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연 전략에 뉴칼레도니아, 또 독립 무산
프랑스 지연 전략에 뉴칼레도니아, 또 독립 무산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0.05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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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남자’의 섬…유럽인 비중 높아지고 프랑스의 복지혜택에 원주민 패배

 

남태평양에 뉴칼레도니아(New Caledonia)라는 군도가 있다. 호주에서 1,2000km 떨어진 이 군도는 프랑스 해외영토이며, 프랑스어로는 누벨칼레도니(Nouvelle-Calédonie)라고 읽는다.

면적은 면적 18,567로 경기도 정도이며, 인구는 27만명이다. 10년전에 KBS에서 방영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배경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신혼여행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1)

영국 BBC에 따르면, 뉴칼레도니아 주민들은 4일 독립여부를 묻는 주민투표를 실시해 참가 투표자의 53.3%가 현상태대로 프랑스령으로 남길 원했고, 46.7%가 독립을 지지했다. 2)

이번 투표에서 나온 프랑스령 잔류 지지율은 2년전 주민투표의 56.7%에 비해 3.4%P 낮아진 것이다. 프랑스와 뉴칼레도니아 자치정부가 1998년에 체결한 체결한 누메아 협정에 따라 지방의회의 요구에 따라 2022년에 한번더 주민투표를 할 기회가 남아 있다. 현재의 추세가 계속될 경우 2년후에 있을 선거의 결과에 귀추가 주목된다.

 

뉴칼레도니아의 위치 /위키피디아
뉴칼레도니아의 위치 /위키피디아

 

뉴칼레도니아 주민투표에서 독립안이 부결된 것은 두가지 요인으로 분석된다.

첫째, 그동안 원주민인 카나크(Kanak) 족의 비율이 크게 낮아졌다. 뉴칼레도니아 인구 중 카나크족의 비율은 39.1%에 불과하다.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한 유럽인이 27.1%를 차지하고, 혼혈인 8.6%이며, 나머지는 해외에서 유입된 사람들이다. 원주민이었던 카나크족은 뉴칼레도니아에서 소수인종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둘째는 프랑스인들이 현지인들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는 사실이다. 현지인들에게 프랑스 시민권을 주고 자치권을 보장해 주었다. 프랑스법이 적용되기 때문에 원주민들도 풍부한 복지혜택을 누릴수 있게 되었다. 직장이 없어도 충분히 먹고살 실업급여도 받을수 있다. 굳이 프랑스에서 독립해 굶주릴 바에야 차라리 지금처럼 프랑스인으로 남아 있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특히 프랑스인 후손들은 원주민들의 지배를 원하지 않는다. 독립할 경우 프랑스 후손들은 이웃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로 이민갈 채비를 하고 있다. 그들이 빠져나갈 경우 빈 껍데기만 지켜야 한다는 반독립여론이 카나크족 이외의 주민들에게 설득력을 갖게 된 것이다.

 

태평양에 있는 많은 군도들 가운데 2차 대전 이후 영국령은 대부분 독립했지만, 프랑스는 이 핑계 저 핑계 대며 이 섬의 독립을 지연시켜 왔다.

 

이 섬은 1774년 영국인 제임스 쿡 선장에 의해 발견되어 서양에 알려졌다. 쿡 선장은 이 섬을 둘러보고 스코틀랜드와 비슷하다고 해서 뉴칼레도니아라고 명명했다. 칼레도니아는 로마제국 시대에 스코틀랜드를 지칭한 지명이다.

이후 1853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의 지시에 의해 점령되어 지금까지 프랑스 영토로 남아 있다. 처음에 프랑스 이민자들은 수십명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이 곳을 유배지로 만들어 파리 코뮌 사태의 폭동 가담자를 격리하는 감옥으로 활용했다. 많을 때엔 22,000명이 수용되었다.

1864년에 니켈 광산이 발견되면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프랑스인은 물론 해외인력을 유입시켰다.

프랑스 지배자들은 원주민들을 철저히 따돌렸다. 뉴칼레도니아의 원주민은 카나크족으로 남태평양 멜라네시아 계열이며 BC 3000년 전부터 이 섬에 정착해 살았다.

프랑스인들은 뉴칼레도니아 열도 가운데 산악지대 10%를 보호구역으로 지정해 카나크족들을 밀어냈다. 프랑스인들은 원주민들을 노예화해 플랜테이션 농업에 사역시키거나, 오스트레일리아, 캘리포니아, 캐나다, 칠레, 피지 등으로 송출했다. 유럽의 통치자들은 자신들이 만든 규정에 위반되면 서슴없이 원주민을 구속했고, 한때 2만명이 기소되기도 했다.

서양인들이 옮겨온 전염병은 원주민들에게 치명적이었다. 원주민들은 천연두와 홍역으로 잡단으로 사망해 18786만명이던 인구가 192127,000명으로 감소했다.

한편으로 프랑스인들은 니켈 광산 채굴을 위해 인도인과 중국인 또는 이웃 섬의 원주민을 데려왔다. 카나크 인들의 숫자가 주는데 비해 프랑스와 외부인들의 인구가 늘어났다. 원주민은 열도의 경제에서 최하층의 지위로 전락했다.

 

뉴칼레도니아의 니켈 광산 /위키피디아
뉴칼레도니아의 니켈 광산 /위키피디아

 

1878년에 카나크족들은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궐기했다. 창과 같은 원시적 무기로 무장한 그들은 총과 대포를 가진 프랑스군을 이길수 없었다. 주모자는 체포되어 참수되고, 머리는 광장에 효수되었다.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뉴칼레도니아 주둔군은 독일에 항복한 비시 정부에 반발해 샤를 드골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를 지지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한때 이 섬에 기지를 설치하기도 했다.

 

차 대전후 원주민들은 독립을 기대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다시 돌아오면서 무산되었다. 1946년 프랑스는 뉴칼레도니아를 해외영토로 규정하고, 1953년에는 원주민들에게도 프랑스 시민권을 주었다. 원주민들이 원하는 것은 프랑스 시민권이 아니었다. 그들은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추구했다. 1983년 프랑스는 자치권을 확대한다고 달래면서 5년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독립여부를 묻자고 했다.

이에 1984년 원주민들은 카나크 사회주의 민족해방전선(FLNKS)을 결성해 프랑스에 의한 투표를 거부했다. 그들은 투표소를 파괴하고 도로를 막아 주민들의 선거를 방해했다. 카나크 해방전선은 19857월에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한다며 대대적인 캠페인을 전개했다.

 

프랑스가 민족해방전선을 탄압하자 원주민 무장파들은 19884월에 프랑스 주둔군을 인질로 잡고 협상을 제의했다. 프랑스는 협상 대신에 무력을 동원했다. 충돌 과정에서 21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카나크인은 19명이었다. 국제여론이 들끓으면서 프랑스는 카나크족과 프랑스 식민자 사이에 협상이 벌어졌다.

1988116일 프랑스와 카나크족 대표 사이에 마티농 협약(Matignon Accord)이 체결되었다. 내용은 10년 후인 1998년에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것이었다. 민족해방전선의 두 대표는 협약문에 서명했지만, 얼마후 과격파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당장에 국민투표를 실시해야지 10년을 양보했다는 게 이유였다.

10년의 세월이 흘러 1998년이 되자, 프랑스는 딴소리를 했다. 다시 20년 후에 국민투표를 실시해 독립여부를 결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주민투표에 붙여져 72%의 지지를 얻어 효력을 발휘했다. 이 조약을 누메아 협약(Nouméa Accord)이라 한다.

 

20년이 흘러 누메이 협약에 의해 2018114일에 독립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다. 투표결과에서 56.7%가 독립에 반대했고, 이번에 53.3%가 반대했다. 마지막으로 2년후에 한번 더 투표가 남아 있다.

 

뉴칼레도니아엔 주산업은 세계적인 니켈광산이 있는데, 프랑스가 이 광산을 내놓기 싫은 것이다.

 


1) Wikipedia, New Caledonia

2) BBC, New Caledonia referendum: South Pacific territory rejects independence from Fra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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