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역사②…미국 석유산업 일으킨 3인방
석유의 역사②…미국 석유산업 일으킨 3인방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07 15: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험기업가 조지 비셀, 시추기술자 에드윈 드레이크, 석유이론가 벤저민 실리먼

 

현대 석유산업은 1850년대 미국에서 출발한다. 여기에 조지 비셀, 에드윈 드레이크, 벤저민 실리먼이라는 3인방이 등장한다.

그들은 모험정신에 사로잡힌 일종의 미친 사람들이었다. 손에 쥔 것 하나 없는 벤처자본가였고, 아이디어와 정열로 미국의 석유산업을 탄생시킨 주역들이다.

 

왼쪽부터 조지 비셀, 벤저민 실리먼, 에드윈 드레이크 /위키피디아
왼쪽부터 조지 비셀, 벤저민 실리먼, 에드윈 드레이크 /위키피디아

 

조지 비셀(George Bissell)은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1821년에 미국 뉴햄프셔주에서 태어나 스스로 학비를 벌어 다트머스대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로 출발해 변호사가 되었다. 그후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안스에서 교육에 힘쓰다가 황열병에 걸려 휴양을 위해 뉴욕에 올라와 쉬었다. 그러던 중에 1853, 그는 뉴햄프셔의 딕시 크로스비(Dixi Crosby) 교수의 집을 방문했는데, 교수의 집에 펜실베이니아에서 뽑아올린 석유(rock oil) 샘플을 보게 되었다. 당시 석유는 지표면에서 극소수 채취되었고, 의약품 정도로만 사용되었다.

비셀(George Bissell)은 교수의 설명을 듣고 석유가 연소하면서 빛을 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두뇌는 비상했다. 저 기름으로 등잔을 켜면 비싼 고래기름을 쓰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당시 등잔 연료로 고래기름(whale oil)이나 석탄에서 추출한 기름(coal oil)이 사용되었는데 비쌌다. 석유를 양산하면 고래유와 석탄유를 대체할 수 있을 것이라, 그는 생각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32살이었다.

 

타이터스빌의 드레이크 유정박물관.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한 곳이다. /위키피디아
타이터스빌의 드레이크 유정박물관. 최초로 유전 개발에 성공한 곳이다. /위키피디아

 

그는 머리의 회전속도도 빨랐지만 행동은 더 빨랐다. 뉴욕으로 돌아온 비셀은 석유의 잠재력을 구현할 장소와 자금조달을 물색하고 다녔다. 그는 석유가 날만한 곳을 찾았는데, 우선 소금광산 주변부터 찾아 보았다. 원유가 나는 곳은 대부분 염정((塩井) 근처였는데, 펜실베이니아주 타이터스빌(Titusville)이 염정 근처에 있었다.

타이터스빌의 위치 /위키피디아
타이터스빌의 위치 /위키피디아

 

그는 동료변호사 조너선 에벌리스(Jonathan Eveleth)와 함께 5,000 달러를 마련해 타이터스빌의 땅 220ha(0.81)를 사려고 시도했다. 그 무렵 석유에 미친 또다른 사람이 그 땅을 사려고 덤벼 들었다. 새무얼 키어(Samuel Kier)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이미 석유정제업에 뛰어들어 석유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키어는 비셀보다 더 높은 가격을 불렀다. 돈이 모자란 비셀과 에벌리스는 땅 주인에게 회사의 지분을 주는 조건으로 그 땅을 사는데 성공했다.

두 사람은 석유채굴 부지를 산 후 1854년에 펜실베이니아 석유회사(Pennsylvania Rock Oil Co.)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가 미국 최초의 석유탐사회사로 기록된다.

그는 탐사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월스트리트의 자산가를 찾아다녔는데, 대부분이 석유시추라는 개념을 몰라 그의 설명에 코웃음을 쳤다. 유독 커네티컷주 뉴헤이븐의 은행가 제임스 타우센트(James Townsend)가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선뜻 나섰다.

 

그 다음에 한 일은 자신이 막연하게 생각했던 석유의 조명용 사용 가능성을 입증해줄 사람을 찾았다. 비셀은 예일대의 유명 화학자 벤저민 실리먼(Benjamin Silliman Jr)과 석탄유 전문가 루서 애트우드(Luther Atwood) 교수에게 석유의 정제와 실용화 가능성을 의뢰했다.

실리먼은 아버지에 이어 2대째 미국 최고의 화학자 부자로 명성을 날린 인물이었다. 그는 처음에 석유의 가치에 대해 조심스런 반응을 보였지만 연구를 해보니 전망이 매우 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리먼은 연구 결과에 대한 비용으로 1,200 달러를 요구했다. 당시 대학교수로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비셸은 동업조건으로 그의 요구를 수용했다.

실리먼은 1855416일에 보고서를 내놓았다. 그는 보고서에서 나는 귀하가 그다지 비용이 들지 않는 단순한 처리로 매우 귀중한 제품을 제조할 수 있는 원료를 손에 넣었다고 확신한다. …… 이런 결론은 나의 실험이 증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썼다.

실리먼은 비셀과 함께 일하면서 원유 정제 기술을 개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비셀은 이 보고서를 투자자들에게 내밀어 투자자금을 모을수 있게 되었다.

당시 석유는 모험자본 성격이 강해 투자를 꺼려하던 전주들이 보고서를 믿고 돈을 대기 시작했다. 비셀은 투자가들의 자금에다 자신의 펜실베이니아 석유회사를 합쳐 세네카 석유회사(Seneca Oil Company)를 설립했다.

 

석유의 가치에 대한 신뢰도 얻었고, 투자자금도 모아졌으니, 이제 남은 건 채굴 전문가였다.

비셀은 에드윈 드레이크(Edwin Drake)라는 철도 종사자를 끌어들였다. 비셀이 그를 채용한 이유가 철도 직원이었기 때문에 그가 갖고 있는 무임승차권으로 교통요금을 아낄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했다고 한다.

드레이크는 군대를 입대한 적이 없다. 당시 남북전쟁(1861~65) 직전이어서 미국인 사이에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강했다. 비셀은 그에게 대령(captain)이란 호칭으로 붙여 주었다. 드레이크는 가찌 직함인 대령을 활용해 유정 노무자와 주민들에게 통솔력을 발휘했다.

 

펜실베이니아 오일크리크 주립공원에 세워진 최초 석유시추기 모형 /위키피디아
펜실베이니아 오일크리크 주립공원에 세워진 최초 석유시추기 모형 /위키피디아

 

드레이크가 석유시추에 나선 시기는 1858년 봄이었다. 당시까지 원유는 지표면에 구덩이를 파서 채취했다. 이에 비해 드레이크는 염정(salt well)을 파내려가는 방식을 시도했다. 쇠막대기 끝에 드릴을 부착해 회전시켜 땅속에 진입시키는 방식이다. 그는 드릴을 박아 넣기 위해 증기기관을 구입하고, 염정 기술자들을 불러 모았다.

드레이크의 시추팀은 타이터스빌 일대에 나중에 오일크리크(oil creek)로 불린 지역을 시추했다. 당시 기술력으로 드릴을 자갈층까지 내려가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5m쯤 파내려가는데 수직 굴이 무너져 버렸다. 드레이크는 새로운 시도를 했다. 파이프 끝에 드릴을 부착해 파내려가는 새로운 방식을 고안했다. 3m 길이의 주철 파이프를 이어붙여 암반까지 10m를 파내려갔다. 당시 기술은 열악해 하루에 지하 1m 정도밖에 진도가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했다. 그가 뚫는 구멍은 드레이크의 어리석음’(Drake's Folly)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하지만 그는 우직하게 자신의 노력이 성공할 것이란 믿음으로 시추를 밀고 나갔다.

해를 넘겨 1859, 그는 돈이 떨어졌다. 커네티컷의 주주들이 돈을 모아 지원했다. 그런데도 4월이 되자 돈을 또 부족했다. 드레이크는 자신의 돈 500 달러마저 넣었다. 그렇게 1년반을 허비했다. 수백개의 유정을 팠으나 허탕이었다.

 

827, 그날도 드레이크는 시추작업을 했다. 지하 21m쯤 파내려갔다.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그는 인부들에게 작업을 마무리하고 쉬라고 지시했다.

다음날 아침 빌리 스미스(Billy Smith)라는 드릴 작업자가 일을 시작하려고 시추공을 들여다 보았다. 그때 깜작 놀랄만한 일이 벌어졌다. 시추 구멍에 원유가 올라온 것이었다. 스미스는 자신의 보스를 불렀다. 드레이크는 기름이 올라온 것을 보고 미친 듯이 기뻐했다. 전날 시추작업이 원유층에 닿았던 것이다. 사상 최초의 수직 굴착식 석유시추가 이런 과정을 통해 성공했다. 미국의 역사가들은 1859827일을 미국석유산업이 태어난 날로 기록했다.

 

타이터스빌에서 생산된 원유를 수송하던 바지선 모형 /위키피디아
타이터스빌에서 생산된 원유를 수송하던 바지선 모형 /위키피디아

 

이때부터 세네카 석유회사는 석유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하루 생산량은 30배럴(4,767리터)였다. 요즘 기준으로는 미미한 수준이지만 당시로는 엄청난 규모였다. 생산된 기름은 바지선에 실려 엘러게니강을 따라 오대호로 옮겨져 운하를 통해 뉴욕으로 수송되었다. 이들이 기름을 캔 곳의 땅주인 조너선 와트슨(Jonathan Watson)은 시골마을에서 처음으로 백만장자가 되었다.

비셀과 드레이크의 성공은 금새 소문이 났다. 캘리포니아 골드러시(1848~1855)가 시들해진 시기여서 탐욕가들은 검은 황금석유로 몰려들었다. 한적한 마을에 1년 사이에 300개의 유정이 뚫렸다. 석유개발전인 1858년에 245명이던 인구가 1866년에는 1만명을 넘어서 타이터스빌 시(city)로 승격되었다.

 

1865년에 J.H.A. 보온이라는 기자는 이렇게 썼다. 1)

메인주에서 캘리포니아주에 이르기까지 석유는 우리들의 주택에 등불을 켜게 했고, 기계의 윤활유가 되었으며, 기술·제조·가정생활 등 온갖 분야에 필수불가결한 물건으로 등장했다. 만약 석유가 지금 없어져 버리린다면 우리 문명 전체의 흐름을 역행시키는 결과가 될 것이다. 석유의 이용 범위가 증가하고 있음을 의심하는 일은 세계의 진보를 밎지 않는 것을 의미했다.”

 


1)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서니 심슨, (책갈피, 2000), P44~45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