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븐 시스터스③…1차 대전 승자는 석유메이저
세븐 시스터스③…1차 대전 승자는 석유메이저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17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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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이 전쟁터 되다…석탄이 저물고 석유가 부상하는 분수령

 

1차 세계대전(1914~1918)은 전쟁에 소요되는 연료가 석탄에서 석유로 전환되는 분수령이 되었다.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 연합군측은 세계 원유생산의 90%를 차지했고, 독일-오스트리아의 동맹국측은 3%에 불과했다. 미국이 64%를 차지했고, 러시아 16%, 멕시코 7%, 루마니아 3%였다. 모두 연합국에 가담한 나라였다.

독일의 계산과 달리 전쟁은 장기화했고, 교전국들은 석유를 연료로 하는 트럭, 탱크, 선박, 잠수함, 항공기를 개발, 투입했다. 연합국은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석유를 공급받았지만, 동맹국들은 극심한 석유부족에 시달렸다. 1차 대전은 역사상 처음으로 루마니아와 러시아 바쿠의 유전지대가 전쟁터가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1)

 

그래픽=김현민
그래픽=김현민

 

전쟁 전에 석유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은 영국의 해군제독 존 피셔(John Fisher)였다. 그는 영국 함대를 석탄화력 중심형에서 석유연료형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에서는 당시 바쿠 유전에서 나오는 중유를 연료로 사용하는 증기선을 운용하고 있었다.

피셔는 조사를 통해 석유가 석탄보다 질적으로 월당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석유를 태워 디젤 모터를 돌려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지만 석탄을 사용하는 전함은 연기를 내뿜어 10km 밖에서도 탐지되었다. 또 석탄을 때는 배의 모터는 4~9시간이 걸려야 가동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이면 완전 가동되었다. 전함 한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이 12시간 작업하면 되었지만, 석탄으로 그만한 에너지를 얻으려면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 했다. 엔진 무게에서도 석유동력선은 석탄동력선의 3분의1에 지나지 않았고, 하루 연료량도 4배의 차이가 났다.

하지만 피셔의 주장은 먹혀들지 않았다. 기존의 전함에 익숙한 해군장교들이 신형선박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피셔 제독의 견해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인물은 그의 친구인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1911년 해군장관에 부임하면서 석유를 동력으로 하는 군함으로 교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처칠은 또 100% 영국자본인 앵글로-페르시아 석유(BP)에 정부 투자를 요구해 전쟁 직전인 1914년에 이 석유회사를 국영기업으로 전환했다. 해군에 소요되는 기름을 공급받기 위해서였다.

영국은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독일에게 석유가 아킬레스 건이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1차 대전에 처음 등장한 탱크. 영국 탱크들이 런던 시내를 퍼레이드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차 대전에 처음 등장한 탱크. 영국 탱크들이 런던 시내를 퍼레이드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이에 비해 독일은 초기에 철도 운송을 계산에 넣고 전략을 수립했다. 당시 철도망에는 석탄을 연료로 하는 증기기관차가 활용되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Schlieffen Plan)은 러시아의 철도가 취약하므로 군사력 동원이 늦어질 것으로 계산하고, 자국의 원활한 철도망을 활용해 벨기에를 돌아 프랑스 파리를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이 작전은 벨기에에서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시간을 끄는 사이에 러시아가 군대를 동원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프랑스가 독일에 반격작전을 펴면서 기름으로 움직이는 택시를 활용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개전 초기인 19148월말, 독일군은 프랑스 국경을 돌파해 쾌속으로 질주했다. 프랑스는 국경에서 제대로 독일군을 방어하지 못했다.

파리에는 예비병력이 있었지만 철도가 파괴되어 병력을 전선으로 증파할 방법이 없었다. 독일군은 프랑스가 패주하는 뒤를 따라 하루에 30km씩 진군해 파리 외곽 40km 지점의 마른 강(Marne river)에 이르렀다.

이때 프랑스군 참모총장 조프르(Joseph Joffre)는 파리에 등록된 1,500대의 택시에 징발령을 내렸다. 966백대의 택시는 일제히 예비병력을 싣고 파리 시내를 출발해 50km 전방에 내려놓고 돌아왔다. 당시 파리 택시의 주종은 2기통에 배기량 1,205cc 르노 자동차였다. 소형차였지만 파리 택시들은 한 대에 10명의 군인을 구겨 넣고 전선으로 달려갔다. 독일군에 들키지 않기 위해 헤드라이트는 켜지 않고 백라이트만 켰다. 수송한 인원은 6,000명이었다.

택시가 병력을 수송한 후 전선의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원기를 되찾은 프랑스군은 강력한 반격작전을 펼쳤고, 독일군은 퇴각했다. 프랑스군은 마른 전투(Battle of the Marne)에서 독일군을 처음으로 패퇴시키고, 전세를 뒤집었다. ‘마른의 기적이라 불리는 이 전투의 일등공신은 택시기사와 르노 택시였다.

파리 택시의 기동성은 석유를 연료로 하는 내연기관의 우수성을 입증했다. 마른 전투 당시 프랑스군은 트럭 110, 비행기 130대을 보유했지만, 4년 뒤엔 트럭 7만대, 비행기 12,000대를 확보하게 되었다. 서부전선에 투입된 영국 원정군에겐 전쟁 초기에 오토바이 15대와 자동차 827대밖에 없었으나, 전쟁이 끝날 무렵데 자동차 79,000, 오토바이 34,000대를 동원했다.

이전 전쟁에서 승리의 결정적 요소가 되었던 말과 기병대는 빠르게 자취를 감추었다. 대신에 내연기관을 장착한 자동차, 항공기, 선박이 주류로 부상했다. 탱크는 영국군에 의해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들 이동장비의 원료는 모두 석유였다. 3)

 

마른 전투에 동원된 파리택시 모형(2008년 파리 모터쇼) /위키피디아
마른 전투에 동원된 파리택시 모형(2008년 파리 모터쇼) /위키피디아

 

1차 대전은 교전국에게 석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통감케 했다. 전쟁이 장기화하고 전선이 확대됨에 따라 항공기, 자동차, 전차가 증가했고, 유조선은 석유 공급의 생명선이 되었다. 프랑스 총리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석유 한 방울은 피 한 방울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했고, 프랑스의 포쉬(Ferdinand Foch) 원수도 우리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석유를 확보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오직 패배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영국의 정치인 커즌( George Curzon) 경은 연합국은 석유의 물결을 타고 승리의 해변에 도착했다고 술회했다.

독일은 절망적일 정도로 석유부족에 시달렸다. 이에 비해 세븐 시스터스라 불리던 석유메이저들은 모두 연합국 편이었다. 영국은 BP가 페르시아(이란)에서 원유를 싣고 왔고, 혼혈기업 로열더치셸은 멕시코만과 인도네시아에서 석유를 가져왔다. 네덜란드-영국 합작회사인 로열더치셸은 네덜란드가 중립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기업임을 자처했다. 최대 공급선은 미국이었고, 연합국 석유의 80%가 미국에 의존했다. 연합국 석유의 4분의1은 미국 엑슨에 의해 공급되었다. 4)

 

1차 대전 때 독일제 포커 비행기 /위키피디아
1차 대전 때 독일제 포커 비행기 /위키피디아

 

국제석유전문가 대니얼 예긴(Daniel Yergin)“1차 대전은 인간과 기계의 전쟁이었고, 그 기계는 기름에 의해 동력을 얻었다고 말했다. 그는 또 1차 대전에서 최초로 유전을 둘러싸고 전투가 벌어졌다고도 평가했다. 5)

미국의 참전을 촉발한 지머만 전보(Zimmermann Telegram) 사건은 독일이 멕시코로 하여금 미국의 배후를 교란하려는 의도와 함께 당시 세계 3위 산유국이던 멕시코 유전을 탐냈던 음모였다. 독일의 이 음모는 오히려 역풍을 초래해 미국을 참전케 함으로써 석유공급이 더 조이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독일은 석유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1916년말에 독일은 루마니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영국은 루마니아에 원유시설을 원유시설을 폭파하라고 권고했다. 루마니아는 영국의 요구를 받아들여 1,500개의 유정과 1,000개의 시추시설을 파괴했다. 정유공장 70곳과 탱크에 저장된 원유 80만톤이 불태워 졌다.

전쟁 막비지인 19188월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 혁명으로 공백이 생긴 바쿠 유전을 공격했다. 방어에 나선 영국군은 후퇴하면서 유정을 모두 폭파시켜버렸다. 결국 석유공급선이 모두 막히면서 오스만투르크와 독일은 순차적으로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1차 대전 때 루마니아 유전을 공습하는 미 공군 B-24 /위키피디아
1차 대전 때 루마니아 유전을 공습하는 미 공군 B-24 /위키피디아

 

1차 대전 기간 동안 석유는 군대의 기계화와 산업화를 이끌었고, 전투의 요인이 되었다. 석유부족에 시달리던 동맹국은 나중에 석유를 구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석유공급이 모두 끊긴 날과 항복을 선언한 날이 비슷하게 일치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기름을 확보하는 것이 전쟁의 성패를 갈랐다. 6)

전쟁이 끝난후 승전국들은 석유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영국은 오스만투르크에서 갈라져 나온 중동 유전에 매달리게 되었고, 미국도 중동으로 뛰어들었다. 전쟁 중에 조국에 헌신했던 석유메이저들은 이제 국가적 이해에 걸린 해외석유확보에 참가하게 된다.

 


1) Encyclopedia.1914-1918 online,net, petroleum

2)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윌리엄 엥달, 도서출판 길(2007), P43

3) 부의 역사, 권홍우, 인물과 사상사(2008), P333~338

4)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서니 심슨, 책갈피(2000), P93

5) The conversation, How World War I ushered in the century of oil

6) Military Hisory Now, Of Blood and Oil How the Fight for Petroleum in WW1 Changed Warfare Fore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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