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권4~5, 국보로 승격
범어사 소장 삼국유사 권4~5, 국보로 승격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8.27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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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장용영 본형도형 일괄, 해인사 및 갑사 불상등 8건은 보물 지정

 

보물 제419-3호였던 삼국유사 권4~5’가 국보 제306-4호로 승격지정되었다.

장용영 본영 도형 일괄’,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 3,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및 복장유물’,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복장전적등 총 8건이 보물로 신규 지정되었다.

이번 지정 대상에는 해인사와 갑사 두 유서 깊은 사찰에 400년 넘게 봉안(奉安) 되어 왔고 고려~조선 시대 조각사서지학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어 온 불상과 복장유물, 복장전적 6건도 포함되었다.

문화재청은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협조해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체계적으로 보존할 계획이다.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내지) /문화재청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내지) /문화재청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

부산 범어사 소장본으로, 1책이며 전체 5권 중 권45만 남아 있다. 범어사 초대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吳惺月, 18651943)의 옛 소장본으로 1907년경 범어사에 기증된 것으로 전해진다.

<삼국유사>는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고려 충렬왕 7) 편찬한 책으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의 역사문화에 관한 설화 등을 종합한 고대사 연구의 보고(寶庫). 고려시대 판본은 알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1394년 경 판각된 조선 초기 판본이다.

범어사 소장본은 현재 같은 계열의 판본으로 알려진 국보 2(국보 제306(송은본), 국보 제306-3(파른본)과 비교할 때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지만 1394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印出)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존 지정본에서 누락된 제2830장을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자, 1512(중종 7) 간행본의 오탈자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에 대한 교감(校勘)과 원판(原板)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 역사학술적인 중요성이 크다.

범어사 소장본은 서체, 규격, 행간(行間) 등에 있어 후대인 1512년 간행된 판본과 밀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다른 지정본과 더불어 조선 초기 판본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다.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해 향찰(鄕札)로 쓴 향가(鄕歌)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고대 언어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보물 제2070호 장용영 본영도형 기미본(1799년) 채색도 세부(내대청) /문화재청
보물 제2070호 장용영 본영도형 기미본(1799년) 채색도 세부(내대청) /문화재청

 

보물 제2070호 장용영(壯勇營) 본영도형 일괄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1799(정조 23, 기미본), 1801(순조 1, 신유본)에 그린 건축화로서, 채색화 1점과 일종의 평면도안인 간가도(間架圖) 2점으로 구성되었다. 장용영은 도성 안에 본영(本營), 수원화성에 외영(外營)을 두고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 자료는 도성 안(서울 종로 4가 이현궁 터 추정)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의 현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도형은 장용영의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증개축 변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자료이기 때문에 정확한 축적에 기초한 평면도와 정교한 필치로 건축물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과학적인 측량이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축적과 지형지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와 거의 유사한 대지의 형태를 표현했으며 채색도와 간가도(間架圖, 평면도안)를 한 벌로 작성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건축적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했고, 후대에 확장된 건물을 다시 그려 장용영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지금은 없어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장용영의 정확한 규모와 세부 건물의 배치와 기능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정간 구획의 대형 평면도와 이와 합치하는 채색 건물도가 함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례이자 유일한 도형이다.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제작시기와 목적이 명확하고 건축기록화의 제작 방법, 활용과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실증유물이라는 점, 간가도(間架圖)와 채색도를 함께 제작해 기타 간가도와 차별성이 돋보인다는 점, 측량에 기반을 둔 대지 형태를 반영해 단순한 기록화의 수준을 벗어나 뛰어난 기술적 성취를 보여준다는 점, 건물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회화적 예술성과 더불어 풍부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역사예술학술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었다.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국립경주박물관 전시) .문화재청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국립경주박물관 전시) .문화재청

 

보물 제2071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경주 남산 계곡 중 한 지류인 장창곡(長倉谷)의 정상부근 석실(石室)에 있던 불상으로, 관련 기록과 조각 양식 등으로 보아 신라 시대 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1924년 조선총독부 공문서에 의하면 본존상은 19241010일 남산 장창곡 지점의 무너진 석실에서 발견되었고, 이전에 먼저 옮겨져 경주 내남면 월남리 민가(民家)에 보관되어 온 두 협시보살상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전시되어 오다가 본존상과 함께 완전한 삼존불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발견지인 장창곡 사진을 배경으로 삼존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 삼존상은 삼국 시대 미륵신앙과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는 <삼국유사>644(선덕여왕 13)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골짜기에서 미륵상을 발견해 삼화령(三花嶺)에 봉안했다는 기록과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차()를 공양했다고 하는 삼화령 미륵세존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한 용모가 가장 특징적인 인상으로 꼽혀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원소재지라고 알려진 삼화령(三花嶺)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불상이 발견된 계곡 명칭을 붙여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자세)을 취한 본존 미륵불과 좌우 협시보살 입상으로 구성되었다. 의좌상 형식의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56세기) 이후 크게 유행했고 미륵불을 상징한 예가 많다. 장창곡 불상의 경우 우리나라 의좌상 불상 중 시기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희소한 예에 속한다.

본존상이 원만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지그시 내려 사색에 잠긴 표정이라면, 두 보살상은 1m 남짓한 아담한 체구에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이렇듯 어린아이 4등신 정도의 신체 비례를 보이는 불·보살상은 중국 67세기 북주(北周)시대부터 수대(隋代)에 걸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신라에서 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양식의 영향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이라는 원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점,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의좌형 미륵삼존불이자 신라인들의 신앙생활이 반영된 대표작이라는 점, 불심(佛心)과 동심(童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듯한 7세기 신라 전성기의 수준 높은 조각양식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한국조각사에 중요한 학술예술적 위상을 지닌 작품이다.

 

보물 제2072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해인사 경내 부속 암자인 원당암(願堂庵)의 보광전(普光殿)에 봉안된 삼존불상과 이곳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을 말한다.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설법인(說法印)의 수인(手印, 불보살을 상징하는 손모양)을 한 아미타여래좌상과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 민머리의 지장보살로 구성된 불상으로, 아미타삼존 도상을 정확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삼존상 형식은 고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도상(圖像)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으나, 현존하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불상의 형식과 복장발원문, 1490년 전후 왕실의 지원에 따른 해인사 중창(重創)과 그 이후인 1495년 원당암 중창이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을 고려할 때, 조선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발원문 등 복장유물을 통해 해인사 법보전(法寶殿)과 대적광전(大寂光殿)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조성을 후원한 왕실인물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보살상의 얼굴은 통통한 둥근 형상에 조밀하고 섬세한 이목구비, 위엄 있는 온화한 표정 등 수법이 서로 비슷해 같은 작가의 솜씨로 추정한다. 특히, 삼존상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앙련(仰蓮,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과 복련(覆蓮, 연꽃을 엎어 놓은 모습)이 마주보는 연화대좌는 명나라에서 유행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당시 중국불교와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요소이다. 나풀거리듯 드리운 목깃 주름과 신체의 유기적인 흐름을 따라 사실적으로 조각된 천의(天衣) 등 뛰어난 조형미는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82, 1458),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 1466) 15세기 중·후반 왕실발원 불상들과 연관성을 보여준다.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고려 후기부터 본격화된 아미타여래와 관음, 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며, 조선 초 15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어 당시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사례가 되는 작품이다. 제작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원래의 봉안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제작 당시 모습 그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 복장유물을 통해 제작 배경과 참여자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존상과 복장유물을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제2073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

23첩으로, 표지의 색이 진한 감색과 연한 감색, 황색 계통으로 세 종류이다.

 

보물 제2074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5

진한 감색과 황색 계통의 두 종류로 제작되었다. 진본정원본 모두 고려 중엽~조선 초 해인사의 사상적 경향과 출판인쇄문화의 실체와 역량, 그리고 국보 제206합천 해인사 고려목판에 포함된 개별 경판과 상관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는 등 역사문화적 가치를 가진다.

 

보물 제2075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제다라니 1

휴대용 수진본(袖珍本) 형식으로, 인출 시기는 조선 초 14세기경으로 추정되지만 1375(고려 우왕 1)이라는 정확한 판각연대가 있고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본으로서의 희소성이 클 뿐 아니라 삼불상(三佛像: 아미타불비로자나불석가불)과 마리지천상(摩利支天像)이 표현된 변상도(變相圖)가 처음 확인된 경전이어서 고려 말 삼불상 구성과 마리지천 신앙을 알려주는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인 보물 제2072(대방광불화엄경 진본), 보물 제2074(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보물 제2075(제다라니)는 지금까지 알려진 동종 문화재 중 보존상태가 최상급이고 같은 불상에서 일괄로 발견된 자료라는 점에서 완전성 또한 뛰어나다. 각각의 종류별로 서지학불교학적 가치가 탁월하므로 보물로 별도 지정해 보존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물 제2076호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및 복장유물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갑사(甲寺) 대웅전에 봉안된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의 협시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이다.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사보살입상1617(광해군 9)에 행사(幸思)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총 7()으로 구성된 대단위 작품이다. 이러한 7존의 형식을 갖춘 불상으로는 갑사 외에 하동 쌍계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보물 제1378, 1639)1703화엄사 각황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1703) 등이 전해지고 있다.

갑사 석가여래삼불·사보살상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7존 형식의 불상으로는 현존 최대작(最大作)이자 최고작(最高作)으로서, 진흙으로 만든 소조(塑造) 불상은 평균 높이가 2.5미터이며, 보살상 역시 2미터 이상으로 제작되어 매우 장중한 인상을 준다. 제작기법에 있어서도 17세기 전반 대형 불상에 널리 적용된 소조기법으로서는 가장 빠른 예에 속한다. 따라서 이 불보살상은 조선 후기 삼불상사보살상 도상 및 제작기법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기준작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617년이라는 명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에 대한 정보가 확인되며, 2,300여명이라는 조선 후기 최대 인원의 시주자들이 참여해 제작한 17세기의 역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역삼각형의 갸름한 얼굴에 우뚝한 삼각형의 콧날에서 행사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고, 장대하고 늠름한 자세와 안정된 비례, 기백이 넘치는 표현 등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대형불상들에서 보이는 시대적인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소조관세음보살입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처음 조성 당시의 현황에서 변형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학술역사예술적 가치가 있는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사보살입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

 

보물 제2077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사보살입상 복장전적

소조관세음보살입상에서 발견된 전적류 88점이다. 필사본은 1건으로 흰 종이에 먹으로 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며, 그 외 7전은 모두 목판 경전류다. 간행 시기는 고려본과 조선 16세기 중반까지로 확인되며, 불상 조성시기인 1617년 이전에 인출(印出, 찍어서 간행함)된 자료들이다.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사보살입상 복장전적은 판본으로서의 중요성뿐 아니라 판각과 인출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 그리고 장정(裝幀) 등에서 학술서지학적 가치를 지니며, 1617년 이전 인출된 복장 경전류의 유형과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일괄 유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복장전적 88점 역시 불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연구하는 동시에 보존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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