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황남동 고분의 주인공은 키 170cm 장신
경주 황남동 고분의 주인공은 키 170cm 장신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09.03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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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동 120-2 고분에서 금동관, 금귀걸이, 은허리띠 등, 묻힌 상태로 출토

 

신라시대에 키 170cm이면 장신이다. 이 키 큰 주인공의 부장품이 무덤 발굴 과정에서 묻힌 상태 그대로 온전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은 527일 경주 황남동 120-2호 고분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시신이 있는 매장주체부에서 금동신발과 금동 달개(瓔珞) 일부를 확인했다. 이어 정밀 발굴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금동관과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은허리띠, 은팔찌, 구슬팔찌, 은반지 등이 피장자가 입은 상태 그대로 확인되었다. 120-2호분은 황남동 120호분의 봉토를 파괴하고 축조된 고분이다.

 

경주 황남동 120-2호분 매장주체부의 유물 노출 상태 /문화재청
경주 황남동 120-2호분 매장주체부의 유물 노출 상태 /문화재청

 

이번 발굴 과정에서 피장자의 머리부터 발치까지 전신에 착장했던 장신구 일체가 온전하게 드러났다. 이 장신구는 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장자는 금동으로 만든 관()을 머리 부분에 착장했고,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를 양쪽에 하고 있으며, 금동신발을 신고 있었다. 경주 지역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墓)에서 피장자가 신발을 착장한 사례가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게다가 관과 귀걸이, 가슴걸이, 허리띠, 팔찌, 반지, 신발이 일괄로 출토된 것은 19731975년 황남대총 이후 처음이다.

 

피장자가 착장하는 장신구의 종류와 위치 /문화재청
피장자가 착장하는 장신구의 종류와 위치 /문화재청

 

금동관의 중앙부에서 금동신발의 뒤꿈치까지의 길이가 176인 것으로 보아 피장자의 키는 170내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연구자들은 무덤의 주인공이 여성일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하지만 아직 예단하기는 어렵고, 문화재청 신라왕경사업추진단은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피장자의 성별 등을 추가로 확인할 예정이다.

 

120-2호분 금동관,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노출 모습 /문화재청
120-2호분 금동관, 금드리개, 금귀걸이, 가슴걸이 노출 모습 /문화재청

 

금동관

지난 5월에 피장자의 머리 부분에서 금동 달개 일부가 먼저 발굴되었다. 이후 최종적으로 금동관이 확인되었다.

금동관은 가장 아래에 관테(帶輪, 둥글게 만든 띠)가 있으며, 그 위에 3단의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樹枝形 立飾) 3개와 사슴뿔모양 세움장식(鹿角形 立飾) 2개를 덧붙여 세운 형태다. 관테에는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장식용 구멍이 정연하게 배치되어 있으며, 나뭇가지모양 세움장식의 끝 부분에도 거꾸로 된 하트 모양의 구멍이 뚫려 있다. 금동관의 관테에는 곱은옥(曲玉)과 금구슬로 이루어진 금드리개(金製垂飾)가 양쪽에 달려 있다.

관테와 세움장식 사이에는 , 모양의 무늬가 뚫린 투조판이 있는데, 세움장식의 상단에서도 투조판의 흔적이 일부 확인되었다. 이 투조판이 관모(冠帽)인지, 금동관을 장식하기 위한 용도였는지는 추가적인 조사를 통해 밝혀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재까지 출토된 경주 지역의 금동관 가운데 가장 화려하다.

금동관의 관테에 장식용 구멍이 뚫려있다는 점, 경주 지역 돌무지덧널무덤의 피장자가 관과 관모를 동시에 착장했다는 점, 투조판이 관을 장식한 용도로 쓰였다는 점 등은 현재까지 출토된 적이 없는 첫사례다.

 

120-2호분 구슬팔찌 복원 모습 /문화재청
120-2호분 구슬팔찌 복원 모습 /문화재청

 

장식품

금동관 아래에 금으로 제작한 굵은고리귀걸이 1쌍과 남색 구슬을 4줄로 엮어 만든 가슴걸이(胸飾)가 확인되었다.

그 아래에 은허리띠와 허리띠의 양 끝부분에서 4점이 묶음을 이룬 은팔찌, 은반지도 확인되었다.

오른팔 팔찌 표면에서는 크기 1내외의 노란색 구슬이 500점 넘게 출토되어 작은 구슬로 이루어진 구슬팔찌를 은팔찌와 함께 끼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은반지는 오른손에서 5, 왼손에서는 1점이 출토되었다. 왼손 부분을 완전히 노출시키기 않았기 때문에 추가적인 조사가 이루어지면 왼손 부분에서 은반지가 더 출토될 가능성도 있으며, 천마총의 피장자처럼 각 손가락마다 반지를 꼈을 가능성도 있다.

 

120-2호분 금동신발 일부 노출 상태 /문화재청
120-2호분 금동신발 일부 노출 상태 /문화재청

 

금동신발

금동신발은 , 모양의 무늬를 번갈아가며 뚫은 앞판과 달리 뒤판은 무늬를 새기지 않은 사각의 방형판으로 마감한 형태였다. 참고로 1960년 의성 탑리 고분에서도 비슷한 형태의 금동신발이 출토된 적이 있다.

현재까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관과 신발은 실생활에 사용하던 것이 아니라 죽은 이를 장사지내는 의례(葬送儀禮)를 위해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부장품

이 외에도 은허리띠의 드리개 연결부가 삼각 모양인 점, 부장칸에서 출토된 철솥(鐵鼎)의 좌·우에 고리 자루 모양의 손잡이가 부착된 점 등 기존에 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자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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