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C 신대륙 금은의 저주…스페인, 고물가 쇼크
16C 신대륙 금은의 저주…스페인, 고물가 쇼크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8.26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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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외 전쟁과 상품 수입에 사용…노동력 부족에 재정적자 시달리다 쇠락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1492년 카스티야의 이사벨라 여왕의 명령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한 이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신대륙의 금에 환장을 했다. 아사벨라가 죽은 후 스페인의 단독왕이 된 페르디난도 2세는 탐험가들에게 금을 가져와라,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지시했다. 탐험대들은 국왕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탐험가들은 엄청난 금을 가져왔다.

16세기초 스페인 젊은이들은 일확천금의 꿈을 꾸고 아메리카로 몰려 들었다. 1503년부터 1510년까지 금 4.9톤이 들어왔다. 1510년대의 금 유입량은 9.1, 1520년대 4.9톤이 들어왔고, 1550년대엔 42.6톤이 유입되어 절정을 이뤘다. 하지만 아메리카는 노다지가 아니었다. 그후 금 유입량은 줄어들어 17세기 초에 연간 1~2톤으로 줄어들었다.

아메리카에서 금을 대신한 것은 은이었다. 멕시코와 남미 포토시에서 대량의 은광이 발견되었다. 1560년부터 1640년까지 신대륙에서 생산된 은은 연평균 185~320톤에 이르렀다는 분석이 있다. 은을 캐는데는 엄청나게 많은 인력이 소요되었다. 스페인은 인디오들을 강제노동에 내몰았다. 하루 10시간 이상 갱도 노동과 30년이 지나야 풀려나는 강압 아래 많은 인디오들이 목숨을 잃었다.

 

신대륙의 스페인 탐험대. 미국 그랜드 캐년을 들러보는 모습. /위키피디아
신대륙의 스페인 탐험대. 미국 그랜드 캐년을 들러보는 모습. /위키피디아

 

스페인에 부가 넘쳤다. 그러나 스페인은 금을 허투루 사용했다. 과시욕과 전쟁에 썼다. 스페인 왕국은 어떤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신대륙에서 나온 금과 은으로 스페인은 호전적이고 자부심이 강한 나라로 변모했다. 군사적 정치적 모험에는 언제나 돈이 들어갔고, 아메리카에서 온 금은은 그 재원이 되었다.

수입은 많았지만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면서 스페인의 재정구조는 악화되어 갔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5(재위 1546~2556)3,700만 두카트의 부채를 남겼다. 이는 이 기간에 신대륙에서 들어온 금은보화 3,500만 두카트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80년에 걸친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밑빠진 독이자, 돈을 잡아 먹는 하마였다.

재정 악화와 채무 증가는 필연적으로 세금인상을 초래했다. 특히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부르고뉴(프랑스) 지역에 세금이 집중되는 바람에 부르고뉴는 독립전쟁을 일으켰다.

카를 5세를 뒤이은 필리페 2세가 오스만 투르크와 벌인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는 바람에 1572년 군사비 지출이 신대륙에서 긁어온 금과 세금을 모두 합친 것보다 2배나 되었다. 1576년에 펠리페 2세는 병사들에게 줄 급료가 국가 세입의 2.3배에 달하자 채권자들에게 디폴트를 선언했다. 또한 국왕은 부채의 만기를 장기로 전환할 것도 강요했다.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영역 /위키피디아

 

이때 스페인은 공채를 발행한다. 펠리페 2세는 영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막강한 무적함대를 바다에 처넣었다. 그 금액이 연간 세입의 다섯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펠리페 2세 이후에도 스페인은 1596, 1607, 1627, 1647년에도 모라토리엄(채무불이행)을 다섯 번이나 반복했다. 국가 신용은 떨어지고 경제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재정이 악화하면서 국왕들의 입지도 좁아져 새로운 사업을 펼칠수도 없었다.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역대 국왕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고 한다.

카를 5세는 전사였으며 왕이었다. 펠레페 2세는 왕이기는 했다. 펠리페 3세와 4세는 왕도 아니었고, 카를로스 2세는 인간도 아니었다.”

 

높은 물가도 스페인을 괴롭혔다. 신대륙 개척이 본격화된 16세기에 스페인의 물가상승률은 3.4배로였다. 이는 영국의 2.6, 프랑스의 2.2배를 웃도는 수준이었다. 로마제국 멸망 이후 16세기까지 유럽에선 물가가 거의 오르지 않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16세기에 유럽의 물가는 두세배 상승했다. 당시 물가는 경제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스페인의 물가가 가장 극심했던 이유는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금과 은으로 통화량이 늘었기 때문이다. 군인들에게 지급된 봉급도 돈의 유통을 빠르게 했다. 이에 비해 생산은 정체 또는 감소했다. 상품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스페인에서 소비되는 주요 물자 가운데 국내 생산으로 충당되는 비율은 10% 안팎 정도에 불과했다. 해외 식민지로 보내는 공급물자 가운데 스페인 제품은 6분의1에 불과했다. 더욱이 금과 은의 해외 반출을 엄격하게 통제하는 정책이 수입품 범람을 부추겼다. 국내에서 차고 넘치는 금과 은을 쓰려면 물건을 사야 하는데 국내 생산이 저조하므로 당연이 수입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카를 5세가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았다가 석방하면서 받은 몸값도 수입대금으로 고스란히 프랑스로 돌아갔다.

물가 상승은 스페인의 인건비를 올려 외국인 노동자들을 불러들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주로 프랑스 노동자들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왔다. 스페인에선 엘도라도 광산(전설상의 금광)에서 힘들게 일하는 것은 프랑스인들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서다는 말도 생겼다.

 

1553년 남미 포토시 은광 /위키피디아
1553년 남미 포토시 은광 /위키피디아

 

스페인에게 신대륙의 금과 은은 축복이 아니라 차라리 저주였다. 국왕들은 금이 무한정 들어올 것으로 착각해 군사비 지출을 늘리거나 거대한 궁전을 지었다. 귀족과 일반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물자가 부족한 가운데 소비 붐이 일어났다. 생활필수품 뿐 아니라 조악한 공예품까지 수입되어 스페인의 부가 해외로 빠져나갔다. 스페인 의회(코르테스)16세기말에 이런 기록을 남겼다.

금이 더 많이 들어 올수록 왕국이 보유하는 금이 더 작아 졌다. 우리 왕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다. 왕국은 금과 은이 적들의 왕국으로 흘러가는데 다리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스페인 세비야 항. /위키피디아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번성한 스페인 세비야 항. /위키피디아

 

문제를 깨닫고 처방을 내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기회는 떠나간 뒤였다. 신대륙의 금은 16세기 중반에 정점에 달했다가 1610년 이후 거짓말처럼 줄어들었다. 금에 이어 들어오던 은도 그 양이 1600년 경을 최고치로 1630년부터 급격한 하향곡선을 그렸다.

이런 와중에도 스페인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부자들은 인디오들에게서 빼앗은 풍요를 누리는데 정신이 팔렸고, 하급귀족들은 군인으로 출세하려는 생각에서 생산활동에 종사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젊은이들은 한몫 챙기려고 아메리카로 떠났다. 스페인에서 노동은 기층민이나 이교도들이 담당하는 천한 일로 여겨졌다.

스페인은 1492년 알함브라 칙령으로 유대인을 추방한 이후, 이슬람교도들에 대해서도 종교적 권리를 부인하고 개종 명령을 내렸다. 종교재판소는 무어인, 나중에 모리코스인이라 부르던 이슬람교도들을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이 보이면 해외로 내몰았다. 최대 30만명으로 추산되던 모리코스인들은 1605년에 모두 스페인 땅에서 쫓겨났다.

모리코스인들은 정교한 관개망을 운영하고 포도와 밀, , 설탕을 생산했다. 그들이 스페인에서 추방된 이후 농업이 파산하고 농산물의 수입이 급증했다.

스페인의 실수는 경제학으로도 설명된다. 생산의 3대 요소인 토지와 자본, 노동 가운데 토지와 자본은 충분했는데 비해 노동이 부족했다. 막대한 자본은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고, 우수한 인력은 해외로 추방되었다.

 

스페인 국왕은 카톨릭의 수호자라는 강박관념에 빠져 있었다. 이런 종교적 맹신은 국가 발전을 가로막았다. 스페인은 대항해시대를 열어 막대한 부를 차지했지만, 결국 그 부를 활용하지 못하고 금새 시들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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