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전쟁⑨…1973 오일쇼크, 석유파워 시프트
석유전쟁⑨…1973 오일쇼크, 석유파워 시프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09.28 13: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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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메이저 시대 가고, 아랍 산유국 시대 등장…국제젤서 개편

 

1973년에 발생한 1차 오일쇼크를 욤키푸르 전쟁의 탓으로 돌리는 주장이 많다. 하지만 전후 맥락을 살펴 보면 전쟁은 아랍 측에 유가인상과 석유산업 국유화의 명분을 제공했을 뿐이고, 석유위기는 산유국과 석유메이저의 힘 대결에서 나온 결과라는 해석이 나온다.

그해 1016OPEC이 유가를 70% 올린 직후 사우디의 오마르 사카프(Omar Al Saqqaf)를 비롯해 아랍 4개국 외무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했다. 아랍 외무장관들은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헨리 키신저 외교담당 보좌관을 만났다. 사카프는 파이잘 국왕의 친서를 닉슨에게 전달했다. 사우디 국왕의 서신에는 미국이 이틀 내에 이스라엘에 대한 무기 제공을 중단하지 않는다면 석유수출금지 조치(엠바고)를 단행하겠다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닉슨은 미국이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이유를 되풀이할 뿐 파이잘 국왕의 요구에 답변을 피했다. 같은날, 닉슨은 미국 상원에 22억 달러 규모의 이스라엘 원조안을 호소했고, 상원은 압도적 표결로 법안을 의결했다.

사카프는 아무런 소득 없이 귀국했다. 1019일 리비아는 미국에 대해 석유수출 금지조치를 취했고, 다음날인 20일 사우디아라비아도 미국에 대한 수출금지를 단행했다. 미국이 가장 우호적이라고 믿었던 사우디가 초강수를 둔 것이다. 1)

 

전쟁은 1026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포성은 멎었지만 사우디와 아랍측의 압박은 끝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서 퇴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방세계와 아랍과의 관계는 악화되어 갔다.

욤 키푸르 전쟁 도중에 단행한 산유국의 유가 인상은 형식적으로는 산유국과 석유메이저들의 협의에 의한 것이었다. 처음에 석유회사들은 15% 인상안을 제시했고 산유국들은 두배인 배럴당 6달러로 인상할 것을 제시했다. 결국 산유국의 주장이 대부분 반영되어 배럴당 3.01 달러에서 5.11달러로 낙착되었다.

이게 마지막이었다. 더 이상 OPEC은 회의에 석유회사들을 부르지 않았다. 산유국들은 자기네끼리 모여 일방적으로 유가를 결정하고 생산량을 조절했다. 아랍에 어떤 나라가 있는지도 모르던 미국인과 유럽인들은 갑자기 뉴스에 등장한 파이잘 국왕을 알게 되고 쿠웨이트와 이라크란 나라를 들여다 보게 되었다.

 

아랍 석유생산국회의(OAPEC) 회원국 /위키피디아
아랍 석유생산국회의(OAPEC) 회원국 /위키피디아

 

전쟁이 끝난후 산유국들은 이스라엘이 6일 전쟁전의 영토로 돌아갈 것을 요구했다. 즉 시나이반도를 이집트에, 골란고원을 시리아에 내주라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랍측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아랍 산유국들은 또다시 보복을 준비했다.

석유시장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유가 인상보다 감산 조치였다. 아랍산유국이 석유를 매달 5%씩 감산한다고 밝히자, 소비국들은 가격보다는 수급에 치중하게 되었다. 중동산 값싼 기름을 펑펑 쓰던 미국과 유럽은 한번도 기름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기름 공급이 중단되면 자동차는 물론 공장이 서야 한다. 석유회사는 물론 각국 정부가 나서 기름 시장에 몰려들었다. 시장 유가는 공시가격(posted price)보다 높게 치솟았다.

1216일 이란 국영석유회사가 현물시장에 기름을 내놓았는데 공시가보다 3배가 넘는 배럴당 17달러에 거래되었다. 석유메이저들은 산유국에게서 공시가격으로 배분물량을 받았지만, 물량이 모자라는 독립계 석유회사들이 핫마켓(hot market)으로 달려간 것이다.

산유국들은 여기에서 힘을 얻었다. 70% 올린 배럴당 5달러대의 가격도 싸다는 결론이 났다. 1222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아랍 산유국이 모였다. 그들은 이스라엘이 점령지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또다시 기름 가격 인상을 토론했다. 이란의 팔레비 국왕은 배럴당 14달러를 주장했고, 사우디의 자키 야마니 석유장관은 너무 올리면 세계경제가 붕괴되고, 그러면 산유국도 타격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아랍국들끼리 옥신각신 한 끝에 공시유가를 11.65달러로 올리기로 합의했다. 두달 사이에 국제유가는 배럴당 3.01달러에서 5.11달러, 또다시 11.65 달러로 네 배나 오르게 되었다.

 

이제 세븐시스터스라 불리며 석유시장을 좌지우지하던 미국-영국의 석유메이저들은 이빨 빠진 사자가 되어버렸다. 소비국들은 그동안 미국과 영국 회사들이 공급해주던 석유가 갑자기 가격이 오르고 그마저 공급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게 되었다.

국내에서 석유를 생산하던 미국도 타격의 타격이 가장 컸다. 세계최대 석유소비국인 미국은 국내생산으로 모자라는 15%를 해외에서 조달했는데, 사우디산이 공급중단되면서 국내수급에 7% 이상의 부족분이 발생했다. 공급선을 베네수엘라와 이란으로 돌렸지만, 수요를 메우지 못했다.

석유가 나지 않는 유럽 국가들도 타격이 심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대아랍 정책에 겉으로는 미국과 공조를 취하는 척하면서도 기름 수입에서만큼은 친아랍 정책으로 돌아섰다. 네덜란드는 국내에 유태계가 많이 살기 때문에 친이스라엘 정책을 취하다가 아랍국들로부터 미국과 동일한 나라로 취급되었다. 로열더치셸은 네덜란드 자본이 대주주이므로, 아랍 이외의 수입량에서 네덜란드분을 확보해 공급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등 신흥 산유국들이 이때 각광을 받게 된다. 2)

 

1차 오일쇼크 직후 1974년, 휘발유 도둑에게 경고하는 문구 /위키피디아
1차 오일쇼크 직후 1974년, 휘발유 도둑에게 경고하는 문구 /위키피디아

 

미국인들이 석유위기의 타격을 받는데는 시차가 있었다. 처음 몇 달간은 재고 기름을 사용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유가 상승과 기름부족의 상황을 피부로 접하게 되었다. 11월 들어 미국 주유소들은 휘발유가 없다는 간판을 내걸었고, 운전자들은 기름을 찾아 몇마일을 허비하고 마침내 재고가 있는 주유소를 찾아도 몇시간씩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기름값이 연일 치솟자 기름값을 통제하고 주유소에 배급제를 실시하고 주말에는 자발적으로 문을 닫도록 유도했다. 값싼 기름 덕분에 풍요한 자동차 생활에 젖어있던 미국인들은 엄청난 불편을 겪었다.

그해 미국의 겨울은 매우 추웠다. 난방용 기름을 구하지 못한 노인들이 얼어 죽고 쇼핑몰들이 줄줄이 문을 닫았다. 곧이어 다가온 크리스마스는 트리에 불을 켜지 못해 캄캄한 명절이 되고 말았다. 대형차를 좋아하던 미국인들은 휘발유를 잡아먹는 하마를 이제 애물단지로 생각하게 되었다. 중소형 일제차가 미국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다.

 

1차 오일쇼크 때 나무를 때는 미국 여인 /위키피디아
1차 오일쇼크 때 나무를 때는 미국 여인 /위키피디아

 

오일쇼크 이후 서방세계는 분열되었다. 유럽국가들은 산유국들과 개별 협상을 벌이면서 미국 주도의 전열에서 이탈했고, 미국도 서둘러 중동 산유국과 협상에 나섰다.

미국은 아랍 산유국들과 석유 가격 현실화 방안을 놓고 협상하는 한편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골란 고원과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스라엘은 결국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19743월 점령지에서 철수했다. 이에 맞추어 아랍 산유국들은 석유 금수 조치를 해제했고 이로써 6개월 동안 전 세계를 뒤흔든 석유 위기가 가까스로 수습되었다. 이틈에 사우디는 아람코의 지분을 25%에서 60%로 확대했다. 사우디는 리비아와 이라크처럼 급격하게 석유산업을 국와화하지 않았지만, 서서히 국유화단계를 밟아갔다. 3)

 

1차 석유파동은 국제질서를 재편했다. 미국이 쇠퇴하고 중동국가의 오일 패권이 형성되었다. 석유파동을 겪은후 미국 정부도 그동안 아랍에 대해 거만하게 둘던 태도를 바꾸었다. 19746월 사우디 왕자와 야마니 석유장관이 워싱턴을 방문했을 때 미국 정부는 성대하게 환대하며 기술-군사 협조를 제공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미국은 이란의 팔레비 왕조를 도와주기 위해 군사지원을 약속했다.

1차 오일쇼크의 상처가 아물갈 무렵인, 19792차 오일쇼크가 터졌다. 이번에는 이란 혁명과 그후 이란-이라크 전쟁이라는 중동 내부의 문제가 겹쳐 발생했다. 2차 오일쇼크는 1차 때보다 심각했다.

 


1) 석유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앤서니 심슨, 책갈피(2000), P321~325

2) Wikipedia, Saudi Aramco

3) Wikipedia, 1973 oil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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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규종 2022-11-09 15:21:21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