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더드 오일①…록펠러 美 석유산업 독점하다
스탠더드 오일①…록펠러 美 석유산업 독점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13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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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유산업의 90% 점유…수평적 확장, 수직계열화로 거대기업 형성

 

스탠더드 오일(Standard Oil)1870년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서 존 D. 록펠러와 그의 파트너들이 창업해 1911년까지 41년간 존속한 미국의 거대 석유회사다. 이 회사는 1890년대에 미국 내 시장점유율 90%를 차지한 독점기업이자, 중국 등 해외에 석유류를 수출한 다국적 기업이다. 이 회사는 나중에 34개로 쪼개졌지만, 그 후손 회사들은 오늘날 엑슨모빌(ExxonMobil), 셰브런(Chevron), 아모코(Amoco), 매러손 석유(Marathon Petroleum) 등으로 이어져 세계석유시장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1)

스탠더드 오일은 존 D.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Sr)에 의해 만들어져 미국의 반독점법에 의해 해체되었다. 이 회사는 미국 역사상 최대 부호라는 존 록펠러를 탄생시켰고, 반독점법의 개념을 형성했으며, 미국의 석유메이저를 배태했다. 이 회사는 온갖 욕설을 얻어먹었지만, 미국에 석유를 대중화하고 소비가격을 떨어뜨리는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미국은 록펠러와 스탠다드 오일을 쓰러뜨렸지만, 오늘날 세계 석유패권을 휘두르는 이면에 스탠더드 오일이 있었음은 부인할수 없다.

 

18세의 존 록펠러 /위키피디아
18세의 존 록펠러 /위키피디아

 

록펠러는 1839년 뉴욕주 리치퍼드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목재상을 하면서 가짜 약품을 만들어 파는 일종의 사기꾼이었고, 그의 어머니가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록펠러는 부모를 따라 오하이오주로 이사를 해 그곳에서 학교를 다니며 부기를 배웠다.‘

그는 16세이던 1855년에 헤윗-터틀(Hewitt & Tuttle)이라는 농산물중계회사에서 첫 직장을 구했는데, 경리일을 보았다. 그는 경리일을 열심히 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농산물을 거래하면서 고시가격과 실제가격에 차이가 있고, 리베이트가 거래된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대금 회수도 했다. 채무자가 돈을 제때 갚지 않을 때엔 귀챦게 해야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는 암산의 명수였고, 암산 경기에서 유대인에게지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2)

 

그는 첫 직장에서 배운 사업 감각으로 20세가 되던 1859년에 모리스 클라크(Maurice B. Clark)와 함께 4년간 봉급쟁이를 하면서 배운 농산물 중계사업에 뛰어들었다. 초기 자본금을 4,000 달러로 하고 각기 2,000달러씩 대기로 했는데, 록펠러는 가진 게 800 달러밖에 없어 아버지에게 10% 이자 조건에 1,000달러를 빌려 메웠다. 클라크-록펠러(Clark & Rockefeller) 회사는 성공했다.

1960년 남북전쟁이 터지자 록펠러는 군에 입대해야 했는데, 돈을 주고 대리인을 사서 병역을 피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군에 가고 싶었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의 동업회사는 북군에 농산물을 납품해 많은 이윤을 남겼다.

남북전쟁 직전인 1859, 펜실베이니아주에서 기름이 터지고 전쟁으로 인해 기름 값이 급등했다. 전쟁 전 배럴당 35 센트하던 유가는 186213.75 달러에 거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 채굴에 뛰어들었고,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과잉생산으로 유가가 폭락했다.

록펠러는 유가가 불안하지만 정유업은 장사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등유 1배럴에 13달러일 때, 정유 마진은 5~8달러에 달했다. 기름을 정제하는 상업이 채굴하는 사업만큼의 이익을 냈다. 당시 정제업은 두세 사람이 1,000~2,000 달러를 투자해 생산하는 영세업자가 대부분이었다.

1863, 록펠러는 동업자 클라크의 형제들과 석유기술자 새무얼 앤드류스(Samuel Andrews)와 함께 앤드류스-클라크사(Andrews, Clark & Company)라는 정유회사를 차렸다.

당시 정유업자들은 등유만 뽑아내고 나머지는 강이나 들판에 버렸다. 하지만 록펠러는 등유를 뽑고 남은 타르를 활용해 석유젤리, 파라핀 왁스, 아스팔트 등을 만들어 팔았다. 배관공도 외주를 주지 않고 직접 채용하고 시설물에 필요한 나무를 직접 구매했다. 이런 노력을 통해 정제 비용을 배럴당 2.5 달러에서 0.96 달러로 낮췄다.

이 과정에서 동업자 클라크 형제들과 의견차이가 발생했다. 클라크 형제들은 자신들의 지분을 털고 다른 정유회사를 차리려 했는데, 록펠러는 그 주식을 72,500 달러에 사들였다. 그 금액은 클라크 형제들이 놀랄 정도였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00만 달러에 이른다. 그가 비싼 금액을 치른 것은 정유산업이 성장할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후 그는 막대한 자금을 차입해 정유회사에 투자하고 이익을 내서 다시 투자했다.

1866년에 그의 동생 윌리엄 록펠러도 클리블랜드에서 정유회사를 차려 운영했는데, 형의 회사와 합병했다. 1867년엔 헨리 플래글러(Henry Morrison Flagler)를 파터너로 영입해 회사를 록펠러-앤드류스-플래글러(Rockefeller, Andrews & Flagler)로 바꾸고, 이듬해에 뉴욕에 영업대리점을 냈다. 이 때 이미 록펠러의 회사는 세계 최대 정유회사로 부상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클리블랜드 정유공장 (1897) /위키피디아
스탠더드 오일의 클리블랜드 정유공장 (1897) /위키피디아

 

록펠러는 파트너십을 청산하고 대기업에 걸맞게 주식회사로 전환하기로 하기로 했다. 1870110일 그와 파트너들은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했다. 정유업에 뛰어든지 7년만이고, 이때 록펠러의 나이는 31세였다.

스탠더드 오일의 초기 자본금은 100만 달러였고, 록펠러의 지분은 27%였다. 이때 이 회사는 미국 석유산업 전체의 10분의1을 차지하고 있었다.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은 대대적인 M&A와 확장에 나섰다. 당시 미국의 정유 시설은 수요의 3배나 과잉이었다. 그는 미국 전체적으로 과잉 설비를 줄여 합리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대대적인 투쟁에 나섰다. 경쟁회사를 쓰러뜨려 먹거나 부실회사를 인수하는 방식이었다. 록펠러는 철저하게 비밀주의를 채택했다. 그는 매수할 상대를 비밀에 붙여두고 엉뚱한 회사를 지목했다. 인수대상 업체는 선뜻 회사 정보를 흘려주었고, 조용하게 스탠더드 오일의 입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피인수 회사에 대해 넉넉하게 대금을 치렀다고 한다. 게다가 피인수 회사의 유능한 경영진을 스탠더드 오일에 채용해 활용했다. 록펠러가 후에 경영일선에서 물러났을 때 스탠더드 오일을 경영한 존 아치볼드(John Dustin Archbold)는 피인수회사의 경영자였다.

1871년 록펠러는 몇몇 정유업자와 당대 철도 왕으로 불렸던 윌리엄 밴더빌트(William Henry Vanderbilt) 등 철도사업자와 남부발전협회(South Improvement Company)라는 카르텔을 조직해 회원사들에게 철도 운임 50%를 인하해 주기로 비밀리에 합의했다. 하지만 이 비밀이 새나갔다. 정유와 철도업계 두 거물의 담합은 아웃사이더들이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결국 카르텔은 무산되었지만, 록펠러는 석유 수송이 사업의 관건임을 간파했다.

회사 설립 3년째인 1872, 스탠더드 오일은 클리블랜드 정유회사 26개 중 22개를 합병했고, 그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찰스-프랫사(Charles Pratt and Company)도 회사를 인수해달라고 요청하는 일마저 일어났다. 찰스 프랫과 헨리 로저는 스탠더드 오일의 파트너로 참여하게 된다. 3)

 

스탠더드 오일의 자산민 수익, 배당 추이 /위키피디아
스탠더드 오일의 자산민 수익, 배당 추이 /위키피디아

 

그는 산업의 구제자임을 자처했다. 록펠러는 자비의 천사로서 경영난에 시달리는 회사를 인수해 경쟁력을 높이고, 효율적으로 민들며 정유산업 과잉을 해소하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는 수평적 확대와 함께 수직계열화를 추진했다. 그는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고 유조열차를 만들고, 가정배달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석유제품 개발에 나서 페인트에서 젤리, 검에 이르기까지 300개 상품을 내놓았다. 스탠더드 오일 설립 10년도 되지 않은 1870년대말에 이미 미국 정유시장의 90%를 차지하게 된다.

스탠더드 오일은 당시 각 주의 법령에 맞춰 주별로 회사를 설립했다. 스탠더드오브뉴저지, 스탠더드오프뉴욕 등이 설립되었고, 주주들이 각 회사를 지배하는 형식을 취했다. 록펠러를 중심으로 37명의 주주들이 9개의 신탁회사를 통해 각 자회사를 지배했다. 1882년에 신탁회사들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Standard Oil Trust)를 결성했고, 1885년엔 트러스트의 본사를 뉴욕 브로드웨이 26번지에 두었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연방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았으며, 자회사를 통해 운영되었기 때문에 각 주의 법률적 차이를 극복했다. 트러스트는 때로 각주의 입법부를 뇌물과 암거래로 구워 삶아 친구로 만들었고, 변호사 팀은 언제라도 트러스트의 행동을 돌보아 주었다. 트러스트의 수입은 웬만한 주 정부의 수입을 상회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유럽, 중동, 아시아에 등유, 난로용연료, 선박용 기름을 수출했고, 1885년에 매출의 70%가 수출에서 발생했다. 4)

 

하지만 스탠더드 오일의 덩치가 커질수록 업종내 경쟁자는 줄어들었지만, 업종 외부의 적이 많아졌다. 사회적 여론을 좌우하는 언론과 정치인이 적으로 부상했다.

 

존 록펠러 /위키피디아
존 록펠러 /위키피디아

 


1) Wikipedia, Standard Oil

2)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앤써니 심슨, 책갈피(2000), P44

3) Wikipedia, John D. Rockefeller

2)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앤써니 심슨, 책갈피(2000),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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