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로 사용된 철…후에 은화·금화로 대체
화폐로 사용된 철…후에 은화·금화로 대체
  • 아틀라스
  • 승인 2019.04.28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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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르타 리쿠르구스, 철화 상용화…우리 역사에서도 가야와 신라에서 사용

 

기원전 9세기,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법학자 리쿠르구스(Lycurgus)는 아테네에 대항하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당시 그리스는 폴리스라는 도시국가 150개가 난무하고 있었고, 항구도시 아테네와 산악도시 스파르타가 그리스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경합했다. 아테네가 솔론의 개혁에 의해 민주정치가 더욱 확립됐다면, 스파르타는 리쿠르구스에 의해 더욱더 군사적인 도시국가로 굳어졌다.

리쿠르구스 개혁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그동안 유통되고 있던 금화와 은화를 폐지하고, 철화(鐵貨)를 쓰도록 한 사실이다. 당시 그리스에는 이미 금화와 은화가 사용되고 있었고, 스파르타에서 사용되던 금화와 은화는 일정한 형상과 품위, 무게를 정해 만든 규격 주화(鑄貨)는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최초의 주화는 기원전 7세기 소아시아의 왕국 리디아에서 주조한 엘렉트론화라는 것이 정설이다.

리쿠르구스 이전에 스파르타에서 쓰던 금화와 은화는 사용할 때마다 그 무게를 달아 가치를 재는 이른바 칭량(稱量) 화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든 스파르타는 군사도시였기에 금화와 은화가 그렇게 많이 쓰인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왜 리쿠르구스가 개혁을 한답시고 금과 은 대신에 철을 돈의 소재로 바꾸었을까. 경쟁도시인 아테네처럼 상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였을까. 경제를 활성화하려고 했다면 당시 국제 화폐였던 금과 은을 더 많이 확보해야 했을텐데, 굳이 철화 사용을 의무화했던 이유는 무엇이었까. 그것은 다름 아닌 그 군사도시가 추구하는 경제봉쇄주의와 금욕주의의 결과였다.

쇠로 만든 돈으로 물건 값을 계산하면, 도시 내에서 통용될지 모르지만 국제적(그리스 문화권)으로는 상인들이 교역을 꺼리게 된다. 철화가 다른 도시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기 때문이다. 검소하고 성실하며 강건한 생활을 기본으로 하는 스파르타는 외국, 특히 아테네의 고급 문물이 들어오는 것을 꺼렸다. 소박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스파르타 안에서도 자급자족이 가능했다. 따라서 스파르트가 철화를 사용한 것은 선진 문화의 도입이나 고급 문화로의 진화를 거부하고 자급자족적 경제를 토대로 군사력 증강에 온 힘을 쏟기 위한 것이었다.

스파르타는 병영도시였다. 리쿠르스 개혁은 스파르타인으로 하여금 일상생활을 전보다 한층 더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런 군사문화의 나라에서는 돈이 필요 없었다. 금과 은은 아테네와 같은 타락한 문화의 소산이라는 것이 스파르타 지도자들의 생각이었다. 아테네에서는 은화를 만들어 앞면에는 아테네 여신의 얼굴을, 뒷면에는 올빼미와 올리브 그림을 새겼다.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거의 독자적으로 화폐를 만들었지만, 아테네의 질 좋은 주화는 지중해 연안에서 국제 화폐로 통용됐다. 이에 스파르타의 개혁가 리쿠르구스는 아테네에 대항하기 위해 강제로 철화 사용을 요구했던 것이다.

스파르타는 국제교역을 무시했거니와 국내 자금 수요도 미미한 수준이었다. 농업에 종사하는 하층계급(헬로트)은 수확의 절반을 주인에게 주면 되고, 굳이 돈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배계급도 가난하고 질박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부에 의한 계급투쟁이 일어날 염려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상공업이 발달하고 풍부한 유동성(금과 은)이 집중됐던 아테네에선 계급투쟁이 빈발했지만, 스파르타에선 달랐다. 스파르타의 철화는 이처럼 물질문명을 거부하는 군사문화 속에서 소량 유통됐던 것이다.

스파르타의 철화는 페르시아 전쟁, 펠레폰네소스 전쟁을 거쳐 마케도니아에 점령되면서 종식됐다. 스파르타를 무너뜨린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은 대제국을 형성한후 금화와 은화를 대량으로 주조해 자국 화폐로 통용시켰다.

 

철을 가공하는 모습. 정기환필오회분4호묘야철인도(鄭基煥筆五盔墳4號墓冶鐵人圖).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철을 가공하는 모습. 정기환필오회분4호묘야철인도(鄭基煥筆五盔墳4號墓冶鐵人圖). 국립박물관 소장 /문화재청

 

우리나라 역사에도 철화가 사용된 흔적이 있다. 고대에는 한반도에도 물물교환이 유통의 전부를 차지했고, 무기와 각종 생산도구, 장신구, 곡물, 직물 등의 물품이 다른 문화권에서처럼 화폐로 대용됐다.

조선후기 한치윤(韓致奫)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한반도에서 최초로 화폐가 등장한 것은 고조선 시대인 기원전 57년으로, 이때 자모전(子母錢)이라는 철전이 만들어져 사용됐으며, 변한에서는 철을 생산해 화폐 대용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철이 귀하던 고대에 철전을 화폐로 쓴 것이다. ,고대 지배계층의 무덤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인 관곽(棺槨) 바로 밑에 일정한 규격을 갖춘 철정(鐵鋌)이 많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고고학자들은 이를 통해 당시 철이 무기와 농기구의 원재료이면서 화폐로 사용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공식적으로 철전이 사용됐다는 기록은 고려시대에 나온다. 고려초인 성종 15(996)에 최초로 철전을 주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고려조가 철전을 주조한 목적은 스파르타의 그것과 다르다. 중국 송나라와 교역을 확대하고 국내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 주화의 필요성이 제기된 것이지, 스파르타처럼 쇄국정책을 취하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의 철전은 유통범위가 극히 제한됐고, 민간에서는 물물교환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는 스파르타의 철화가 그리스의 다른 도시국가에서 통용되지 못한 것과 같다.

고려시대 철화의 사용은 100년도 못되어 수명을 다한다. 송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돌아온 왕족출신 승려 의천(義天)의 건의로 1097(숙종 2) 주전관(鑄錢官)을 두어 화폐 주조 업무를 담당하게 해ᅟᅣᆻ고, 110215,000근의 구리로 해동통보(海東通寶)를 만들었다. 이로써 한반도에 동전의 시대가 막을 올렸다. 고려는 이보다 1년 이른 1101년 은본위제도를 취한 중국의 영향으로 귀금속 화폐인 은병(銀甁)을 법화로 유통시켰다.

재미있는 사실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동전을 만들 때 나뭇가지 형태의 주물 틀을 만들어 동전을 대량으로 생산했다는 것이다. , 엽전 형틀을 만들 때 서로 연결되도록 골을 파 쇳물을 부으면, 한꺼번에 여려 개의 동전이 주조됐고, 이 것이 굳어지면 잎()을 하나씩 떼어 내어 연마해서 동전으로 사용됐다. 동전 주조과정에서 떼어내기 전에 동전 모습이 나뭇가지에 달린 잎사귀와 같다고 해서 엽전(葉錢)’이라 부르게 됐다.

어쨌든 그리스와 한국에서 철화나 철전의 역사는 짧다. 철화의 역사가 짧은 것은 화폐의 조건인 희소성이 금이나 은보다 덜하다는 점을 들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전이 짧은 기간에 구리돈(동전)에 밀려난 것은 바로 철의 용융점이 구리보다 500도 높고, 인류가 철을 녹이는 기술을 개발한 것이 수백년에 불과하다는 점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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