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고대제국①…‘황금의 나라’ 가나왕국
아프리카 고대제국①…‘황금의 나라’ 가나왕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02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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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의 흑인왕국, 무역 통해 부 창출…사막화, 이슬람 공격으로 쇠락

 

아프리카에 서양세력이 등장하기 이전에도 역사가 있었다. 유럽이 중세의 암흑기에 허우적거리던 서기 5세기에서 13세기에 아프리카 서부에는 가나왕국(Ghana Empire)이 있었다. 가나왕국은 지금의 모리타니아와 말리, 세네갈에 걸쳐 있는 나라로 흑인왕국이었으며, 주민들은 토착종교를 믿었다.

이 흑인왕국의 본래 이름은 와가두(Wagadou)였다. 현지어로 와가(waga)는 목동, (dou)는 땅인데 목동의 땅이란 의미다. 왕을 가나(Ghana)라고 불렀는데, 외부인들이 그 나라 이름을 가나왕국이라 했다. 종족은 소닌케(Soninke) 족으로 현재 말리 남부에 살고 있다. 수도는 쿰비살레(Koumbi Saleh), 지금의 모리타니 남부 국경지대에 위치했다.

 

가나 왕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가나 왕국의 위치 /위키피디아

 

가나왕국은 문자가 없어 자체 역사 기록은 없다. 다만, 이슬람의 기록에 왕국의 존재가 확인되며, 현재 모리타니와 말리의 부족들에 내려오는 전승, 현지 유물발굴 등에 의해 그 베일이 벗겨지고 있다.

왕국의 시초가 언제인지는 논란의 대상이다. 5세기설에서 7세기설까지 다양하다. 이슬람 기록에 헤지라(622) 이전에 22명의 왕이 있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적어도 5세기부터 왕국이 존재했을 것이란 추측이 나온다.

가나 왕국은 이슬람 학자에 의해 830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이슬람의 기록은 정복자의 입장에서 쓰여져 있기 때문에 가나왕국에 대해 왜곡과 축소가 많은 것으로 간주되며, 전승과 유적 발굴에 의해 상당수 부정되고 있는 추세다.

19세기 후반에 프랑스가 이 일대를 식민화하고 프랑스 인류학자, 고고학자들이 가나왕국에 대해 활발히 연구했다. 그 연구에 따르면, 가나 왕국의 선조는 딩가(Dinga)라는 인물인데, 아프리카 동부에서 건너와 수단에 머물다가 서부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동하는 곳에서 여러명의 부인을 두고 아이들을 낳았으며, 최종 도착지에서 괴물을 죽이고 괴물의 딸들과 결혼해 종족을 형성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후 카인(Khine)과 디아베(Dyabe)라는 두 아들이 왕권을 두고 싸웠고, 디아베가 승리를 해 가나왕국을 세웠다는 전승 스토리가 내려온다.

 

소닌케 족 /위키피디아
소닌케 족 /위키피디아

 

코르도바(스페인의 이슬람왕국)의 지리역사학자 알바크리(al-Bakri)는 가나왕국의 경제상황에 대해 풍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의 서술에 따르면, 가나왕국은 무역국가였다.

가나왕국은 사하라 이남 사헬(Sahel) 지역(반건조지역)의 무역로를 장악하고 교역물자에 대해 통행세를 받았다. 주요 교역품은 소금과 금이었다. 북아프리카의 아랍상인들이 소금을 가지고 남쪽으로 내려와 팔았고, 그곳에서 나는 금을 가져갔다. 이외에도 모로코 일대에서 수제 가죽을 가져와 거래했고, 상아, 의복류, 장식품, , , 향료, 비단, 심지어 유럽의 서적들도 교역품에 포함되었다. 낙타가 이동수단이 되면서 교역은 더욱 활발해 졌다.

 

가나왕국은 금의 나라였고 부자의 나라였다. 통행세는 금으로 받았는데, 금괴는 왕이 독차지했고, 신하와 다른 사람들은 금 부스러기를 가져야 했다. 가나 왕국은 영향력을 주변 국가로부터 확대해 봉신(封臣)관계를 맺고 조공을 받았다. 가나왕국은 유럽인에 의해 골드코스트(Gold Coast)라는 별명이 붙었다.

알바크리는 가나 왕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는 백성들로부터 관리들에 대한 불만을 들었다. 그는 둥근 천장의 건물에 앉아 있었고, 수십 기의 말들과 병사들이 주변에 도열해 있었다. 그들은 금으로 장식된 칼을 들고 서 있었다. 왕자들이 번쩍이는 갑옷을 입고 금으로 머리를 수놓고 왕 주변에 대기하고, 그 주변에 관료들이 서 있었다. 이름 있는 개들이 정문에 움직이지 않고 지키고 있으며, 개의 목에도 금과 은으로 된 장식이 걸치고 있었다."

 

수도 쿰비살레는 돌로 성벽을 쌓아 왕궁을 보호했다. 수도에는 성스러운 나무를 심었다. 성소에는 사제들이 살았다. 수도는 약 6마일에 달하는 대로에 의해 두 곳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도시가 확장되면서 하나로 합쳐졌다. 한쪽에는 왕궁이 있었는데 왕과 왕족 및 관리들이 살았고, 다른 한쪽에는 이슬람교도인 상인·학자·법률가들이 살았다. 이슬람교도들을 위한 모스크도 지어졌다.

가나왕국은 무역상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대도 보유했다. -바크리의 기록에 따르면, 1067년 당시 왕국의 군사 규모는 보병과 기병을 합쳐 약 20만 명에 달하고, 그 중 4만명은 활로 무장했다고 한다.

 

가나왕국의 교역로 /위키피디아
가나왕국의 교역로 /위키피디아

 

이처럼 강대한 가나왕국이 11세기 이후 쇠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사막화설이다. 아프리카 북부의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수도 쿰비살레의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이 부족해 졌다는 것이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왕국은 과도하게 세금을 부과하게 되었고, 이의 악순환이 거듭되면서 신민과 주변국의 반발이 거세져 왕국의 토대를 흔들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북부에 이슬람세력이 강화되었기 때문이다. 모로코에 이슬람 세력인 알모라비(al-Moravids) 왕국이 수립되면서 토속종교를 믿는 가나왕국을 압박해 왔다. 1062년에 알모리비의 아부 바크르 이븐 우마르(Abu-Bakr Ibn-Umar)가 사하라 무역로를 공격한데 이어 1067년에는 가나 왕국의 수도를 공격했다. 가나 왕조의 바시(Bassi) 왕과 그의 후계자 툰카 메닌(Tunka Menin) 왕이 왕국을 지키고자 10년 간 노력했다. 1076년 아부 바크르가 수도를 점령하고, 왕국의 실질적인 주권이 알-모라비 들에게 넘어갔다.

이슬람의 기록은 이때에 가나왕국이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하지만 유럽의 고고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가나왕국의 잔존세력들은 소소(Sosso) 또는 수수( Susu)라는 소왕국으로 명맥을 유지했다고 한다.

가나 왕국을 최종적으로 멸망시킨 것은 서아프리카의 또다른 왕국인 말리 왕국(Mali Empire)에 의해서였다. 1240년경 말리 왕국의 건국자 순지아타(Sundiata) 왕이 가나 왕국의 잔존세력을 쳐부수로 일대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가나 왕국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아프리카에는 가나 공화국(Republic of Ghana)이란 나라가 있다.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할 때 초대대통령 콰메 은크루마(Kwame Nkrumah)가 과거 가나 왕국의 영광을 되살린다며 나라 이름을 가나라고 지었다. 하지만 현재의 가나공화국과 과거의 가나 왕국과는 인종적으로나 역사적 역계성이 전혀 없다.

 


<참고자료>

Wikipedia, Ghana Empire

Britannica, Ghana: historical West Afric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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