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역사③…이어지는 미국의 오일러시
석유의 역사③…이어지는 미국의 오일러시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08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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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고갈론 불구 연속적으로 대형유전 발견…사회 변화의 원동력

 

1859년 미국 필라델피아주 타이터스빌에서 원유가 터져 나오기 2년전인 1857년에 동유럽의 루마니아에서 원유가 생산되었다. 루마니아는 3가지 점에서 세계 최초의 산유국으로 공인된다. 첫째는 1857년에 275톤의 원유를 생산해 공식적으로 세계 최초의 원유생산국이다. 둘째는 그해에 하루 7.5톤을 처리하는 세계최초의 정유공장을 가동했다. 셋째로 수도 부쿠레슈티는 등유 램프를 대중화한 세계최초의 도시다. 1)

 

미국에선 루마니아에 비해 2년 늦게 원유가 채굴되었지만, 사회를 변화시킬만큼 충분한 원유가 생산되었다. 석유는 처음에 거의 등유로 사용되었다. 초기 사업자들은 원유에서 등유만 추출하고 나머지는 버렸다.

석유가 등장하기 직전에 조명용으로 사용되던 원료는 고래기름이 1등품이었고, 다음으로 식물성 유지, 송진 추출유 등이었다.

고래기름은 양초에 비해 빛이 고왔기 때문에 수요가 많았다. 하지만 먼바다에 나가 고래를 잡아야 했다.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이 모비딕을 쓴 시점이 1851년이었다. 1853년 매튜 페리 제독이 일본에 개항을 압박하면서 요구한 내용은 미국 포경선이 일본 항구에 기항하도록 허용하라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조명용 고래잡이가 당시에 성행했음을 보여준다. 어렵게 고래를 잡아야 했기 때문에 고래유는 1갤런당 2.5달러나 했다.

송진 추출유는 고래유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격이 쌌으나 그을음이 많았고, 폭발성이 강해 사고가 잦았다. 식물성 유지는 품질이 낮았다. 1850년대에 석탄에서 기름을 추출하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나 그나마 가격이 비쌌다.

조지 비셀과 에드윈 드레이크가 필라델피아에서 원유를 생산하면서 이런 문제들이 말끔하게 해소되었다. 미국인들의 등잔에 쓸 정도의 원유는 충분하게 생산되었기 때문이다.

 

펜실베이니아 타이터스빌 /위키피디아
펜실베이니아 타이터스빌 /위키피디아

 

비셀과 드레이크의 성공은 미국에 오일 러시를 낳았다. 한적한 펜실베이니아 시골에 사람들이 몰렸다. 석유로 한몫 벌자는 기대심리는 일확천금을 노리는 투기자본을 부추겼다. 원유 채굴에 성공한 이듬해인 1860년에 타이터스빌에 75개의 유정이 불을 뿜었다. 원유를 정제해 등유를 추출하는 정유시설도 15개나 들어섰다.

1861년에는 펜실베이니아에서 석유가 분출하는 유정이 발견되었다. 하루 생산규모가 3,000 배럴로 드레이크가 발견한 유정보다 100배나 큰 규모였다. 1861년에 유정에서 화재가 났는데, 원유가 공중으로 뿜어 나오면서 3일 동안 지속되었다. 19명이 사망자를 냈지만, 지하에 기름이 엄청나게 매장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거대한 유전의 발견으로 미국의 석유생산량은 1860년에 45만 배럴에서 1862년에 200만 배럴로 팽창했다. 공급이 늘어나자 가격도 급락했다. 1861년에 배럴당 10달러였던 가격이 1년 후에 10센트로 떨어졌다. 원유가격이 떨어지면서 등유 가격도 떨어지고, 등유는 등잔의 다른 연료를 완전히 몰아냈다.

남북전쟁이 끝날 무렵에 원유가격이 다시 상승하자 퇴역군인들이 펜실베이니아로 몰려왔다. 1865년에 타이터스빌에서 24km 떨어진 피트홀(Pithole)에서 대형 유전이 발견되어 하루에 2,000 배럴을 생산했지만, 1년 뒤에 생산이 뚝 끊어졌다. 피트홀의 땅값은 천정부지로 뛰었다가 폭락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석유고갈론을 끊임없이 제기하게 되었다. 땅 속에 매장된 원유는 유한하며, 그 원유를 다 파내면 고갈된다는 것이다. 그후에도 새로운 유정이 속속 개발되었지만, 피트홀의 사례는 언젠가 석유가 고갈된다는 위기의식을 가라앚게 하지는 못했다.

 

펜실베이니아 피트홀의 석유시대 시가지 /위키피디아
펜실베이니아 피트홀의 석유시대 시가지 /위키피디아

 

펜실베이니아의 원유 생산지역은 산악지대여서 수송이 문제였다. 원유를 용기에 담아 뗏목에 실어 엘레게니 강으로 수송해야 했다. 개발업자들은 채굴된 원유를 아무 용기에나 담아 수송했다. 만만한 게 술통이었다. 나무조각을 엮어서 만든 술통은 영어로 배럴(barrel)이라 했다. 가장 많은 양의 원유를 실을 수 있었고, 대량을 제작가능한 용기였다.

처음에는 배럴의 기준이 없었다. 닥치는대로 배럴을 구해와 원유를 채워 팔았다. 어떤 것은 위스키 배럴이고, 어떤 것은 와인 배럴이었다. 그런데 수요자들의 불만이 높아갔다. 배럴의 기준을 통일하라는 요구였다. 엇비슷해 보이지만, 2~3갤런의 차이가 나는 배럴들에 원유가 수송되고 있었다. 수송하는데도 불편했다. 작은 것과 큰 것을 쌓을 때 불균형이 생겼다.

펜실베이니아의 석유개발업자들은 42갤런 짜리 와인 술통에 일괄해서 원유를 담아 주니, 구매자들이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약간의 시행착오와 합의과정을 거쳐 사업자들은 원유개발업자들은 42갤런 와인 배럴을 기준으로 삼기로 합의했다. 미국 연방 지질국과 광산국도 이 기준을 승인하게 된다.

 

오일 붐이 일어나면서 뉴욕 월스트리트도 잽싸게 돈 냄새를 맡게 되었다. 뉴욕에는 석유를 취급하는 브로커들에 의해 사무실이 동이 나고 영국 자본도 석유사업자를 찾아왔다.

석유산업에 투자해 큰 돈을 벌어 대통령이 된 사람도 있다. 미국 20대 제임스 가필드(James A. Garfield). 그는 그는 1881년에 당선되어 취임 6개월여만에 암살되어 불운한 인생을 마쳤지만, 석유와 인연을 맺은 첫 번째 미국 대통령으로 꼽힌다.

 

미국 20대 대통령 가필드 /위키피디아
미국 20대 대통령 가필드 /위키피디아

 

석유는 미국인의 생활양식을 바꾸었다.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던 사람들이 갑싼 등유 램프 덕에 밤 늦도록 책을 읽거나 일을 할수 있게 되었다.

미국의 석유는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196011, 필라델피아항에서 엘리자베스 와츠(Elizabeth Watts)라는 범선이 1,329 배럴의 등유를 싣고 이듬해 1월 런던에 무사히 도착해 물건을 내려 놓았다. 이 배는 일반화물만 취급했는데, 이때 처음으로 오크통에 등유를 실었다. 이 배는 등유의 화재 위험성을 감안해 운임을 일반화불보다 3배나 받아냈다. 엘리자베스 와츠호는 최초로 기름을 운송한 배로 기록된다.

이후 노벨상을 제정한 스웨덴 기업인 알프레드 노벨의 두 동생들이 1878년에 기름수송용 선박으로 조로아스터(Zoroaster)호를 건조했는데, 이 배가 최초의 유조선이다.

 

텍사스 스핀들톱의 원유분출 /위키피디아
텍사스 스핀들톱의 원유분출 /위키피디아

 

석유고갈론에 대한 우려를 잠재운 것은 19011월 텍사스주 보몬트 카운티의 스핀들톱(Spindletop)에서 대형유전이 발견되면서였다.

3명의 퇴역군인 출신 기술자들이 3년 동안 텍사스주 곳곳을 헤매며 석유를 찾아 다녔다. 그들이 자금을 거의 날리고 포기를 해야 생각 할 때쯤 잭팟이 터졌다. 1990년 말에 그들은 268m를 파내려 갔지만 실패했다. 새해가 되어도 기름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아닌가 싶어 포기하려는 순간에 시추공에서 진흙이 쏟아져 나오면서 폭발이 닐어났다. 땅 속 깊이 박혀 있던 6톤 가량의 시추용 파이프도 튀어 나왔고, 지상의 유정탑도 무너졌다. 혼비백산한 기술자들은 유정을 수습하려는 순간에 흑갈색 액차게 수백m 높이까지 내뿜었다.

스핀들톱의 검은 분수는 6km 떨어진 곳에서도 목격되었다. 9일 후 분출이 멈추었을 때 검은 호수가 생겨났다. 스핀들톱의 유전은 당시 러시아령 바쿠(아제르바이잔)의 매장량을 넘는 것이었다. 스핀들톱 유전은 한시간에 5,000 배럴을 쏟아냈다. 당시 세계석유생산의 절반 이상이 스핀들톱에서 생산되었다.

 

텍사스에서는 1930년대에 또다시 대형 유전이 발견되었다. 193010월 텍사스 동부 킬고어(Kilgore) 지역의 한 농장에서 하루 50만 배럴이 생산되는 초대형 유전이 터졌다. 킬고어 유전을 찾아낸 사람은 당시 나이 70살인 컬럼버스 조이너(Columbus M. Joiner)였다. 사람들은 그를 미찬 사람이라 불렀지만, 끝내 성공했다. 당시 미국 언론들을 그를 두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우리를 인도한 제2의 모세라고 추켜 세웠다.

대공황 시기였음에도 일대에는 이듬해에 유정이 1,000개를 넘어섰다. 이전까지 발견된 유전에 비해 매장량이 5배에 이르렀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그들을 블랙자이언트라고 불렀다. 제임스 딘이 주연한 영화 <자이언트>(Giant)가 이 때를 배경으로 했다.

 


1) Geological Society, History of the oil and gas industry in Roma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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