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의 역사⑥…중동에서 대형 유전이 터지다
석유의 역사⑥…중동에서 대형 유전이 터지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11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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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페르시아, 1927년 이라크, 1938년 사우디-쿠웨이트서 유전 발견

 

중동의 석유는 오랜 역사를 갖는다. 그리스 역사가 플루타르크는 이라크 북부 키르쿠크 부근에 기름이 솟아나는 샘이 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중동의 석유개발은 20세기가 되어서야 시작되었다. 중동 유전 가운데 가장 먼저 개발된 곳은 페르시아(이란)였다.

 

윌리엄 다아시 /위키피디아
윌리엄 다아시 /위키피디아

 

페르시아 유전 개발은 한 영국인의 모험에서 시작되었다. 윌리엄 다아시(William Knox D'Arcy)는 영국에서 태어나 아버지를 따라 호주로 가 금광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자신이 투자한 모건 금광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 1889년 영국으로 돌아와 멋진 저택을 구입해 런던 사교계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19004월 파리박람회에서 다아시는 친구이자 페르시아 주재 대사를 역임한 헨리 울프(Henry Drummond Wolff)와 페르시아 장군 기타기(Antoine Kitabgi Khan)를 만났다. 이때 울프는 다이시에게 페르시아 석유개발에 참여하라고 권고했다. 이듬해초 다아시는 테헤란으로 가 페르시아 정부와 협상을 벌였다. 19015월 그는 페르시아 국왕 무자파르 알딘 샤(Mozaffar ad-Din Shah)를 만나 2만 파운드의 현금과 주식을 상납하는 조건으로 60년간 페르시아 전역(북부 제외)의 석유탐사권과 채굴권을 갖는 내용의 허가권을 얻어냈다. 그가 확보한 탐사 면적은 120, 한반도의 6배에 해당한다. 다만 석유채굴시 수입의 16%를 페르시아에 주기로 했다. 1)

 

다아시는 굴착기술자 조지 레이놀즈를 채용해 1902년부터 시추작업에 들어갔다. 그는 자신의 돈을 쏟아 부어 시추작업을 벌였다. 작업장에는 천연두가 번졌다. 도둑과 지역 군벌들이 협박하고 물은 구할수 없었다. 기온은 50도까지 올라갔다. 이런 난관 속에서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 착공한지 2년째 다아시는 16만 파운드를 다 쓰고 로이드 은행에서 18만 파운드나 끌어 써 한도를 초과했다. 이젠 돈을 끌어 들일 데가 없었다.

이때 영국해군이 적극 나서 투자자를 물색해주었는데, 그 회사가 버마 석유회사(Burmah Oil Company Ltd)였다. 다아시는 페르시아 국왕에게서 얻은 권리를 모두 버마 석유에 넘겨주고 투자를 받았다. 그래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

19081월과 3월 페르시아 남부지역 두 군데서 시추를 했다. 4월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다아시와 버마 석유회사는 이제 파산하기로 결정했다. 5월초 런던에 있던 다아시는 현장책임자 레이놀즈에게 최후의 전보를 보냈다. “돈이 다 떨어졌다. 작업을 멈추고, 직원들을 해고하라. 돈 될 만한 것은 항구로 보내 선적하고, 당신은 귀국하라.”

하지만 레이놀즈는 다아시의 지시를 지연시키며 시추공을 더 파내려갔다. 1908526일 지하 360m 지점에서 행운이 터져나왔다. 검은 액체가 지표면을 뚫고 솟아난 것이다.

레이놀즈는 런던의 다아시에게 짧은 전문을 보냈다. “시편 104153행을 보세요.” 다아시가 성경을 펴들고 그곳을 폈더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케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었도다라고 쓰여 있었다. 6년이나 기다리던 석유가 터진 것이다.

 

하지만 다아시는 페르시아 국왕에게서 얻은 권리를 모두 버마석유회사에 넘긴 상태였다. 버마는 다아시의 모든 노력의 결과물을 소유하게 되었다. 버마석유는 곧이어 자회사로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회사(Anglo-Persian Oil Co.)를 설립하고 페르시아 석유 채굴에 들어갔다. 이 회사는 1934년에 앵글로-이란 석유회사(Anglo-Iranian Oil Co.)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1954년 다시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ritish Petroleum Co.)로 이름을 바꾼다. 오늘날 영국 최대 석유회사인 BP가 바로 이 회사다. 2)

 

영국 정부는 노새 6,000마리를 동원해 사막을 가로지르는 222km의 송유관을 깔았다. 아바단에 현대식 항구와 정유공장이 들어섰다. 영국석유회사는 석유수입의 16%를 페르시아 정부에 주기로 한 계약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페르시아에서 석유가 터진후 영국은 오스만투르크가 지배하던 중동지역에 눈을 돌렸다. 영국은 1912년 다아시를 앞세워 투르크 석유회사(Turkish Petroleum Company)를 설립했다. 곧이어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중동지역을 지배하던 오스만투르크가 패배했다. 영국은 프랑스와의 밀약에 의해 유전지대인 이라크를 위임통치하게 되었다.

영국의 투르크석유회사는 1925년 이라크 석유회사(Iraqi Petroleum Company)로 이름을 바꾸고 이라크 자치정부와 75년 조건의 탐사권과 채굴권을 갖는다는 계약을 체결했다. 페르시아에서처럼 약간의 로열티는 주는 조건이었다. 이라크 석유회사는 키르쿠크 일대에서 시추작업에 들어갔고, 19271014일에 석유가 터져 나왔다. 지질학자들의 조사결과, 키르쿠크에 대규모 유전이 매장되어 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라크 키르쿠크 일대에서 원유가 분출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라크 키르쿠크 일대에서 원유가 분출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이라크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었다는 뉴스가 전해지면서 미국과 프랑스의 석유회사들이 뛰어들었다. 통치권을 위임받은 영국이 아라크의 석유를 독점할수 없었다. 미국과 프랑스는 1차 대전 승전국이었고, 이라크는 오스만투르크의 패전으로 생겨난 나라였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석유회사들은 1928731일 레드라인 협정(Red Line Agreement)에 합의하게 된다. 체결 당사자는 영국의 앵글로-페르시아 석유(후에 BP), 영국과 네덜란드 합작사 로열-더치 셸, 프랑스 석유회사(Compagnie Française des Pétroles, 후에 Total), 미국의 엑슨모빌, ▲아르메니아 석유사업가 칼루스트 굴벤키안(Calouste Gulbenkian) 5개사였다.

이 협정이 포괄하는 범위는 영국 보호령인 쿠웨이트를 제외하고 터키, 이라크, 시리아, 아라바이 반도를 포괄하는 지역이었다. 5개 회사는 레드라인 내에서 단독으로 시추하지 않는다는 포기각서를 쓰고, 중동 석유에 대해 배타적 권리를 갖는다고 선언했다. 중동 석유를 놓고 석유메이저들의 횡포가 시작된 것은 이 때부터다. 이 협정에 의해 4개 회사는 이라크 석유회사의 지분을 각각 23.5%씩 갖고 나머지 6%는 개인 굴벤키안에게 떼주었다.

레드라인 협정은 1948년까지 지속되었는데, 석유메이저들의 국제카르텔이었다. 후에 중동 산유국들이 석유주권을 되찾으면서 이 모델을 모방해 만든 것이 OPEC(석유수출국기구)이다. 3)

 

1928년 석유메이저들이 합의한 레드라인 /위키피디아
1928년 석유메이저들이 합의한 레드라인 /위키피디아

 

중동 최대산유국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개발은 페르시아나 이라크에 비해 늦었다.

사우디 석유탐사는 뉴질랜드 광산기술자 프랭크 홈스(Frank Holmes)1차 대전 중 터키 갈리폴리 전투에 참가했는데, 그곳에서 걸프지역의 유전에 관한 루머를 들었다. 전쟁이 끝난후 그는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이븐 사우드를 만나 탐사권을 획득했다. 그는 스위스 지질전문가를 불러 사우디 땅을 탐사케 했더니 위험한 도박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그는 은행에서 자금을 얻지도 못하고, 투자자도 구하지 못했다.

1927년 홈스는 미국 석유회사 걸프오일의 투자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걸프오일은 미국·영국·프랑스 석유회사들이 체결한 레드라인 협정을 준수했기 때문에 사우디측에서 거부했다. 사우디는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한 이후 이웃 헤자즈왕국을 합병해 독립한 나라였다. 사우디 국왕의 입장에서는 서양 회사들이 그어놓은 레드라인을 지킬 이유가 없었다. 걸프오일은 사우디 석유를 포기했고, 그 자리에 또다른 미국회사 소칼(Standard Oil of California, SOCAL)이 뛰어 들게 되었다.

소칼은 땅을 파기 시작한지 3년이 되던 19383월에 사우디 담맘(Dammam)의 지하 1,440m에서 원유를 발견했다. 사우디에서의 석유발견은 세계 석유사업자들을 설레게 했다. 초대형인데다 추가 발견 가능성이 높았다. 소칼은 60년간의 시추권을 얻었고, 사우디 유전에서 번 돈으로 오일 메이저로 부상했다. 자금의 셰브런(Chevron)이다. 4)

 

1938년 3월 사우디 담맘에서 원유가 터지는 모습. /위키피디아
1938년 3월 사우디 담맘에서 원유가 터지는 모습. /위키피디아

 

쿠웨이트는 영국보호령이었고, 레드라인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영국의 앵글로-페르시아가 독점권을 행사했다.

석유가 생산되기 이전에 쿠웨이트는 진주 채취를 하던 한적한 어촌이었다. 하지만 1905년 일본인 미키모토 고키치(御木本幸吉)가 진주 양식업에 성공한 이후 쿠웨이트 경제가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이웃 사우디가 경제적으로 압박했고, 대공황까지 겹쳐 어려운 상태였다.

쿠웨이트 왕가는 경제난 해소책으로 페르시아, 사우디, 바레인 등 이웃나라처럼 석유 발견 가능성을 타진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1938년 버건 유전에서 석유가 나오고, 산유국 대열에 끼게 되었다. 5)

 


1) Australian Dictionary of Biography, D'Arcy, William Knox (18491917)

2) Wikipedia, Anglo-Persian Oil Company

3) Wikipedia, Red Line Agreement

4) Wikipedia, History of the oil industry in Saudi Arabia

5) ESRI, A Brief History of Kuwait and O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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