륙의 남미가 하나의 상품으로 연결되는 방식에 관심 있게 관찰했다.

 

15세기말~16세기초는 유럽의 신대륙 탐험기였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황금과 향료가 가득한 인도와 지팡구(일본)를 찾아나서다 아메리카를 발견했다. 페르디난드 마젤란은 세계일주를 하던중 1521년 필리핀 섬에 도착했다.

스페인의 아메리카 식민지와 중국 사이에 교역로가 열리게 된 계기는 1565년 안드레스 데 우르다네타(Andrés de Urdaneta)라는 탐험가 덕분이다. 그는 스페인의 필리핀 총독으로부터 멕시코로 되돌아가는 길을 찾으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그동안 스페인은 마젤란과 그 일행이 그린 항해로를 따라 아메리카에서 필리핀으로 가는 길은 알고 있었지만, 멕시코로 돌아가는 길은 모르고 있었다.

우루다네타는 태평양에도 대서양과 마친가지로 무역풍이 고리를 형성하고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는 북위 38°까지 북동쪽으로 가서 거기에서 동쪽으로 진로를 택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그는 지금의 캘리포니아에 도착했다.

우르타네타가 필리핀에서 멕시코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함에 따라 필리핀~멕시코 사이의 교역로를 형성되었다. 여기에 멕시코에서 본국 스페인을 연결하는 무역로를 연결함으로써 스페인은 포르투갈과는 반대편 방향에서 아시아 교역로를 개척하게 되었다.

스페인은 은() 거래에 참여했다. 스페인은 남미 포토시(Potosi, 볼리비아) 등지에서 생산된 은을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팔았다.

 

1565년 우르다네타가 발견한 마닐라~아카풀코 항로 /위키피디아
1565년 우르다네타가 발견한 마닐라~아카풀코 항로 /위키피디아

 

 

스페인의 삼각무역

 

스페인은 중국과의 은 거래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스페인은 1571년 필리핀 루손섬을 점령하고 마닐라를 건설해 동아시아 중국, 일본과의 무역 거점으로 삼았다. 스페인은 은 거래에 참여했다. 스페인은 남미 포토시에서 생산된 은을 태평양을 건너 중국에 팔았다. 스페인은 중국과의 은 거래에서 엄청난 이득을 보았다. 16세기 후반에 중국이 수입한 은의 절반은 스페인, 나머지 절반은 일본에서 온 것으로 추정된다.

서양에서는 오랫동안 금과 은이 112.5의 교환비율로 거래됐다. 그들은 금과 은의 교환비율을 천문학에서 찾았다. 그들에겐 금은 태양이요, 은은 달이었다. 수메르 천문학에선 1년에 달이 태양을 도는 비율을 112.5로 계산했다. 112.5의 비율을 금과 은의 교환비율로 정했다. 수메르인의 전통은 로마제국에도 이어져 금과 은의 비율이 112.5 또는 113을 유지했다.

이에 비해 중국에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6이었다. 중국에서 은 값이 비싼 것은 세금을 은으로 받아 은의 수요가 컸던 탓도 있었다. 명나라는 북방(몽골)과 끊임 없이 전쟁을 치렀기 때문에 국내산으로는 은이 절대적으로 모자라 해외에서 수입이 절실했다.

 

여기서 엄청난 이문이 발생한다. , 유럽인들이 일본 또는 남미 볼리비아에서 생산된 은을 가져와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면 100%의 환차익을 얻게 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상인들은 해외에서 싼 은을 구해 중국에서 금으로 교환하고, 그 금으로 일본에서 은으로 바꾸고, 인도에서 면직, 말레카에서 후추를 사서 유럽으로 가져가면 엄청난 무역차액을 얻었다. 이른바 재정거래(arbitrage)에 의한 삼각무역이다.

동아시아 무역은 일본 왜구와 중국 사이의 밀무역, 새롭게 진출하는 스페인, 포르투갈 등 유럽인들의 삼각무역이 경합하며 급성장했다.

중국의 최대 수출품은 생사(生絲)였다. 생사(raw silk)는 누에고치에서 뽑아낸, 가공하지 않은 실을 말한다. 생사는 주로 농민들의 부업에서 생산됐고, 최대생산지는 양쯔강(長江) 이남의 강남 델타지역이었다. 그 지역에서 생산된 생사를 호사(湖絲)라고 불리며 수출됐다. 생사산업은 벼농사와 비교하면 높은 수입을 얻을수 있었다. 또 많은 토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따라서 가난한 중국 농민들은 생사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전세계 은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갔다. 중국 명나라는 당시 가장 부유한 문명국이었다. 중국인들은 서양에서 가져온 물건에 큰 관심이 없었고, 대신에 유럽인들은 중국의 비단, 도자기에 탐을 냈다. 이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선 은을 가져와야 했다. 스페인이 해외(남미)에서 개발한 은의 절반이 중국으로 들어갔다. 이 와중에 유럽인들은 국내외 환차익을 활용한 투기적 행태를 보이며 무역이득을 챙겼다.

스페인은 아시아 무역거래를 통해 엄청난 부를 독식했다. 이들의 거래방식은 삼각무역이었다.

일본에서 은을 가져다 중국에서 금과 교환하고, 비단과 원사를 샀다. 중국에선 금과 은의 교환비율이 16이었고, 일본에선 112였다.

당시 명나라는 일본에 대해 해금(海禁)정책을 취했기 때문에 스페인 무역상은 일본에서 은을 사서 중국에서 금과 바꾸고, 중국 비단과 원사를 가져와 일본에 팔면서 막대한 이득을 남겼다. 이른바 재정거래였다. 일본의 은이 대량으로 중국으로 흘러나가 일본에선 은이 고갈상태에 놓였다.

 

16세기 무역로  /위키피디아
16세기 무역로 /위키피디아

 

 

명나라의 일조편법

 

() 조정은 몽골()을 북쪽 고비사막으로 내쫓고 중원을 차지한후 내내 북로남왜(北虜南倭)에 시달렸다. 명은 북방 몽골과 동남 해안의 왜구는 늘 골칫거리였는데,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 중반에 절정을 이뤘다.

한족에 쫓겨난 몽골족은 분열을 거듭하다 16세기초 징기스칸의 직계 자손임을 내세운 알탄 칸에 의해 새롭게 세력을 키우면서 명을 위협했다. 명나라는 다시 전쟁준비를 했고, 백성들에게 병역의 의무를 지우고, 세금을 걷었다. 관리의 착취도 심했다. 군수물자 징발을 피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가난한 한족들이 북쪽 몽골지역으로 넘어가는 일이 빈번했다. 알탄은 이들에게 토지를 주고 판승(板升)이라는 도시를 건설해 주었다.

1550년 알탄의 군대가 한족 이탈주민의 길안내를 받아 베이징을 8일간 포위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베이징의 명군은 몽골의 방화와 약탈을 수수방관할 수밖에 없었다.

 

북로의 침공에 명의 군사비가 급증했다. 명은 초기에 토지세를 쌀 또는 보리로 받았는데, 세액의 불공평과 세리의 부정이 심해 세수확보가 어려워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이에 명은 1560~70년대에 부역과 조세, 잡세등을 일원화해 납세자의 토지소유 면적과 납세자수(丁口) 수에 따라 세액을 결정하며, 모두 은()으로 납부하게 했다.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는 개혁세법은 명나라 경제를 은본위제로 전환시켰다.

세금납부를 은으로 하면서 세수는 증대됐다. 하지만 몽골과 전쟁을 치르면서 은이 대량으로 북방으로 흘러 들어갔다. 국내에 심각한 은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 세금을 내려고 해도 은을 구하지 못해 체납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명나라 초기엔 절강(浙江)성과 복건(福建)성을 중심으로 연간 100만량 이상의 은이 채굴됐다. 하지만 은 매장량에는 한계가 있고, 채굴할수록 은 생산량은 줄어들었다. 국내산 은만으로는 유통량을 따라잡기 어려웠다. 해외에서 생산된 은이 필요했다.

 

명나라 말기 세출세입 추이
명나라 말기 세출세입 추이

 

 

조선의 은제련 기술 훔쳐간 일본

 

조선에는 대규모 은광이 있었다. 함경도 단천(端川)이다.

조선은 초기부터 금·은등 귀금속 채굴에 힘을 기울였다. 1398(태조7) 군인들을 동원해 단천에서 금을 채굴했고, 경상도 안동, 황해도 등지에서 금과 은의 채굴을 시험해 보았지만, 단천 이외에는 경제성이 없었다.

태종은 1407년에 은의 채굴을 중지했는데, 그 이유는 은 채굴기술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실록은 적었다. 하지만 명나라가 금과 은을 조공품으로 바치라는 압력이 거세 이를 거절키 위한 것이 주된 이유로 파악된다.

그후 1503(연산군 9) 상민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에 의해 연은분리법(회취법)이 개발됐다. 이에 단천은 은산지로 변모했고, 영흥등지의 납 산지에서도 은을 제련할수 있게 됐다. 하지만 조선 정부가 명나라 사신들에게 면포를 선물하면, 사신들은 평안도를 지나면서 은으로 바꿔 귀국하는 일이 빈발했다. 조선정부는 사신들을 통해 조선에서 은이 난다는 소문이 명나라에 전해지면 조공품으로 달라고 할 것을 두려워 중종때(1516) 다시 단천은광을 폐쇄했다. 이후 일본이 오히려 조선에서 개발된 회취법으로 은을 대량생산하게 됐고, 조선은 일본에서 은을 들여오는 사태가 빚어졌다.

당시 세계 기축통화는 은이었고, 중국에선 세금을 은으로 걷었다. 그런 시기에 조선에서 개발한 기술로 은을 대량 생산했더라면 무역을 통해 많은 이문을 남겼지 않을까. 당시 조선 왕조는 은을 대량 생산하면 중국에 뺏긴다고 생각해 은 생산을 쉬쉬하고 광산을 폐쇄했다.

 

조선왕조실록연산군일기(1503)에 이런 기사가 나온다.

양인 김감불(金甘佛)과 장례원 노비 김검동(金儉同)이 납으로 은을 불려 바치며 아뢰기를, “납 한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수 있는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남비 안에서 매운 재를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애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아뢰니, “시험해 보라고 하였다.(연산 9518)

당시로선 첨단 은제련술인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 조선에서 개발돼 활용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이 기술은 회취법(灰吹法)이라고 불렸다. 조선에서 개발된 기술은 정작 일본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당시 조선을 드나들었던 왜상(倭商)들이 이 기술을 절도한 것이다. 현대로 치면 기술 유출인 셈이다.

조선의 은 제련술이 건너가기 이전에 일본의 제련기술은 원시적인 수준이었다. 채굴한 은광석을 쌓아놓고 닷새 이상 나무를 때서 가열시킨후 남은 재에서 은을 추출하는 수준이었다. 제련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동력에 비해 경제성이 신통치 않았다.

 

16세기 전반에만 해도 일본에서 은광석을 배에 싣고 조선에 가져와서 제련했다. 그러다가 조선에서 개발된 세계최초 첨단기법이 전해져 일본을 경제대국의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이다.

여기에 조선인도 한몫했다. 조선왕조실록중종실록(1539)에 이런 기록이 나온다.

(전라도 전주판관) 유서종이 왜놈(倭奴)과 사사로이 통해서 연철(鉛鐵)을 많이 사다가 자기 집에서 불려 은()으로 만드는가 하면, 왜놈에게 그 방법을 전습하였으니, 그 죄가 막중합니다. 철저히 조사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소서.(중종 34810)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일본인들이 조선의 은제련술을 훔쳐간 것은 1530년대초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조선에 은광석을 가져와 제련하면서 조선의 제련법을 훔쳐갔고, 유서종이 이를 방치한 것이다.

조선에서 개발된 회취법은 당대 유럽의 은제련법보다 획기적이었다. 스페인이 볼리비아 포토시에서 사용했던 은정제법은 수은아말감 공법이었다. 이 방법으로 대량의 은을 제련하면서 수은가스 중독으로 인디오 800만명이 희생됐다. 하지만 일본은 조선의 기술을 훔쳐감으로써 인명 피해도 줄이고, 세계적인 은 생산국으로 부상했다.

 

회취법 제련 방법 /일본 유노오쿠 金山博物館
회취법 제련 방법 /일본 유노오쿠 金山博物館

 

 

일본의 은 생산 확대

 

14세기초(1308~1310)에 일본 혼슈의 시마네(島根)현에 은이 발견됐다는 기록이 있다. 이 일대의 은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16세기초다. 1526년 하카다(博多:후쿠오카)의 상인 가미야 히사사다가 이 일대를 지나다가 바다에서 산이 빨갛게 빛나는 것을 보고 뱃사람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것은 긴뿌산(銀峰山)인데, 옛날에 은이 나왔던 곳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 상인은 광부들을 데리고 와 산허리에서 은을 채굴했다.

이렇게 시작된 이와미(石見) 은광은 수십년후 동아시아를 뒤흔들었다. 이와미 은광에서 생산된 은은 중국에 건너가 대량으로 유통됐고, 조선에서도 거래됐다. 이 은광을 놓고 일본 군웅들이 각축전을 벌였고, 이 곳을 장악한 세력이 일본을 통일했다.

처음에 은광이 발견됐을 때 은광석에 다량의 납이 함유돼 있었다. 은 광석은 풍부했지만, 제련하는 기술이 후진적이어서 생산량이 늘지 않았다. 이때 조선에서 개발된 은 제련법이 일본에 건너왔다.

 

조선에서 회취법이 도입되면서 이와미 은광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일본 전역에서 은광 개발 붐이 일어났다. 전국의 다이묘들은 은광산 개발에 열중했다. 16세기 중반 일본은 남미 은광을 소유하고 있는 스페인에 이어 세계 2위 은생산국으로 등장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6세기말, 이와미 광산을 비롯, 일본산 은은 전세계에서 생산된 은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당시 은은 국제통화였고, 중국에선 은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무역도시 하카다의 상인이 개발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에 이와미 은광은 동아시아 교역의 중심에 섰다. 이익이 발생하는 곳엔 분쟁이 발생한다. 때는 강한자가 약한자를 잡아먹던 전국(戰國)시대였다. 처음엔 영주였던 오우치 가문이 이 광산의 운영권을 가졌지만, 곧이어 소영주 오가사와라 가문이 은광을 탈취했다. 다시 오우치 가문이 뺐는데 3년이 걸렸다. 오우치 가문은 은광 주변에 성을 요새화했다. 1537년엔 이즈모의 아마고 가문이 이와미를 공격해 은광을 빼앗았다. 2년후 오우치 가문이 탈환했지만, 다시 아마고 가문에게 빼앗겼다. 은광을 둘러싸고 두 가문의 쟁탈전을 계속됐다.

최종 승리자는 오우치 가문을 계승한 모리가문. 1584년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속한다. 이와미 은광은 모리가문과 도요토미 가문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고, 임진왜란의 군자금은 이 곳에서 충당되었다.

 

은광을 소유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손잡고 중국, 조선등 해외 여러나라와 무역을 했고, 수입품에는 조총도 포함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일본이 중국에 은을 팔아 이문을 남긴다는 기록이 있다. 중종실록(1541)에는 지금 왜인들이 중국의 남쪽 지방에 은을 팔면 이윤이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은을 사간다고 합니다라는 기사가 있다.(중종 361124) 일본 상인들은 일본에서 생산된 은은 물론 조선의 은도 가져가 중국에 비싼 값으로 팔았던 것이다.

중국사에서 이들은 왜구로 불렸다. 도요토미가 일본을 통일하기 직전, 지방에서 독자적으로 운영되던 왜구들은 중국 님부 절강·복건성 등지의 호족들과 손잡고 은을 거래했고, 때로는 폭력적인 방법(왜란)으로 밀무역을 감행했다. 왜구들도 중국과 일본 사이의 환차익을 알았다. 중국에서의 금·은의 교화비율(16)과 국제적 환율(112) 사이에 차이가 발생했고, 일본상인들은 조선의 은도 가져가 환차익을 챙겼던 것이다.

 

일본 이와미 광산 /위키피디아
일본 이와미 광산 /위키피디아

 

 

왜구의 은 거래

 

중국은 막대한 은 수요를 스페인령 아메리카와 일본에서 채워나갔다.

여기서 왜구라는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명나라를 괴롭힌 남왜(南倭), 즉 왜구(倭寇)에는 상당수 중국인이 포함돼 있었다. 왕직(王直), 이광두(李光頭), 허동(許棟)등은 중국인으로, 유명한 왜구의 두목이다. 특히 왕직은 휘주(徽州)사람으로 일찍이 중국의 금법(海禁令)에 걸리기보다 차라리 해외에서 마음껏 날개를 펴는게 낫지 않겠는가라며 광동(廣東)으로 가서 큰 선박을 건조해 유황이나 생사를 싣고 일본이나 샴(태국), 동남아 등지에서 무역을 일으켜 5~6년만에 큰 부를 모았다. 그는 한족 도망자들을 모으고 일본 하카다(博多) 상인들을 끌어들여 대규모 해적단을 이끌었다. 이민족들은 그를 오봉선주(五峯船主)라고 불렀고, 스스로를 휘왕(徽王)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밀무역에 종사했다. 왕직은 주로 일본과 중국사이의 중계무역에서 이익을 얻었다. 이들은 중국에서 생사(비단의 원료)와 견직물, 면포, 비단, 수은, 도자기, 동전, 서적, 약재등을 구해 일본에 팔았다. 이런 물건은 당시 일본 영주들이 선망하던 물품이었다. 해적 밀수단은 몇배 또는 몇십배의 가격으로 물건을 팔았고, 그 대가로 일본에서 은을 받았다.

 

왜구는 16세기 중엽에 중국 동남부 해안을 겁탈했다. 명 조정은 중국인 왕직을 간계로 유인해 처형하고 해금령을 강화했다. 하지만 중국 해상세력과 연계한 왜구는 중국 남부 해안을 유린했다. 명나라는 유명한 척계광(戚繼光) 장군의 활약에 힘입어 왜구 침탈을 거의 제압한다. 이후 명은 다시 유화정책으로 전환해 1567년 이후 해금령을 완화해 민간의 해상무역을 허락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시기에 북방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알탄의 손자 바한나기가 돌연 명 왕조에 항복해왔다. 명 조정은 몽골에 도망간 한족들을 돌려달라고 요구했다. 이에 몽골은 한족을 보내주는 대신에 화의를 맺고 조공무역을 허가받았다. 1550년에 최고조에 달했던 북로남왜의 위기는 1570년 무렵에 가까스로 수습된다. 임진왜란 20년전이다.

 

()의 흐름을 중심으로 보면, 북과 남의 위협이 비슷한 시기에 해결되는 것은 우연이라고 보기 어렵다. 북방의 긴장은 명나라에겐 사활이 걸린 문제다. 북방의 긴장이 고조되면 북방으로 가는 은의 흐름이 급속하게 빨라진다. 은 부족이 심해지고, 밀무역의 모험에서 나오는 이문도 높아진다. 이윤은 위험을 무릅쓴다. 위험도가 높으면 수익이 높고, 목숨 값을 치르더라도 이윤을 추구하는 부류가 생긴다. 북로의 위협이 증대되면 은의 밀무역이 성행하고 남왜의 저항계수가 높아진다. 왜구의 폭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거꾸로 북로의 위협이 약해지면 은의 부족이 완화되고 밀무역에 의한 은수요가 줄어든다. 왜구의 밀무역도 급감하게 된다.

1570년 이후 중국과 일본의 민간무역이 재개되면서 밀무역은 급감하지만 정상적인 거래를 통한 은 거래는 활성화된다. 이 무렵 일본에서 중국으로 흘러들어가는 은의 양이 급증한다. 스페인이 안데스 지역 포토시(Potosi) 은광 등을 개발해 은을 대량으로 생산하게 되는데, 신대륙의 은은 1557년 마카오 점령이 허락된 포르투갈 상인과 1571년 마닐라를 건설한 스페인 상인에 의해 대량으로 중국에 유입됐다. ()은 국제적으로 기축통화였으며, 중국에선 납세의 기초였다.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은 블랙홀 같이 세계의 은을 흡수했다.

일본 역사학자 고바타 아츠시(小葉田淳)등의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후반 중국으로 유입된 은은 2,100~2,300톤에 이르는데, 그중 일본산 은이 1,200~1,300톤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됐다. 임란 직후인 17세기 전반에는 중국의 해외은도입량이 더 늘어 5,000톤에 이르렀는데, 절반 가까운 2,400톤이 일본산 은으로 추정된다.

왜구는 1557년 중국인 우두머리 왕직이 체포돼 살해된데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본을 통일하면서 급속하게 쇠퇴한다. 도요토미는 중국과의 밀무역에서 얻어진 막대한 수익에 눈을 돌린다. 그는 다이묘 휘하에서 전개되던 밀무역을 쇼군 휘하로 이전할 것을 꾀한다.

 

이에 도요토미는 1588년 해적단속령을 발포했다. 동시에 명나라에 정상적인 공무역을 제의한다. 명은 왜구의 도발이 재연될 것을 두려워 도요토미의 제의를 거부한다. 도요토미는 류큐등 해양을 통해 중국 남방을 직접 압박할 것인지, 조선에 길을 빌려달라고 요구할 것인지를 고민하게 된다.

 

이와미은광에서 생산된 은의 수출도 /김현민
이와미은광에서 생산된 은의 수출도 /김현민

 

 

도요토미의 해적 금지령

 

도요토미는 부유한 상인을 부하로 두었다. 전쟁에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도요토미는 당시 긴키(近畿) 지방 최대무역항인 사카이(오사카)를 차지한데 이어 대륙의 출입구인 하카다를 점령했다. 그리고 내린 조치가 해적행위 금지령이었다.

임진왜란 4년전인 1588,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열도 통일을 눈앞에 두고 해상 사무라이집단에 대해 해적정지령(海賊停止令)을 내렸다. 당시 해적(왜구)은 해안지역에서 호족 성격을 띠었다. 다이묘들이 해적들에게 해상영지를 주었고, 이들은 밀무역에 종사하거나, 조선과 중국의 해안지역과 상선을 약탈하기도 했다.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권력이 분산될 때 해적집단은 정치적으로 독립하기도 했다.

 

도요토미의 해적행위 금지령으로 전국의 해적들은 도요토미 정권에 복속되거나 무장을 해제하고 일반 백성으로 전환되거나 둘중 하나의 선택을 강요받았다. 이 조치로 왜구는 사라진다. 도요토미가 중국과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의 침략행위를 중단시키기 위해 자애를 베푼 것은 아니었다. 그는 독립적이었던 왜구의 무역권을 장악하고, 그 전력을 정규 수군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도요토미는 조선과 중국에 무역을 요구했다. 하지만 중국은 해금정책을 풀지 않았고, 조선도 삼포왜란 이후 일본과의 거래를 중단했다. 이에 도요토미는 망상적 판단을 내린다. 1591년 도요토미는 겐소(玄蘇)등의 사신을 조선에 보내 명나라를 치는데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한다. 조선으로선 들어줄수 없는 요구였다.

조선을 침략한 직후 도요토미가 관백(關白)인 히데츠구(秀次)에게 보낸 문서에서 천하 계획을 밝힌다.

명의 수도 베이징에 천황을 옮겨 수도로 삼고, 수도 근처의 10개국을 직할지로 진상하고, 귀족들에겐 토지세 징수를 열배 증가시킨다. 히데츠구를 명의 관백으로 삼아 수도근처의 100여개 나라를 준다. 나는 닝보(寧波)를 거소(居所)로 하며, 조선의 수도에는 이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나 누구를 이주시키고, 조선 국왕은 체포해 일본에 끌고 온다.”

도요토미는 조선과 명, 류큐, 고산국(대만) 필리핀(스페인령), 인도(포르투갈령)에 외교문서를 보내 일본은 통일되었고, 천하와 이역(異域)의 통일은 천명이며, 따라서 명나라를 친다고 적었다.

당시 그의 생각은 과대망상이었다. 하지만 300년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그의 망상을 실천한다.

 

대왜구진출도 /위키피디아
대왜구진출도 /위키피디아

 

 

일본, 은으로 전쟁 비용 마련

 

가토 기요마사(加籐淸正). 그는 도요토미의 가신으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함께 조선 침공에서 선봉경쟁을 벌였던 무장이다. 그는 일본 규슈의 히고(肥後, 구마모토)의 영주였다. 그는 도요토미로부터 조선침공 준비를 하라는 명을 받고 전비를 마련했다.

그의 전비 마련 과정을 보자. 구마모토(熊本) 근처에는 무역항인 나가사키(長崎)가 있는데, 그곳을 통해 필리핀 루손섬과 거래했다.

일본학자 나카지마 가쿠쇼(中島樂章)에 따르면 그 당시 가장 값나가는 교역품은 은()이었다. 가토는 조선침공 직전인 1591년에 은과 밀 20만근(120)을 나가사키에다 팔라고 지시한다. 그는 영지에서 고율의 세금을 걷었고, 그렇게 해서 조달된 은과 밀을 필리핀 루손섬에 가져가서 조총과 실탄, 화약을 구해오도록 했다. 루손섬은 스페인령이었다. 당시 루손섬에 거주하던 스페인인들은 밀을 구하기 어려웠다. 중국에서도 식량난으로 밀이 부족했다. 루손섬에 수출된 가토 영지의 은과 밀은 루손섬에서 소화되거나 중국에 재수출됐다.

명나라가 1560년대에 중국 남해안에 민간무역을 허용한후, 복건성 상인들은 아시아 해역에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하지만 명은 왜구에 대한 두려움으로 일본과의 거래를 제한했다. 그럼에도 일부 복건성 상인들은 규수 일대에서 왜구와 밀무역을 했다.

1571년 포르투갈이 마카오와 나가사키 사이에 중계무역을 시작했다. 동시에 복건성 상인들은 명 조정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규수로 건너가 일본 은을 수입해 명 조정에 팔았다. 복건성 상인들은 필리핀 루손섬도 방문했다. 그들은 규슈, 루손섬을 잇는 삼각 무역에 종사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무역상들은 합법적인 교역을 했지만, 복건성 상인들은 밀무역에 종사했다.

이런 상황에서 규슈 일본상인들이 가토의 지시로 해외무역 주자로 나타난다. 임란 직전인 1590년대 루손-규슈 무역이 증가했다. 일본은 은을 수출하고 필리핀에서 금과 중국산 생사를 수입했다. 남미산 은 도입이 급증하면서 일본의 루손 수출품은 은에서 밀과 같은 소비재로 바뀌었다. 가토는 은과 밀을 팔아 루손섬의 스페인 상인으로부터 조총과 실탄제조용 납, 화약등을 대량 구매했다. 왜의 선봉장 가토에게는 은이 곧 무기였다.

 

구마모토성  /위키피디아
구마모토성 /위키피디아

 

 

도요토미의 야욕

 

원말(元末,) 명초(明初) 왜구는 중국의 해변과 강남(江南)에서 노략질했고, 16세기 후반에 이르러 타이완에 진출했다. 그들은 중국 해안과 동아시아 섬들을 거점으로 폭럭적인 방법으로 해상 교역을 추진했다. 그 무렵 포르투갈은 인도를 거점으로 서쪽에서, 스페인은 남미를 거쳐 동쪽으로 진출해 동아시아에서 만났다. 서양 세력은 왜구와도 부딛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사고는 왜구적 경험에 이베리아 국가들의 세계관을 받아들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동양에 진출한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해양거점을 기반으로, 육지를 포위하고 교역하는 전략을 취했다. 이에 비해 대륙국가인 중국은 육지에서만 지배력을 형성하고, 해양을 포기함(해금령)으로써 해양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다.

 

명사(明史)외국전에는 토요토미가 1586년에 “66()를 정복하고, 류큐(琉球, 오키나와)와 루송(呂宋, 필리핀 루손섬), 셴루오(暹羅, ·태국), 포랑지(佛郞機, 포루투갈과 스페인령)등 여러나라를 위협하여 공물을 바치게 했다. 그리고 연호를 분로쿠(文祿.)로 고치고, 중국을 침략하고 조선을 멸망시켜 점유하려 했다. 예전의 왕직(汪直. 중국 남해안의 무역상)의 잔당을 불러 (중략) 그의 기세가 더욱 교만해졌다.”고 기록돼 있다.

도요토미가 류큐에서 필리핀, 중국 남해안을 거쳐 멀리는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해상의 조공을 받으려 한 점, 베이징이 아닌 닝보(寧波)에 쇼군의 주둔지로 계획한 점 등에 비추어 해상거점을 통한 동아시아 지배를 꿈꿨다. 이를 기반으로 대륙세력인 중국()과 충돌했다.

명나라도 도요토미의 목표가 중국임을 알고 있었다. 도요토미에게는 조선을 거쳐 베이징으로 침공하는 방법, 16세기 중엽 왜구 침공로를 따라 절강·복건성등 중국 남해안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도요토미는 조선을 거치는 방법을 선택했다. 아마도 대규모 육군과 전쟁 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지정학적인 문제를 고려한 것 같다.

조선 침공에 앞서 도요토미는 류큐 국왕을 위협해 칭신납공(稱臣納貢)을 요구하고, 스페인이 점령하고 있던 필리핀에 세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내 위협했다. 아울러 200여척의 배로 펑후(澎湖)와 타이완을 공격하도록 준비했는데, 명이 펑후에 방어망을 구축했기 때문에 좌절됐다. 일단 해상세력의 위협을 가라앉힌후 조선을 거쳐 육로로 명을 공격키로 한 것이다.

15924700여척의 왜선이 대마도에서 바다를 덥쳐 부산포를 침입했다. 부산 첨사 정발(鄭撥)은 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했고, 동래부에서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했다.

 

왜구 진출도와 교역로
왜구 진출도와 교역로

 

 

단천을 공격한 왜군

 

가토는 조선의 은 냄새를 맡은 것 같다. 일본 무역상들이 조선과 거래하면서 조선의 은 제련기술을 훔쳐가고, 중국 사신들이 선물로 준 비단과 포목을 은으로 바꿔 갔다는 소문을 당시 동아시아 무역을 쥐고 있던 중국상인과 왜상을 통해 들었을 것이다.

가토는 동쪽 공격로를 맡았다. 고니시 군이 평양에서 명군에게 발이 묶여 있을 때 가토군은 철령을 넘어 함경도로 달려갔다. 잉카제국을 무너뜨린 스페인 군인들이 원주민에게서 황금의 나라 엘도라도’(El Dorado)의 소문을 듣고 남미 끝까지 뒤진 결과, 볼리비이에서 포토시라는 은광을 찾아냈다. 가토도 조선의 은광을 향해 달음질쳤다. 그는 단천의 소덕(蔬德)에서 은을 캐서 도요토미에게 진헌하고, 은광을 개발해 전비에 보태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

하지만 가토의 단천 점령은 짧게 끝났다. 정문부등의 의병들이 일어서고, 명군이 빠르게 남하하자 가토군은 단천 은광을 활용할 틈도 없이 남하했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명나라 군대는 조선 왕조에 주둔비로 은을 요구했다. 명나라는 앞서 몽골과의 전쟁에서 은을 유통시켰는데, 조선에서도 군수물자를 은과 교환하고자 했다. 이에 전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 선조임금은 비변사의 청에 따라 단천 은광 채굴을 허락했다.

해양국가 일본은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 패하고, 오히려 육상전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한니발에 비견된다. 왜군은 대부분의 육상전에서 승리하면서 한반도 지역을 휩쓸었다. 하지만 그들은 끝내 이기지 못했다. 왜군이 한 일이란 살육과 파괴 말고는 없었다. 그들은 조선인을 대량으로 끌고 갔다. 그들 속에는 도공(陶工)도 있었다.

 

임진왜란 전개도
임진왜란 전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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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rendipity 2021-01-22 09:56:15
공부가 많이 되는 기사입니다. 다른 연관된 내용을 더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