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르트뱅글러가 나치 치하에서 살았다는 것
푸르트뱅글러가 나치 치하에서 살았다는 것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24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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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감시받고, 해외에선 견제당하고…종전후 재판정에 서고 거부당하고

 

독재 치하에서 지식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철저히 저항하는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시키는대로 하면 살아는 남는데, 민주화될 경우 독재의 주구 또는 부역자로 몰린다. 그 사이에 중간은 없을까. 조금 양보하면서 지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바뀌면 중간은 없다. 그런 사람도 체제가 바뀌거나 다른 곳에선 비난받기 십상이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Wilhelm Furtwängler)1933~1945년 나치 집권 기간에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을 감독하고 지휘했다. 그는 아돌프 히틀러를 싫어했고, 나치를 거부했다. 하지만 그는 나치 전 기간 동안에 베를린필을 운영하면서 일부분에서 타협을 해야 했다. 히틀러의 생일에 연주를 했고, 점령지 프라하에 오케스트라를 끌고 갔다. 나치 전당대회 전야제에서도 공연을 했다.

그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강제수용소에 끌려간 유대인들을 석방시켰고 말살 위기에 처한 오스트리아 음악과 문화를 유지했다.

차라리 망명을 했으면 별일 없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베토벤과 모차르트, 슈베르트, 바하를 사랑하는 사람에게 그들의 음악을 들려주기 위해 독일에 남았다. 그 대가는 컸다.

 

푸르트뱅글러는 늘 감시의 대상이었다. 19359월 오스카르 욜리(Oskar Jölli)라는 바리톤 가수는 푸르트뱅글러가 나치 권력자들을 쏴 죽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은 변할수 없다.”고 말했다고 게슈타포에 신고했다. 그 보고에 나치는 그에게 활동정지 명령을 내렸다.

그 직후 그는 뉴욕 필하모니의 지휘자 자리를 요청받았다. 뉴욕필은 보수도 넉넉했고, 베를린필과 우열을 가리는 국제적인 오케스트라였다. 뉴욕필의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는 푸르트뱅글러가 지신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푸르트뱅글러는 뉴욕필의 제의를 수락했다.

하지만 게슈타포가 전화를 도청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치 수괴 헤르만 괴링이 이 정보를 활용해 AP 통신에 흘렸다. AP는 푸르트뱅글러가 나치 베를린 국립오페라와 베를린필의 총감독에 다시 지명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뉴욕필이 발칵 뒤집혔다. 그는 나치의 앞잡이인 것처럼 인식되었다. 그에 대한 제안은 취소되었다. 푸르트뱅글러는 베를린 오페라 자리를 거부했다.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위키피디아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위키피디아

 

히틀러는 리하르트 바그너의 열성팬이었고, 소년시절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에 푹 빠졌다. 히틀러는 바그너 음악이 독일인의 자긍심을 고취시킬 것이라 생각해 1936년 바그너 고향에서 열리는 바이로이트 음악제(Bayreuth festival)를 대대적으로 지원했다. 이 음악제는 히틀러의 열광적 팬인 바그너의 며느리 비니프레트가 운영하고 있었다.

나치는 이 음악제를 정권의 홍보용으로 활용하기 위해 푸르트뱅글러를 초대했다. 비니프레트의 집에서 히틀러와 푸르트뱅글러가 만났다. 히틀러는 푸르트뱅글러에게 제3제국 독일의 선전을 위해 일해 달라고 요구했다. 푸르트뱅글러는 거절했다. 히틀러는 얼굴이 벌개지며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강제수용소에 처넣겠다고 협박했다. 푸르트뱅글러는 총리님, 그렇게 하시면 되겠군요라며 대꾸했다고 나치를 싫어한 바그너의 손녀딸 프리데릴트가 전한다.

 

음악제는 모차르트의 고향에서 열리는 짤스부르크 음악제(Salzburg Festival)가 더 유명했다. 짤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 푸르트뱅글러는 1937년 짤스부르크 음악제측으로부터 베토벤 교향곡 9악장을 연주해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해 음모를 꾸미던 중, 이 소식을 듣고 독일의 모든 음악인에게 짤스부르크로 가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그는 짤스부르크로 가고야 말았다.

짤스부르크엔 뉴욕필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도 참석했다. 두 사람이 만났다. 푸르트뱅글러를 영입하려다 거부한 토스카니니였기에 둘의 만남은 껄끄러웠다.

토스카니니: “나는 당신이 나치 당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이 유대인들을 돕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제3제국에서 지휘하는 사람은 누구나 나치일 수밖에 없다.”

푸르트뱅글러: “아니오, 당신의 말대로라면 예술과 음악이 단지 선전도구이며 앞잡에 지나지 않겠군요. 나치 정권하에서 지휘자인 나는 나치이고, 공산주의 치하라면 나는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고, 민주주의하에서는 민주주자라는 말입니까. 천만에요. 음악은 외부의 다른 세계에 소속되어 있지 않습니다. 정치의 세계 위에 있습니다.”

토스카니니는 푸르트뱅글러의 말을 끝내 이해하지 못한채 대화를 끝냈다고 한다.

 

왼쪽부터 푸르트뱅글러, 카라얀, 토스카니니 /위키피디아
왼쪽부터 푸르트뱅글러, 카라얀, 토스카니니 /위키피디아

 

나치가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일으키려 시도하면서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푸르트뱅글러를 교체할 것을 검토했다. 그 무렵 그보다 22살 어린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이라는 오스트리아 국적의 지휘자가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카라얀은 나치당 당원이었다. 나치는 카라얀이 푸르트뱅글러보다 정권에 협조적이라고 판단했다.

푸르트뱅글러는 처음엔 카라얀을 경쟁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치는 푸르트뱅글러를 깎아 내리기 위해 관제언론을 이용했다. 나치 수괴 괴링은 음악평론가들을 동원해 카라얀의 기적을 만들어 냈다. 20년전 푸르트뱅글러의 기적을 칭송했던 독일 언론들은 이제 카라얀을 기적이라고 떠들어댔다. 나치 평론가들은 “30대의 지휘자가 50대가 부러워할 재능을 보이고 있다는 평론을 내놨다. 50대는 푸르트뱅글러를 지칭했다. 신문들은 카라얀을 크게 싣고 푸르트뱅글러를 사이드로 밀어버렸다. 한발 더나가 언론들은 푸르트뱅글러가 19세기 사람이며 그의 생각은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 새로운 사상이란 나치즘을 의미했다.

나치의 전략이 성공했다. 자존심 강한 푸르트뱅글러는 언론보도에 화가 치밀었다. 그는 괴벨스에게 그런 선전몰이는 중단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푸르트뱅글러의 입장은 취약했다. 만일 그가 독일을 떠난다면 카라얀이 자신의 자리를 꿰어 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카라얀에 질투심을 느꼈다. 그는 카라얀의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그저 “K”(Herr K)이라 했다.

하지만 나치는 끝내 카라얀을 베를린필에 기용하지 않았다. 카라얀의 집안은 그리스 마케도니아 출신이었다. 인종주의에 집착했던 나치로선 아무리 음악적 재질이 뛰어나도 카라얀으로 교체할 때의 부담감을 고려하야 했다. 대신에 나치는 카라얀을 베를린필에 입단시켜 항시 푸르트뱅글러를 견제하도록 했다.

 

19452차 대전이 끝나고 나치 정권이 몰락했다. 푸르트뱅글러는 새로운 권력자가 된 연합군의 전범재판소에서 피고로 불려갔다. 해외에 망명했거나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이 연합군을 배경으로 푸르트뱅글러를 부역자로 몰았다. 그는 법정에서 사실을 소명하고, 많은 유대인들이 그를 지지하는 바람에 무죄로 판명되었다.

 

1949년 그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자로 와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미국의 많은 음악가들이 그가 나치라고 주장하며 반대했다. 그 중에는 아르투로 토스카니니,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아르투르 루빈슈타인등 유명 음악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호로비츠(Vladimir Horowitz)그가 어쩔수 없이 독일에 남았던 것은 이해하지만 여러차례 망명할 기회가 있었다고 말했다. 루빈슈타인(Arthur Rubinstein)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확고했다면 그는 해외로 탈출했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끝내 시카고 심포니에서 거절당했다.

하지만 푸르투뱅글러는 1952년 다시 베를린필을 맡게 되었고, 그곳에서 생을 마무리했다. 그가 죽은후 1955년 카라얀이 베를린필 상임지휘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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