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사④…지방군벌 득세, 황제권력 약화
에티오피아사④…지방군벌 득세, 황제권력 약화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10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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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 분열로 ‘판관의 시대’…미카엘 세훌, 권력 장악 후 수시로 황제 교체

 

근대기에 에티오피아는 극심한 분열에 휩싸였다. 종교적으로 에티오피아 교회와 카톨릭, 이슬람이 대치했고, 지방의 군벌이 난립했다.

솔로몬 왕조는 에티오피아 고원으로 후퇴해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포르투갈군의 지원으로 홍해 연안에 세력을 펼치는 이슬람 세력을 격퇴해야 했다. 포르투갈군과 함께 카톨릭 예수회 신부들이 에티오피아에 들어왔다. 최초의 신부는 포르투갈인 페드루 파에즈(Pedro Páez)였다. 예수회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수세뇨스(Susenyos) 황제가 1622년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게다가 에티오피아 교회를 로마 교회에 복속한다고도 밝혔다. 황제의 개종은 포르투갈군을 끌여들여 이슬람 반란군을 진압하려는데 목적도 있었다.

황제는 국민들에게 카톨릭을 강요했다. 정통 에티오피아 교회와 귀족사회를 발칵 뒤집혔다.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다. 수세뇨스는 반란군을 집압하러 원정에 나섰으나, 그의 부하마저도 진압을 꺼렸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32,000명이 희생되었다. 카톨릭 황제가 에티오피아 교회 신도인 백성을 죽이는 결과가 된 것이다. 아들 파실리데스(Fasilides)은 아버지에게 진압을 중단해 달라고 애원했다.

1630년 베겜데르(Begemder)의 총독이 황제를 폐위하고 황태자 파실리데스를 옹립한다며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수세뇨스는 아들을 용서했다. 그리고 2년후인 1632년 수세뉴스가 죽고 아들 파실리데스가 황제가 되었다. 새 황제는 에티오피아 교회를 복원시키고 카톨릭 사제들을 추방했다.

에티오피아는 짧은 시간이지만 10년간 카톨릭 국가로 지향했다. 그러나 토착 교회의 저항이 워낙 강해 실패로 돌아갔다. 파실리데스는 1636년 수도를 내륙 깊숙한 곳에 있는 곤다르(Gondar)로 옮기고 서양문물의 배척을 선언했다. 에티오피아는 이후 상당기간 외부세계와 단절된 고립된 나라로 머물렀다. 1)

 

수세뇨스 1세가 포르투갈 신부 알폰소 멘데스의 초대를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수세뇨스 1세가 포르투갈 신부 알폰소 멘데스의 초대를 받고 있다. /위키피디아

 

솔로몬 왕조가 내륙 깊숙이 본거지를 옮기자 지방 통제력이 약화되었다. 지방 총독들이 군벌을 형성했고, 에리트레아, 소말리아 등지에는 이슬람 세력이 확장했다.

왕조가 곤다르에 머물 때 궁정암투가 활개를 치고 지방세력이 할거하는 이른바 판관의 시대’(Zemene Mesafint)가 열린다. 구약성서의 판관시대를 본따 명명한 이 시기는 왕자들의 시대’(Era of the Princes)라고도 한다. 황제는 허울만 남고 실력자가 판을 치던 시대였다. 대체로 이야수 1(Iyasu I)가 죽은 1706년부터 테오드로스 2(Tewodros II)가 즉위하는 1855년까지 150년의 기간 동안에 지방군벌 사이에 황제를 옹립하기 위한 분쟁이 벌어졌다.

 

이야수 1(재위: 1682~1706) 때까지만 해도 황제의 권력은 비교적 탄탄했다. 1704년 황제가 서부 에나레아 왕국의 내란을 진압하러 갔을 때 총애하던 측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실의에 빠져 회군해 곤다르의 타나호 별장으로 들어갔다. 황후가 양위를 요청해 이야수 1세는 아들 테클레 하이마노트(Tekle Haymanot)에게 황제 자리를 넘겨주었다.

귀족들이 전례 없는 일이라며 황제의 양위에 반발했다. 일부 귀족들은 또다른 황족을 앞세워 반란을 일으켰다. 테클레는 반란군을 진압했다. 그것도 모자라 테클레는 아버지 이야수를 살해하라고 지시했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이야수가 호수에서 나와 반란군을 지원했다는 얘기도 있다. 하지만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신망이 있는 이야수를 죽인 일로 아들 황제 테클라 하이마노트는 임기 내내 비난에 시달렸다. 황제의 권위는 약해졌고, 이때부터 귀족과 지방 군벌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판관의 시대가 시작되었다고 역사가들은 분석한다. 2)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발치에 멘테와브가 누워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발치에 멘테와브가 누워 있는 그림 /위키피디아

 

궁중 암투의 압권은 황후 멘테와브(Empress Mentewab).

멘테와브는 바카파(Bakaffa) 황제의 두 번째 부인으로 들어갔다. 1708년 남편이 황제에 즉위하던 다음날, 첫 번째 부인, 즉 황후가 죽고 멘테와브가 황후 자리에 오르게 된다. 여기에는 여러 음모설이 난무한다. 어쨌든 황후 시절에 그녀의 동정은 드러나지 않았다.

1730년 남편인 바카파가 죽고 7살에 불과한 아들 이야수 2(Iyasu II)가 황제가 되었을 때 멘테와브는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동양식 수렴청정의 위치를 넘어서 아들과 함께 공동황제가 되었다. 아들이 주요한 결정을 어머니에게 맡겼기 때문에 멘테와브가 사실상 황제 역할을 했다.

 

대비이자 여황제인 멘테와브는 남편의 조카와 염문을 뿌렸다. 그녀는 새 애인과 사이에 딸 셋을 낳았다. 아들 이야수 2세는 어머니의 불륜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지만, 감히 대들지 못했다.

멘테와브는 아들 이야수 2세의 부인을 에티오피아 남부에 살고 있는 오로모(Oromo)족에게서 구했다. 이 종족의 도움을 받아 황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오로모족 추장의 딸( Wubit)을 며느리도 데려왔다. 며느리이자 황후는 남편이 황제 자리에 있을 때에는 조용히 살면서 아들이 황제가 되기만 기다렸다. 드디어 그런 날이 왔다.

1755년 이야수 2세가 죽고 아들 이요아스 1(Iyoas I)가 어린 나이에 황제가 되었다. 오모로족 출신의 황후가 자신이 섭정이 될 터이니, 할머니인 멘테와브는 물러나라고 요구했다. 어린 황제는 어머니 편을 들었다. 멘테와브는 괘씸하게 여겼다. 며느리와 시어머니 사이에 권력투쟁이 일어난 것이다. 3)

 

멘테와브의 궁전 /위키피디아
멘테와브의 궁전 /위키피디아

 

귀족들이 새 황제 이요야스를 처음 알현하고 깜짝 놀랐다. 어린 황제는 지배종족의 언어인 암하라(Amhara)어를 모르고 오모로어를 쓰고 있었다. 게다가 황제 주변에는 오모로족 출신들이 우글거렸다.

귀족들의 불만을 알아차린 멘테와브는 자신의 친정인 크와라(Qwara)에서 병력 지원을 요청했고, 며느리도 오모로족에게 병력을 끌고 왔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멘테와브는 티그라이(Tigray) 지방의 군벌 미카엘 세훌에게 중재를 요청했다. 미카엘 세훌(Mikael Sehul)은 멘테와브가 애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의 남편, 즉 멘테와브의 사위였다.

멘테와브는 사위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마케엘 세휼은 26,000명의 군대를 끌고 와 수도 곤다르를 장악하고 자신의 권력을 확대했다.

이요아스 황제와 그의 측근들은 미카엘 세훌 장군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것으로 보고 경계심을 느꼈다. 황제는 측근 파실(Fasil) 장군과 음모를 꾸며 미카엘 세휼에게 티그라이로 원대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미카엘 세훌은 군대를 동원해 파실을 격퇴하고 귀족회의를 소집했다. 그는 귀족들에게 자신을 변명하면서 황제 일당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주장했다.

귀족들은 미카엘 세훌의 편을 들었다. 귀족회의는 황제에게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에티오피아의 법률에 의해 황제는 사형에서 예외가 되므로 황궁내 연금을 선언했다. 그러나 미카엘 세훌은 황제 이요아스의 살해를 지시했다. 17691월 황제 이오야스 1세는 비단끈에 목이 졸려 죽임을 당했다. 4)

 

에티오피아 전사들 /위키피디아
에티오피아 전사들 /위키피디아

 

고부간의 싸움은 비극으로 결말지어졌다. 멘테와브는 손자가 비명횡사한 후에 칩거해 죽을 때까지 정치에 간여하지 않았고, 이오야스의 어머니는 오모로족의 땅으로 돌아갔다.

마카엘 세훌은 이오야스를 살해한 이후 황족 가운데 70대의 요하네스 2(Yohannes II)를 황제로 올렸다가 열흘만에 살해하고 테클레 하이마노트 2(Tekle Haymanot II)를 다시 옹립했다.

역사평론가들은 이 시기에 에티오피아는 지방 통제력을 상실했다고 정리했다. 미카엘 세훌에 반대하는 군벌들이 중앙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고 준독립적인 세력으로 할거했다.

마카엘 세훌은 1784년에 죽은 후 자신의 지위를 아들(Wolde Samuel)에게 물려 주었고, 그 지위는 손자(Wolde Gabriel)에게까지 이어졌다. 솔로몬 왕조는 힘을 잃고 미카엘 세훌의 자손들이 세력을 쥔 시기였다.

 


1) Wikipedia, Susenyos I

2) Wikipedia, Zemene Mesafint

3) Wikipedia, Mentewab

4) Wikipedia, Mikael Seh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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