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전쟁⑧…사우디 국왕의 경고 무시한 미국
석유전쟁⑧…사우디 국왕의 경고 무시한 미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27 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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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디와 이집트, 석유무기화 결정…유가 인상과 공급 중단 단행

 

사우디 아라비아 주도로 아랍산유국들이 19731016일부터 두달 사이에 중동산 원유 가격을 배럴당 3.01달러에서 11.65달러로 무려 4배나 올렸다. 이를 우리나라와 일본에선 오일쇼크)라 하고, 미국에선 석유위기(oil crisis)라 한다. 우리나라 입장에서 갑자기 닥친 일이어서 쇼크라 했지만, 미국은 사전에 석유시장에 위기가 닥쳐오리라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미국 정부는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었을 뿐이다.

 

1967년에 일어난 6일 전쟁(Six-Day War)은 아랍인들에겐 수치였다. 이스라엘이 기습공격으로 이집트의 시나이반도와 수에즈운하 동안을 점령하고, 시리아의 골란고원을 장악했다. 서구언론들은 덩치만 컸을뿐 맥없이 무너진 아랍국가들을 조롱했다. 전쟁이 터지자 유대인 유학생들은 조국을 구하기 위해 귀국했는데, 아랍 학생들은 도망쳤다는 비아냥이 서구언론에 회자되었다. 아랍인들은 이런 수치를 곱씹으며, 석유를 무기화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세계석유시장의 주도권은 미국-영국의 7대 석유메이저(seven sisters)에서 산유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969년 무아마르 가디피 대령은 리비아 쿠데타에 성공한 후 선진국 석유회사들을 각개격파하며 유가 인상을 단행했다. 이에 자극받은 아랍 산유국들은 1971년 테헤란협정과 트리폴리협정을 통해 소비국들의 반대를 꺾고 유가 인상을 결정했다.

1971815일 미국의 리처드 닉슨 정부는 금본위제도에서 이탈한다고 발표함으로써 주요통화는 플로팅 시스템으로 전환되었고, 세계적인 석유수요가 급증해 석유부족 사태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변화는 OPEC의 주도적 위치를 강화했다. 1)

 

국제유가 추이 /위키피디아
국제유가 추이 /위키피디아

 

사우디 아라비아는 중동에서도 미국에 가장 우호적인 나라로 인식되고 있었다. 엑슨, 모빌, 소칼, 텍사코등 미국 4대 회사가 설립한 아람코(Aramco)가 석유를 채굴해 주었고, 미국은 국내생산으로 부족한 석유를 사우디에서 도입했다. 하지만 사우디의 파이잘(Faisal) 국왕은 중동국가, 특히 이집트로부터 강한 압박을 받고 있었다. 파이잘은 이집트 안와르 사다트(Anwar Sadat) 대통령에게서 사우디가 아랍의 결속을 해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있었다.

1971년 알제리가 프랑스의 석유이권 51%를 국유화했고, 리비아가 영국 BP의 모든 자산을 국유화했다. 1972년에는 이라크가 석유회사 IPC의 외국지분을 국유화하고 프랑스 CFP의 몫만 남겨두었다. 프랑스는 자국이익을 우선 추구하며 영국-미국과 반목하는 상태로 되었다. 차츰 아랍의 움직임에 서방세계가 분열하는 조짐을 보였다.

사우디 석유장관 아흐메드 자키 야마니(Ahmed Zaki Yamani)도 미국회사가 100% 참여한 아람코 지분의 일부를 달라고 요구했다. 야마니는 한꺼번에 외국 석유 회사를 국유화할 경우 보복조치로 공장가동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해 단계적으로 침투하는 방법을 택했다. 미국 회사들은 다른 아랍국에서 전면 국유화하는 조치를 목격하고 1972년에 아람코의 지분 25%를 사우디에 내놓고 1983년까지 단계적으로 51%까지 내어주는 협정에 동의했다.

 

사우디 파이잘 국왕(왼쪽)과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위키피디아
사우디 파이잘 국왕(왼쪽)과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 /위키피디아

 

분위기는 1973년 들어 급격하게 변했다. 이집트와 시리아가 6년전의 치욕을 설욕하기 위해 이스라엘에 보복전쟁을 준비하면서부터였다.

그해 5월말 사우디의 파이잘 국왕은 아람코의 주주회사인 엑슨, 모빌, 소칼, 텍사코의 대표자들을 왕궁으로 불렀다. 파이잘이 이집트를 방문해 사다트 대통령으로부터 미국을 향해 단안을 내리라고 촉구받은 직후였다.

국왕은 미국 기름쟁이들에게 경고했다. “미국이 우리 왕국을 지지해 주지 않기 때문에 우리 왕국이 고립당하는 것을 나는 묵과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간다면 당신네들은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다. 미국의 참다운 이익이 어디에 있는지 미국인들에게 전해주길 바란다.”

파이잘 국왕이 모든 것을 잃고 말 것이라고 한 말은 석유국유화를 시시한 말이었다. 당황한 네 명의 미국 석유대표들은 본국에 급보를 올렸다. 4개 회사의 간부들은 벡악관과 국무부, 국방부를 찾아가 미국이 중동문제에 중립적 태도를 취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국무부측은 자기네들이 얻은 정보로는 파이잘이 허세를 부리고 있다고 판단했고, 이번에도 사다트의 압력을 물리칠 것이라고 판단하고 석유회사들의 요구를 무시했다. 국방부도 자체정보망을 통해 아랍국가들이 절대로 단결하지 않을 것이며 파이잘이 미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결국 석유메이저들의 설득은 워싱턴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

 

823일 이집트의 사다트는 사우디의 수도 리야드를 은밀하게 방문하고 석유감산을 의논하고 돌아갔다. 그 직후 리비아의 가다피는 리비아의 모든 석유회사 이권의 50%를 국유화하는 조치를 내렸다. 여기에는 미국의 액슨, 모빌, 텍사코, 소칼 등의 회사가 포함되었다. 이어 가다피는 유가를 배럴당 6달러로 두배나 올렸다.

이번엔 사우디의 야마니 석유장관이 미국에 대한 석유공급 삭감 가능성을 경고했다. 닉슨 대통령은 TV연설을 통해 “20년전 이란의 모사데크의 경험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석유국유화조치 또는 감산조차가 나오면 레짐체인지(Regime Change)를 할수도 있다는 경고였다.

 

1973년 10월 7일,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건너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1973년 10월 7일, 이집트군이 수에즈운하를 건너가고 있다. /위키피디아

 

1973106일은 유태인들에게는 욤키푸르(Yom Kippur)라는 최대 명절이었고, 아랍인들에겐 라마단(Ramadan) 기간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날 금식을 하며 하느님께 죄를 회개하며 용서와 화해를 실천한다. 직장인들은 대개 휴무하고 전선의 군부대에서도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놓은채 대대수 군인들이 귀가해 명절을 보내고 있었다. 시민들은 TV나 라디오 시청도 하지 않고 전화도 꺼놓고 지냈다. 이스라엘 첩보기관 모사드도 적의 수상한 이동을 감지했지만, 단순한 훈련으로 치부하고 말았다.

이집트의 사다트는 이 허점을 복수의 기회로 삼았다. 이집트는 시리아와 연합군을 형성해 6년전에 빼앗긴 시나이반도와 수에즈 운하, 골란고원을 도로 찾고, 나아가 이스라엘을 지중해로 쓸어 넣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106일 오후 2시 이집트군은 스에즈 운하를 건너 시나이반도로 진격하고, 동시에 시리아군은 수많은 탱크를 앞세워 골란고원을 넘어왔다.

처음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우세했다. 이집트군는 75만 병력에 소련제 탱크 3,200, 미사일(SA-6)까지 총동원했다. 이스라엘 병력은 이집트의 3분의 1도 되지 않았고, 개전 초기에 욤키푸르 명절 때문에 병사들에게 동원명령이 전달되지 못했다. 개전 48시간 만에 이스라엘은 17개 여단이 전멸되었다. 시리아도 소련제 무기를 앞세우며 이스라엘 북부 골란고원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집트군은 수에즈 운하를 돌파하고 시나이반도의 이스라엘 방어선을 돌파했다.

3일째 되는 날, 이스라엘군은 기습공격에 대한 패배를 극복하고 전선을 교착상태로 만들었다. 더 이상 이집트와 시리아군이 밀고 들어오지 못했다.

이를 기화로 이스라엘군은 우선 전력이 약한 시리아 공격에 집중했다. 이집트는 나중에 상대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스라엘군은 시리아군에 맹공을 퍼부어 전쟁개시 5일째인 11일에 골란고원에서 반격에 성공했다. 시리아군은 골란 고원에 800여 대 이상의 전차를 버리고 철수했다. 이스라엘군은 골란고원에서 전력을 빼돌려 시나이 전선에 투입해 16일 새벽에 운하를 도하하고, 이집트의 수에즈 시까지 진격해 초전의 패배를 만회했다.

 

욤키푸르 전쟁에서 부서진 이스라엘 탱크 /위키피디아
욤키푸르 전쟁에서 부서진 이스라엘 탱크 /위키피디아

 

전쟁은 확전 조짐을 보였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무기를 제공하고, 소련이 아랍을 지원하고 나섰다. 이스라엘은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외곽을 포격하기 시작했고, 수에즈 운하 도시에 대한 대대적인 반격을 시도했다.

결국 유엔이 중재에 나서 1022일 유엔 중재안이 발표되었다. 양측은 유엔 중재안으로 놓고 다툼을 벌여 다시 전투를 벌였지만, 10252차 휴전안이 발표되어 전쟁은 발발 19일만에 종결되었다.

이 전쟁은 이스라엘측에선 욤키푸르 전쟁, 아랍측에선 라마단 전쟁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 제4차 중동전쟁이라고도 한다. 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최신식 무기가 총동원되었기 때문에 엄청난 인명피해를 냈다. 이스라엘 측에선 사망자 2,500~2,800, 부상자 7,200~8,800, 포로 293명의 인명피해를 냈다. 아랍 측에선 이집트 5,000, 시리아 3,000명등 모두 8,000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관측이다. 부상자만도 아랍측에서 18,000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괴된 무기도 엄청났다. 이스라엘은 탱크 400대가 파괴되고, 600대가 고장났으며, 102대의 전투기를 잃었다. 아랍 탱크는 2,250대를 잃었으며, 이중 400대가 이스라엘에 빼앗겼다. 아랍국의 전투기는 334대나 잃었다. 어쨌든 당시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서 부서진 무기들로 인해 세계 고철시장의 관심이 모아지기도 했다.

이 전쟁은 서로 엄청난 피해를 입은채, 어느쪽도 이기지 못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승리의 자신감에 차있었다. 더 이상 이스라엘과 그 배후의 미국에 밀리지 않고 아랍의 주도권을 쥐었다고 판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이 만만히 공격할수 없는 상대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3)

 

이 전쟁은 오일쇼크를 유발했다. 이 전쟁으로 중동 산유국들이 이스라엘을 지지한 서방에 경제적 피해를 주기 위해 석유수출을 금지하는 바람에 국제유가가 급등했다.

그해 1016일 페르시아만의 6개 석유수출국들은 회의를 열어 원유가격을 배럴당 3.01달러에서 5.11 달러로 70%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어 이스라엘이 아랍 점령지역에서부터 철수하고 팔레스타인의 권리가 회복될 때까지 매월 원유생산을 매달 5%씩 감산하고, 미국과 네덜란드에 대한 석유수출을 전면중단한다고 결정했다.

중동에서 석유를 정치적인 무기로 사용하게 된 것이다.

 


1) Wikipedia, 1973 oil crisis

2)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서니 심슨, 책갈피(2000), P297~320

3) Wikipedia, Yom Kippur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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