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승가사에서 인도 스님 모습을 만나다
북한산 승가사에서 인도 스님 모습을 만나다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09.08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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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근 비봉에 진흥왕 순수비 터…진흥왕이 서울 내려다보고 통일 꿈꾸었을 듯

 

북한산 8부 능선 쯤에 있는 승가사(僧伽寺)를 올라가는 것 자체가 수행이요 고행이다. 서울 종로구 구기동 입구에서 승가사까지 길은 내내 오르막이다. 늦여름의 무더위에 그늘 하나 없는 길을 터벅터벅 걷노라면, 비구니 스님들이 꽤나 고생하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로가 하나 있는데 성능 좋은 지프가 아니면 오르기 힘들다고 한다.

 

승가사 입구에 있는 8각9층탑 /사진=박차영
승가사 입구에 있는 8각9층탑 /사진=박차영

 

입구에 속세 사람들을 처음 맞는 것은 89층탑이다. 20118월에 완공된 이 탑은 나름 웅장한 모습을 띠지만, 기계로 깎은 돌덩어리라는 인상을 지을수 없다. 종로 탑골공원의 원각사 10층 석탑과 같은 형태로 지었다고는 하나, 돌 깎는 기계의 기술이 이처럼 발전했구나 하는 느낌 정도. 이 절에 시줏돈이 많이 들어오는구나 하는 생각도 떠오른다.

 

승가사 대웅전에서 마애석불까지 108계단 /사진=박차영
승가사 대웅전에서 마애석불까지 108계단 /사진=박차영

 

승가사의 백미는 역시 대웅전에서 100m쯤 위에 우뚝 솟아 있는 마애여래 좌상이다. 보물 215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 불상은 화강암 자연석에 석공의 정성이 듬쁙 담겨 있음을 느낄수 있다. 잘 생긴 부처다. 미남형은 아니고, 호남형이다. 제작 연대는 고려 초기인 10세기 경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에서 마애불까지 계단의 수가 108개다. 불교에서 말하는 번뇌의 수다. 불자들이 이 계단을 오르면서 백팔번뇌를 깨우치라는 뜻일 게다.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사진=박차영
승가사 마애여래좌상 /사진=박차영

 

불상의 크기는 약 5m로 상당히 큰 작품이다. 조각 솜씨 또한 뛰어나다. 불상의 얼굴 모습이 좀 딱딱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잔잔한 미소로 인자하게 나를 내려다보는 것 같다. 불자가 아니라도 숙연해진다.

몸집이 건장하다. 고행한 모습은 아니다. 얼굴은 네모에 가까울 정도로 풍만하게 처리되었다. 오뚝하게 솟은 콧날과 꾹 다문 입, 가늘게 내려 뜬 눈 등이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매력은 눈동자다. 강한 것 같으면서도 자비로운 인상이 저 눈빛에서 나온다.

왼쪽 어깨에 걸쳐 입은 법의(法衣)의 주름선은 유려하고 활달하다. 자연석 자체가 밋밋해서인지 가슴의 입체감이 부족한 게 흠이다.

손 모양은 당당한 불격(佛格)을 나타내 준다. 왼손은 배 부분에 대고, 오른쪽 손은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놀려 놓고 손목을 안쪽으로 꺾이게 했다. 율동적인 면을 강조한 표현이다. 광배(光背)는 굵은 선으로 아무 장식 없이 조각되었다.

불상 머리에는 8각형의 뚜껑돌이 얹혀 있는데, 불상의 모리에 직접 얹지 않고 별도의 돌에 새겨 바위 벽에 끼워 놓았다고 한다. 자연석을 최대한 살려 제작한 게 엿보인다.

불상의 아래 부분에는 연꽃 무늬의 받침대를 새겨 놓았다. 불상 좌우에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불상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덮개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가사 대웅전 /사진=박차영
승가사 대웅전 /사진=박차영

 

행정구역으로는 서울 종로구 구기동으로, 승가사는 조계사(曹溪寺) 말사다. 신라 경덕왕 15(756)에 스님 수태(秀台)가 창건했는데, 당나라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로 지칭되던 인도 스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했다고 한다.

 

승가사 약사전 입구 /사진=박차영
승가사 약사전 입구 /사진=박차영

 

마애석불 초입에 약사전(藥師展)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승가굴(僧伽窟)로 알려져 있었는데, 신라 시대 이래 동굴에 법당을 지어놓고 불법을 닦았던 곳이다. 석굴에는 약수가 흘러 나오는데, 세종대왕 때 소현왕후가 병이 들어 이 물을 먹고 낳았다고 해서 약사전으로 호칭되었다.

 

약사전 내 인도고승 승가의 초상 조각 /사진=박차영
약사전 내 인도고승 승가의 초상 조각 /사진=박차영

 

약사전에는 인도 고승의 모습을 새긴 불상이 있다. 보물 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좌상이다.

인도의 고승으로 중국 당나라에 와서 전도에 전념하여 관음보살로까지 칭송받았던 승가대사의 모습을 새긴 초상(肖像) 조각이다. 머리에는 두건을 쓰고 얼굴은 넓적하면서도 광대뼈가 튀어나와 전형적인 시골 노인 같은 인상이다. 광배 뒷면에는 고려 현종 15(1024)에 지광스님이 중심이 되어 광유 등이 조각했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져 있다.

 

약사전 입구 암석에 추사 김정희가 세긴 영천이란 글씨 /사진=박차영
약사전 입구 암석에 추사 김정희가 세긴 영천이란 글씨 /사진=박차영

 

승가굴 입구 암벽에는 영천(靈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가 새겨 놓은 것이라 한다.

이 대목에서 왜 김정희가 등장할까. 김정희는 조선말 금석학의 대가였다. 그는 승가사 뒷산 비봉에 옛 비석이 있다는 말을 듣고 승가사를 찾았다. 순조 16(1816)의 일이다. 그는 역사가 오래됐다는 고비(古碑)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글자 해독에 들어갔다. 승가사에서 7일 동안 정진하며 판독했지만, 68자를 해독하는데 그쳤다. 이에 당대의 세도가 조인영(趙寅永)이 이 비문의 탁본을 떠 베이징으로 가는 사신에게 청나라 금석학자 유연정(劉燕廷)에게 의뢰해 120자의 뜻을 알게 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된 진흥왕순수비 (국보 3호) /문화재청

 

이리 하여 이 비문은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점령한후 시찰 나왔다가 세운 순수비임이 확인되었다.

진흥왕이 555년 북한산을 올랐을 때 법장 혜인(慧忍)이 수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승가사는 경덕왕에 앞서 진흥왕 때부터 불자들의 도량으로 활용되지 않았을까. 그 가능성이 높다.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터(사적 228호) /문화재청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터(사적 228호) /문화재청

 

승가사 뒤를 올라가면 비봉(碑峰)이 나온다. 비석이 있는 봉우리라는 뜻인데, 그 비석이 진흥왕 순수비다. 진짜 비석은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이 보관되어 있고, 비봉의 원래 지라엔 복제비가 설치되어 있다.

해발고도 580m, 서울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진흥왕이 서울 벌을 내려다보며 삼국 통일의 꿈을 꾸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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