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기에 실업자 구제한 후버댐
대공황기에 실업자 구제한 후버댐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0.10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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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건조지역 개척에 활용…콜로라도강 제어해 활용, 미드호 창출

 

미국 네바다주와 애리조나주 경계에 콜로라도 강을 막은 후버댐이 웅장하게 서 있다. 이 댐은 대공황 직전에 계획되어 대공황기에 수많은 실업자를 구제하는 역할을 했다. 당시 미국 기술로 후버댐(Hoover Dam) 사업은 대단한 어려운 공사였다.

 

미국 서부를 흐르는 콜로라도 강은 로키 산맥에서 발원해 황량하고 척박한 땅 2,253km를 흐른다. 이 강은 유타 고원과 애리조나 사막을 통과해 그랜드 캐년과 모하비 사막, 소노란 사막을 거쳐 멕시코 국경을 건너 캘리포니아 만으로 빠져 나간다. 이 강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여부가 사막과 반건조지대의 사활이 걸려 있었다.

콜로라도 강 활용에 대한 논의는 서부개척시대부터 있었다. 1890년대에 캘리포니아에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들여 임페리얼 밸리(Imperial Valley)를 농경지로 개척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901년에 운하와 배수로를 뚫어 강물을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몇 년 동안은 사막에 풍부한 물줄기를 끌어들여 풍성한 풀을 재배했고, 비육우를 키우게 되었다. 많은 정착민들이 골짜기로 모여들었다.

하지만 운하에 퇴적물이 쌓이게 되었고, 1905년 봄철에 눈녹은 물이 홍수를 이루며 제방을 붕괴시켜 버렸다. 내륙에 길이 48km, 너비 16kmj의 물바다가 만들어져 물길을 원상태로 되돌리는데만 2년이 걸렸다. 콜로라도 강은 거칠기로 유명하다. 이 강을 다루는 것은 망나니와 같은 말을 길들이는 것만큼 어려웠다. 1)

 

후버댐 건설 전의 콜로라도 협곡(1904년) /위키피디아
후버댐 건설 전의 콜로라도 협곡(1904년) /위키피디아

 

아서 데이비스(Arthur Powell Davis)라는 설계자가 콜로라도 강에 댐 건설에 도전했다. 그는 1922년 건조지대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댐 건설에 관한 보고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미국 수자원 당국은 기술력이라든지, 비용 등을 감안해 데이비스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다. 수자원당국의 상위부서인 내부무의 알버트 폴(Albert Fall) 장관이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콜로라도 강에 홍수 억제와 전력 생산을 위한 댐 건설이 추진된다.

댐 걸설지로는 보울더 캐년과 블랙 캐년 두군데로 좁혀졌다. 지질학자들이 두 후보지를 샅샅히 뒤진 결과 보울더 캐년에는 단층선이 발견되었다. 단층선에 댐을 건설하면 댐이 붕괴될 가능성이 있다. 다행하 블랙 캐년에는 단층선이 없었고, 암석층이 단단했다. 게다가 협곡이 좁아 콘크리트 댐을 건설하기에 훌륭한 조건이었다.

댐 건설예정지로 블랙 캐년이 결정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프로젝트를 보울더댐 프로젝트라고 불렀다. 보울더(boulder)는 단단한 바위라는 의미를 가졌기 때문이다. 보울더댐 프로젝트는 19281221일 캘빈 쿨리지(Calvin Coolidge) 대통령에 의해 서명되었다. 비용은 16,500만 달러, 당대로는 천문학적인 금액이었고, 미국 역사상 최대의 공사였다. 아치형 콘크리트 중력댐은 자유의 여신상보다 두배나 높았고, 콘크리트 바닥폭은 220m나 되었다. 2)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대공황이 시작되기 직전인 1929625일 허버트 후버 대통령에 의해 승인되었다. 몇 달뒤 그해 10월에 뉴욕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사상 최악의 공황이 불어닥쳤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고, 실업률은 25%에 육박했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은 네바다의 사막으로 몰려 들었다. 걸어서 온 사람도 있고 포드 모델 T를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인구 5,000명에 불과하던 라스베이거스에는 사람들이 붐비게 되었다. 무작정 일거리를 찾아온 사람들로 인해 도시 곳곳에 빈민가가 났고, 집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우후죽순 천막을 치고 살았다.

 

배수로 터널 공사에 동원된 점보리그(Jumbo Rig) /위키피디아
배수로 터널 공사에 동원된 점보리그(Jumbo Rig) /위키피디아

 

공사는 라스베이거스에서 남쪽으로 48km 떨어진 곳에서 시작되었다. 사막에는 열기가 어른 거렸다. 일자리를 찾으려는 사람들은 뜨거운 모래사막을 지나 댐 건설현장으로 갔다. 그늘 한 점 없는 곳에 태양은 뜨겁게 이글거렸다. 하루 아침에 낡은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세워지고 그곳에 어제까지 실업자였던 사라들 1,500명이 우글거렸다. 공공시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화장실이 부족해 아침이면 긴 줄이 늘어섰다. 강에서 식수를 얻어야 했는데 토사를 가라앉히려면 몇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공사는 여섯 개 대기업이 컨소시엄을 형성해 참가했다. 그들은 식스캄퍼니(Six Company)라 불렀다. 회장 윌리엄 와티스는 “Damn Dam"이라고 말했다. 빌어먹게 큰 댐이라는 얘기다.

19313월 공사는 4,889955 달러에 낙착되었다. 공사 책임자로 토목기사인 프랭크 크로(Frank Crowe)를 초빙했다.

 

협곡 상층부에서 작업하는 하이스케일러들 /위키피디아
협곡 상층부에서 작업하는 하이스케일러들 /위키피디아

 

후버 대통령은 공사 진척을 재촉했다. 대공황의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서는 후버댐 공사가 일자리 창출에 지름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식스컴퍼니는 정부와의 계약에서 작업 단계별로 공기를 맞추도록 지켜야 한다는 조항을 받아들였고, 일정이 지연될 경우 하루 3,000 달러의 페널티를 물어야 했다.

가장 어려운 공사는 댐 공사를 하기 위해 물줄기를 다른 곳으로 빼는 배수로 공사였다. 봄이면 로키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홍수가 나는데, 공사에 차질을 빚을수 있다. 배수로 공사는 암벽을 뚫어 터널을 뚫는 어려운 작업이었다. 공사는 1932년 겨울 강의 수위가 가장 낮을까지 배수로 터널을 뚫기로 했다. 공기를 맞추지 못하면 한해를 더 넘겨야 하고, 그땐 페널티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된다.

배수로 공사는 1931년 봄에 시작되었다. 라스베이거스에서 건설현장까지 철로가 건설되고 협곡 아랫부분을 폭파해 도로를 만들었다. 하이스케일러(high scaler)라는 전문적인 인부들은 협곡 정상까지 올라가 로프에 매달린채 암석을 캐냈다. 협곡 절벽을 깎아내 단단한 층을 드러내야 콘크리트를 부을 자리를 형성하기 위해서였다.

한여름 기온이 48도까지 오르는 상황에서도 배수로 공사는 진행되었다. 열사병 피해도 늘어났다. 천막촌에는 그늘 한 점 없었고, 강에서는 습기가 올라왔다. 모래가 바람에 흩날리면서 눈과 입으로 들어갔다. 아빠를 따라온 아이들과 아내는 낯선 환경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공사는 힘들었다. 터널 내부에는 산소 부족과 일산화탄소 배출로 인부들이 쓰러졌다. 이런 가혹한 상황에서 배수로 공사는 진척되었고, 협곡의 절벽은 다듬어졌다.

그런데 1931년 가을에 때아닌 폭우가 내려 덥쳤다. 기껏 정리해 놓은 강바닥이 진흙탕이 되었다. 폭우가 지나간후 잔해를 제거하는데만 며칠이 걸렸다. 다행스런 것은 사망자가 없었고, 피해가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듬해 2월에도 또다시 눈녹은 물이 내려오면서 공사장을 덥쳤다. 겨우 파놓은 터널 속으로 진흙탕물이 흘러 넘쳤다. 하지만 터널 자체는 온전하게 보전되었다. 이렇게 해서 1932년 늦은 봄에 네 개의 배수로 터널을 완공하게 되었다.

 

댐 벽의 콘크리트 작업(1934년 2월) /위키피디아
댐 벽의 콘크리트 작업(1934년 2월) /위키피디아

 

그 다음은 댐 본체를 쌓아 올리는 일이었다. 공중 케이블 시스템을 찾안해 건자재와 인부를 실어 날랐다. 인부들을 몇 개 조로 나누어 경쟁을 붙였다. 안전사고도 빈발했다. 5,000명의 인부들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콘크리트 벽이 1.5m 단위로 쌓여갔다. 1934년 여름, 거대한 콘크리트 벽이 최종 높이까지 올라가고, 댐을 작동시키기기 위한 장치들도 제 위치에 세워졌다.

193521일 배수로의 터널이 차단되고 거칠게 흐르던 콜로라도 강은 보울더 댐에 막혀 차오르기 시작했다. 당초계획보다 2년 앞서 완공되었다. 공사과정에 112명이 희생되었다.

 

후버댐의 모습  /위키피디아
후버댐의 모습 /위키피디아

 

1935930일 후버 대통령을 누르고 당선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댐 준공식에 참석했다. 준공식에는 12,000명의 인파가 참석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왔노라, 보았노라, 그리고 정복당했노라.”

 

댐의 이름은 처음에는 볼더 댐(Boulder Dam)이라는데, 1947년에 허버트 후버를 기념해 후버댐으로 개칭되었다. 높이 221m, 길이 411m의 중력식 아치 댐이며, 댐이 완공된 후 길이 185km의 미드 호(Lake Mead)가 생기게 됐다.

미국 연방정부는 1981년에 후버댐을 국립역사관광지로 등록하고, 1985년에 국립사적지로 지정했다.

 


1) Wikipedia, Colorado River

2) Wikipedia, Hoover D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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