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재 부족에 시달린 영국, 석탄활용 기술 개발
목재 부족에 시달린 영국, 석탄활용 기술 개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02 1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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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 제련 연료로 목재 대신에 석탄 사용…철강기술 선진화 성공

 

산업혁명 초기인 1780년 이전까지 영국에선 국내에서 생산된 철()보다 수입하는 철이 더 많았다. 영국은 부족한 철을 스웨덴과 러시아에서 수입했다. 그 이유는 철을 녹이는데 연료로 사용하는 목재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석탄을 이용한 제철기법이 개발되기 이전에 유럽에선 목재와 숯을 제련 연료로 사용했다. 그런데 영국에서는 삼림이 고갈되면서 제련에 쓸 목재 부족현상이 심화되었다.

 

목재는 석탄과 석유 등의 지하자원이 활용되기 이전 수만년 동안 인류가 사용해온 연료였다. 인류가 불을 발견하면서부터 나무를 땔감으로 이용했고, 나무는 연료 이외에도 다양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주택을 건축하고 농기구를 만들고 배를 짓는데 목재가 사용되었다. 근대 이전의 인류역사는 산림자원을 활용하는 과정이었다. 농경지를 확대하기 위해 나무가 벌채되었고, 숲이 줄어들었다. 인구증가는 삼림 면적에 반비례했다.

11세기말부터 영국 동남부엔 숲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숲의 의적 로빈 후드가 풍미하던 13~14세기 영국은 농업 발전으로 삼림의 황폐화가 구조적으로 나타나던 시기였다. 늘어 나는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구릉이나 낮은 산지가 농지로 변해 갔고, 숲이 빠르게 사라졌다. 땔감 수요가 증가하면서 나무의 성장 속도가 목재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영국 뿐 아니라 중부 유럽도 숲의 황폐화 과정을 밟았다. 울창하던 독일의 숲은 인구 증가와 영주의 탐욕에 점점 농지로 변해갔다. 땔감 부족으로 뗏목을 이용해 나무를 먼 곳으로 운반하는 직업도 생겨났다. 대장간에서는 목재 부족으로 쉬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프랑스 왕실 재정회고에 땔감이 귀해지고 있어 생활 필수품의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기록이 이런 현상을 반영한다.

 

영국 국토 중 숲의 비율 추이 /위키피디아
영국 국토 중 숲의 비율 추이 /위키피디아

 

15세기말에 대항해 시대가 열리고, 유럽에 연속적인 전쟁이 벌어지자, 숲의 황폐화가 가속화되었다. 무기와 대형선박 건조에는 나무가 필요했다.

1톤의 철을 생산하는데 숯 1,000톤이 필요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금속의 용융점까지 온도를 올리는 연료는 목탄 밖에 없었다. 목탄을 조개탄처럼 만들어 바람을 불어 넣으면 열의 온도를 1,100°C까지 올릴수 있다. 구리는 의 용융점은 1,083°C여서 숯을 잘 가열하면 구리를 녹일수 있다. 철은 용융점이 1,539°C여서 목탄으로 말랑말랑하게는 하지만 완전히 녹이지는 못한다. 말랑말랑해진 철을 두드리고 식히기를 반복해 강철을 만들어 냈다.

선박 건조에도 많은 목재가 소요되었다. 선박용 목재는 땔감용 나무보다 재질이 우수해야 했다. 영국이 해양대국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함대 건조용 목재를 조달하느라 산림이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6세기 중반 이후 산림 면적이 국토의 30%에서 15%로 줄어들게 되었다.

 

급기야 엘리자베스 여왕(재위 1558~1603) 시기에 영국 의회는 수목 벌채를 금지하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법령은 강의 20km 이내에 있는 나무의 벌채를 금지했다. 코번트리라는 시는 숲에서 목재를 가져다가 붙잡힌 사람은 다리에 평틀을 세워 공개하도록 규정했으며, 두 번 위반하는 사람은 시에서 추방되었다. 1)

민간 상선도 늘어나면서 영국에서 목재는 점점 귀해졌다. 영국은 당초 아메리카 신대륙에서 제조업을 육성하지 않을 방침을 세웠지만 목재 가공업과 조선소만은 동부 해안에서 허용했다. 1714~1763년 사이에 영국 해군의 신규 군함은 두배로 늘어났고, 여기에 들어간 목재 대부분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울창한 숲에서 벌목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유럽의 변방이었던 러시아와 스웨덴에서는 울창한 숲이 보존되어 있었고, 목재가 풍부했다. 게다가 러시아와 스웨덴에는 질 좋은 철광석이 지하에 풍부한 매장되어 있었다.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철의 수요가 급증했다. 영국은 국내산보다 더 싼 외국산 철을 수입하게 되었다. 목재 부족으로 제철용 숯의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목재가 부족해지면서 영국 가정에서는 석탄을 땔감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석탄에는 유황이 석여 있기 때문에 매케한 냄새가 났고, 연기는 빨래를 더럽혔다. 처음에는 빈민층에서 석탄을 썼고, 부자들은 목재와 숯을 사용했다. 하지만 목재 부족이 심해지면서 17세기엔 부유층도 석탄을 써야 했다. 영국을 방문한 유럽 사람들이 석탄을 사용하는 빈민층의 지저분한 모습을 거지처럼 여겼다고 한다.

 

영국 콜브룩데일에 있는 에이브러햄 다비의 용광로 기념물 /위키피디아
영국 콜브룩데일에 있는 에이브러햄 다비의 용광로 기념물 /위키피디아

 

하지만 석탄이 금속 제련에는 사용되지 못했다. 제련에 사용되는 엄청난 양의 목재는 제련업자들에게 많은 부담을 유발했다. 이런 가운데 석탄층이 인접한 곳에 있던 제철업자들이 석탄을 연료로 사용하려는 유혹에 빠지게 되었다.

처음에는 용융점이 낮은 납 제련에 석탄을 사용했다. 영국 브리스톨 근처의 납 제련소에서 목탄 대신에 석탄과 이탄, 토탄을 혼합해 밀폐된 용광로에 납을 융해하고 정련하는데 성공했다. 이 회사는 1678년에 특허권을 출원하면서 목재 가격의 상승과 부족을 피할수 있다는 사실에 석탄의 이점이 있다고 밝혔다.

석탄은 이후 구리 제련에 활용되었다. 몇몇 구리 광산에서 석탄을 이용한 제련에 성공했다. 이제 용융점이 높은 철의 제련에 석탄을 사용하는 기술 개발에 기업인들이 덤벼들었다. 그 성공은 1708년 영국의 콜브룩데일(Coalbrookdale)이라는 곳에서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 1678~1717)에 의해 이뤄졌다.

다비는 그곳에서 조그마한 공장을 차려 맥주 원료인 맥아(麥芽) 제분사업을 하다가 구리 제조와 제철 사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제철 과정에서 오늘날 코크스(cokes)라 불리는 점결탄을 용광로에 넣어 철을 녹여 보았다. 코크스는 높은 온도를 내기 때문에 철을 용융시킬수 있었다. 후세 사람들은 그가 맥아 제분업을 하면서 점결탄을 사용해본 경험을 활용해 철 제련과정에 고농도의 석탄 결정체를 사용는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불운하게도 그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고, 특허도 내지 않았다. 그의 코크스 사용법은 구전으로 전해져 50년 후에 제철업자들에 의해 기념비적인 기술임이 인정된다. 코크스를 연로로 한 제철은 콜브룩데일에서 개발되어 제철업자들 사이에 대중화되어 갔다.

 

산업혁명 당시를 그린 ‘영국 콜브룩데일의 밤’ (1801년) /위키피디아
산업혁명 당시를 그린 ‘영국 콜브룩데일의 밤’ (1801년) /위키피디아

 

이후 영국은 석탄을 이용한 제철, 제강법을 개발해 나갔다. 1784년 헨리 코트(Henry Cort)는 선철(pig iron)을 주조하는 기술을 개발했고, 1825년 영국에서 처음으로 스톡턴~달링턴 구간에 철도가 부설되었다. 이어 1856년 헨리 베세머(Henry Bessemer, 1813~1898)에 의해 강철 제조법이 발표되었다.

석탄을 활용하면서 영국의 제철산업은 급속하게 팽창하고, 산업혁명을 가속화했다. 영국이 19세기에 동양의 강대국 청()나라를 굴복시키고 제국주의 팽창을 하게 되는 이면에는 석탄을 이용한 제철 산업의 발전이 있었다.

 


1)  채굴과 제련의 세계사(마틴 린치), ‘책으로 만난 세상출간,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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