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⑤…라이언킹 테오드로스 2세의 자결
에티오피아⑤…라이언킹 테오드로스 2세의 자결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11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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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수성가로 제위에 올라, ‘판관의 시대’ 종식…영국군 침공에 자결

 

에티오피아의 테오드로스 2(Tewodros II)는 디즈니 영화 라이인 킹(Lion King)을 닮았다. 그는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쫓겨다녔고, 스스로 힘을 키워 에티오피아의 황제(재위: 1855~1968)가 된다. 그는 사자에 둘러싸인 채 대중을 만났다. 스스로 사자 같은 황제임을 보여준 것이다. 약한 자에게는 한 없이 자애롭지만 화가 날때는 야성을 드러냈다. 그런 성격에 그는 영국군에게 패해 자결하고 말았다.

 

사람들을 만날 때 사자에 둘러 싸여 있는 테오드로스 2세 /위키피디아
사람들을 만날 때 사자에 둘러 싸여 있는 테오드로스 2세 /위키피디아

 

테오드로스는 지방 군벌이 권력을 장악하던 판관의 시대’(Zemene Mesafint)를 종식시킨 황제로 평가받는다. 어릴 때 이름은 카사 하일루(Kassa Hailu)였다.

솔로몬 왕가의 자손으로 태어나 에티오피아 북부 크와라(Qwara) 지방 영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가 이혼하자, 그는 어머니를 따라 수도 곤다르에서 살았다. 그의 아버지가 죽었을 때 친척들이 모든 재산을 나눠 갖고 그와 어머니에겐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약초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카사는 어려서부터 용맹했고 전략전술에 뛰어났다. 그는 패거리를 지어 사병을 조직하고 부잣집을 털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아프리카판 로빈훗의 전설적 스토리는 사람들을 불러모았고, 그의 무리는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런 소문이 당대의 실권자인 알리(Ali) 장군과 그의 어머니이자 한때 황후였던 메넨 리벤 아메데(Menen Liben Amede)에게 알려졌다. 그들은 동맹을 맺기 위해 알리의 딸 테와베치(Tewabech Ali)를 카사와 결혼시켰다.

카사는 알리 가문과 사이좋게 지내려 했지만, 메넨 황후와 알 리가 카사를 멸시했다. 카사는 자신을 조롱하거나 비난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그는 알리 가문에 대항해 여러 주를 복속시키고 마침내 황후 메넨을 사로잡았다. 알리는 도망쳤다. 그는 1855년 알리 가문의 허수아비 황제였던 요하네스 3(Yohannes III)를 몰아내고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그리고 테오드로스 2세라고 했다. 1)

 

테오드로스 2세 /위키피디아
테오드로스 2세 /위키피디아

 

테오드로스 2세는 알리 가문을 미워했지만 그 가문의 황후 테와베치는 사랑했다. 그는 황제의 권력을 강화하고 군벌들의 힘을 약화시켰다. 그는 200년 가까이 준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해온 각지의 영주들을 복속시키고, 도로 건설, 상비군 설립, 언어(암하라어) 통일 등의 근대화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그는 수도를 곤다르에서 막달라(Magdala)로 이전해 새로운 통치기반을 만들었다. 가장 강력한 라이벌인 셰와 왕국의 어린 왕자 메네리크 2(Menelik II)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다.

즉위 후 처음 몇년간은 그의 통치는 안정적이었다. 그러나 사랑하던 왕후 테와비치가 1858년 죽고 나서부터 달라졌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독선적이고 잔혹한 인물로 변해갔다. 대표적인 경우가 영국인 여행가 존 벨(John Bell)을 살해한 일이었다.

벨은 황제와도 가까운 사이였는데, 황후가 죽고 슬퍼하는 테오드로스에게 재혼할 것을 권유했다는 이유로 황제의 분노를 샀다. 황제는 홧김에 죄수 500명을 사형시키고, 반란에 가담했다가 포로가 된 7,000명을 몰살시키라고 명령했다. 역사가들은 그의 야성을 황후 테와비치가 억제했지만 그녀가 죽고 난후 그를 억제할 인물이 사라져 황제가 실수를 연발하게 되었다고 평가했다. 그렇지만 그는 얼마후 제혼했다.

 

1862, 안으로는 지방의 이슬람 세력들이 반기를 들고 밖으로는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가 쳐들어 왔다. 테오드로스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에게 같은 기독교 국가로서 이슬람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편지를 썼다. 황제는 에티오피아 주재 영국 공사인 대령 찰스 캐머런(Charles Duncan Cameron)에게 서신을 여왕에게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캐머런은 홍해 해안의 영국 기지에 들러 편지를 런던 왕실에 부쳐달라고 했다. 캐머런은 돌아오는 길에 수단에 들러 노예 무역에 관한 사업을 정리한 다음에 에티오피아로 돌아왔다.

황제는 돌아온 캐머런 공사에게 여왕의 답장을 가져 왔느냐고 물었다. 캐머런은 답장이 곧 올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얼마후 답장이 도달하지 않자 황제는 캐머런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캐머런은 영국 기지에게 편지 송달을 부탁했는데, 그곳에서 부쳤을 것이라고 했다.

황제는 진노했다. 감히 황제의 서신을 직접 전달할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적대국인 수단에서 영업을 한 것도 그를 분노케 했다. 황제는 영국 공사를 감옥에 쳐 넣었다. 2)

당시 영국으로선 에티오피아를 도울 이유가 없었다. 영국은 인도를 경영하기 위해 이집트와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야 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의 상국(上國)인 오스만 투르크와도 적대적 관계로 돌아서게 하면서 에티오피아를 도울 필요가 없었다. 영국은 외교적 이해관계로 동맹을 맺는 나라였지, 기독교라는 종교적 면분으로 동맹을 맺는 나라는 아니었다. 테오드로스 황제가 착각한 것이다.

 

1868년 영국군의 에티오피아 행군 /위키피디아
1868년 영국군의 에티오피아 행군 /위키피디아

 

그 무렵 헨리 스턴(Henry Stern)이란 영국인 선교사가 에티오피아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도 황제가 아껴하던 사림이었는데, 그가 영국에서 출간한 책에서 에티오피아 황제에 대해 언급한 구절이 테오드로스 귀에 들어갔다. 그 책에 테오드로스가 빈천한 계급 출신으로 정복을 좋아하는 잔인한 인물로 그려졌다. 스턴은 체포되어 죽기 직전까지 매질을 당했다. 황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에티오피아에 거주하는 유럽인들을 몽땅 붙잡아 감옥에 넣게 했다.

영국 정부는 시리아인 라삼(Hormuzd Rassam)을 통해 감금된 캐머런 공사와 선교사를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처음에는 협상이 잘 되는듯 싶었다. 그 무렵 영국인 여행자 버크(C.T. Beke arrived)가 에티오피아로 와 인질들을 풀어달라는 가족들의 탄원서를 제출했다. 황제의 의심증이 도졌다. 한쪽에서 협상하고 다른 쪽에서 탄원하는 것은 무슨 행위란 말이냐고. 그는 협상을 중매하던 라삼도 감옥에 수감했다.

 

영국은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들었다. 무력을 동원해 에티오피아에 갇혀 있는 자국인들을 구출하는 것이었다. 그 임무는 인도 봄베이군이 맡았고, 로버트 네이퍼(Robert Napier) 경이 지휘하게 되었다.

영국군은 13,000명의 병력에 수행자 24,000, 코끼리등 운반용 동물 4만마리를 280대의 증기선에 태우고 186710월에 홍해 해안 줄라(Zula)에 도착했다.

원정대는 이듬해인 18681월에 수도 막달라를 향해 출발했다. 영국군은 길을 새로 놓으며 640km의 산악지대를 통과해 3개월만에 막달라에 도착했다. 테오도르 황제에 반발하는 지방 영주와 군벌들은 영국에 길을 내주거나 식량을 공급했다. 도중에 거의 저항이 없었다.

테오드로스의 그의 병사들은 막달라 요새로 도피했다. 그곳에서 벌어진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네이퍼는 테오드로스 황제에게 항복을 요구했다. 아울러 항복할 경우 군주로서의 대우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이 의심병 환자는 항복하면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새로 결혼한 황후에게 아들을 영국에 맡기라고 했다. 아들이 에티오피아에 있으면 영주들과 군벌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걱정한 것이리라.

413일 네이퍼는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 쌍방에서 총탄이 퍼붓는 가운데 테오드로스는 권총으로 자결을 선택했다. 그 권총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선물한 것이라고 한다. 3)

 

1868년 영국군 포격으로 불타는 막달라 요새 /위키피디아
1868년 영국군 포격으로 불타는 막달라 요새 /위키피디아

 

테오드로스가 사망한 후 영국군은 그의 머리털을 잘라 보관하고, 후하게 장례를 치러줬다. 영국은 에티오피아를 지배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막달라 감옥에 갇혀 있던 자국인과 유럽인들을 석방시키고 곧바로 퇴각했다. 다만 그리고 아들 알레마예후(Alemayehu)와 두 번째 황후(Tiruwork Wube)를 영국으로 데려갔다. 게다가 에티오피아의 보물을 바리바리 실어 런던으로 보냈다.

테오드로스 2세가 죽은후 황제 쟁탈전이 벌어져 자그웨 왕조의 후손 테클레 기요르기스 2(Tekle Giyorgis II)가 황제에 올랐으나 3년만에 솔로몬 가문의 요하네스 4(Yohannes IV)에게 제위를 빼앗겼다.

영국은 2019년에 테오드로스 황제가 죽었을 때 채취한 머리털을 에티오피아에 돌려 주었다. 4)

 


1) Wikipedia, Tewodros II

2) Wikipedia, Charles Duncan Cameron

3) Wikipedia, British Expedition to Abyssinia

4) The Conversation, Why it’s significant that the UK has returned the locks of hair of an Ethiopian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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