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사⑥…이탈리아 격퇴한 메넬리크 2세
에티오피아사⑥…이탈리아 격퇴한 메넬리크 2세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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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세 침략에 국가적 단결…19세기말 아프리카서 유일한 독립국

 

19세기말에 아프리카에서 유럽의 식민지로 떨어지지 않은 곳이 두 나라였다. 그 하나는 라이베리아로, 1847년 미국 흑인노예들이 건설한 나라이고, 또다른 하나가 에티오피아였다. 19세기에 유럽 열강들이 마지막 남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경쟁적으로 식민지 전쟁을 벌였다. 라이베리아가 미국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에티오피아만이 유일한 독립국이라 할수 있다.

영국은 1868년 에티오피아의 수도 막달라까지 진격해 테오드로스 2세를 자살하게 했지만, 식민지로 통치하지는 않았다.

영국군은 에티오피아의 단결력을 두려워했다. 영국의 인도군이 고원 깊숙이 쳐들어갈 때 때 테오드로스 2세를 미워하던 영주들이 길을 내주고 식량을 공급했지만, 막상 수도를 점령하고 황제가 죽자 에티오피아의 어떤 세력도 영국에 고마움을 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방의 군벌들이 서서히 세력을 결집해 길목을 차단하려는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영국군은 약탈물을 싣고 재빨리 철수했다. 자칫하다간 26년전인 1842년 아프가니스탄 산악지대에서 영국인 16,000명이 한명을 빼고 전멸한 악몽이 되살아 났을 것이다.

 

테오드로스가 죽고 내부 권력투쟁을 거쳐 요하네스 4(Yohannes IV)가 황제에 올랐다. 이 무렵 오스만 투르크가 이집트를 앞세워 에티오피아를 공격해 왔다. 이집트의 지배자 이스마일 파샤(Isma'il Pasha)는 나일강의 지배권을 확보하기 위해 수단을 점령한 후 에티오피아로 남하했다. 이스마일은 요하네스 4세에 경쟁자인 셰와 왕국의 메넬리크(Menelik)에게 협력을 제의했다. 하지만 메넬리크는 기독교 왕국의 단합과 외세척결이라는 대의를 저버리지 않았다.

1875년 이집트군은 수단에서 육로로 남하하고, 홍해에서 해로로 공격해 왔다. 요하네스는 영국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영국으로선 인도로 가는 길목인 수에즈를 관리해야 하므로 이집트와 적대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없었다. 결국 내부 단결을 통해 적을 맞아야 할 상황이었다.

에티오피아와 이집트군은 두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187511월 군데트 전투(Battle of Gundet), 19763월 구라 전투(Battle of Gura)에서 에티오피아군은 이집트군을 격파했다.

요하네스 황제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자신을 도운 메넬리크를 세와의 왕(Negus)으로 격상시키고, 그의 딸 제우티투(Zewditu)를 자신의 아들 아라야 셀라시에(Araya Selassie)과 결혼시켰다. 메넬리크는 요하네스 2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고, 그의 딸 제우티투는 에티오피아 최초의 여황제이고, 셀라시에의 손자는 마지막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 1)

 

1876년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구라 전투도 /위키피디아
1876년 에티오피아와 이집트의 구라 전투도 /위키피디아

 

요하네스 말년에 에티오피아가 수단의 극단 이슬람 세력과 전투를 벌이는 와중에 이탈리아가 마사와(Massawa)를 중심으로 홍해 입구를 점령했다. 요하네스 4세는 수단의 마흐디주의자(Mahdiist)들과 전투를 벌이던 중 18893월 유탄에 맞아 숨졌다.

이에 메넬리크 2세가 황제에 올랐다. 메넬리크(Menelik)2,000년전에 이스라엘 솔로몬왕과 시바의 여왕 사이에 태어나 에티오피아를 건국했다는 전설적 인물이다. 셰와(Shewa)의 왕 메네리크는 전설상 인물에서 이름을 따 메넬리크 2(Menelik II)로 황제에 올랐다.

 

메넬리크 2세 /위키피디아
메넬리크 2세 /위키피디아

 

메넬리크 2세는 이름 값을 했다. 그는 즉위 초에 영주들을 제압하는데 주력했다. 그동안 지방 영주들이 저마다 군주로 행세하며 황제의 권력에 도전했는데, 메넬리크는 반란자 토벌을 명분으로 15년간 지방 군벌을 토벌했다. 그 결과 현재의 에티오피아 영토가 형성되어 중앙권력이 힘이 미치게 되었다. 황제의 영토가 넓어진 것이기도 하다.

메넬리크는 새로운 수도를 건설했다. 그동안 에티오피아는 뚜렷하게 수도라 할만한 곳이 없었다. 황제가 머무는 곳이 수도였고, 때에 따라 바뀌었다. 메넬리크는 현재의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를 계획도시로 건설하도록 명해 왕궁을 지었다. 아디스아바바는 1910년에 거주인구 7만명에 이동인구 5만명의 도시로 확대되었다. 2)

 

메넬리크 2세의 초기 영토확장(1886~1896년, 1897~1904년) /위키피디아
메넬리크 2세의 초기 영토확장(1886~1896년, 1897~1904년) /위키피디아

 

메넬리크는 에티오피아의 근대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노예무역을 중단시켰다. 노예제도 자체는 유지되었는데, 이 제도도 후에 하일레 셀레시에 황제 때에 폐지된다.

그는 서구의 기술과 행정제도를 이집트에 도입하려고 애썼다. 유럽인에게 무역과 광산 개발권을 주고, 이비시니아 은행을 개설했다. 우편제도도 신설하고 아디스아바바에서 홍해 항구도시 지부티(Djibouti)까지 철도를 건설했다. 철도 건설 도중에 프랑스가 독점권을 주장했지만, 영국과 이탈리아를 끌어들여 공동투자로 운영했다.

그는 또 러시아와 우호 관계를 확대했다. 유럽 세력들이 호시탐탐 아프리카 대륙을 노리는 가운데 러시아만이 에티오피아를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메넬리크의 산업화와 다각도의 대유럽 외교 정칙이 이탈리아의 침공을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아디스아바바 황궁 앞 메넬리크 2세 동상 /위키피디아
아디스아바바 황궁 앞 메넬리크 2세 동상 /위키피디아

 

이탈리아는 메넬리크에겐 성가신 존재였다. 1870년대에 통일국가를 형성한 이탈리아는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어 아프리카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에티오피아에 눈독을 들였다.

메넬리크 즉위 초기인 18895월 에티오피아와 이탈리아는 우치알리 조약(Wuchale Treaty)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에리트레아를 이탈리아에 양도하는 대신 에티오피아 영토에 대한 황제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에 차관을 공여하고 군사지원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어와 암하라어로 된 조약문의 내용이 달랐다. 이탈리아어 조약문에는 에티오피아가 이탈리아 이외의 나라와 계약을 맺을 때에 이탈리아의 승인을 받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암하라어 조약문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다. 이탈리아어 조약문대로라면 에티오피아는 외교권을 잃고 이탈리아의 보호령이 되고 만다. 이탈리아가 에티오피아를 속인 것이다. 3)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메넬리크 황제는 이탈리아에 조약을 철회하겠다고 통보했다. 약삭 빠른 이탈리아는 메넬리크에게 탄약 200만통을 뇌물로 주겠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이탈리아는 한술 더 떠 티그라이 영주에게 황제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도록 설득했으나, 현지 사령관은 이탈리아의 앞잡이가 되기 싫다며 거절했다. 이탈리아는 결국 전쟁을 준비했다.

 

1896년 에드와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1896년 에드와 전투 그림 /위키피디아

 

18962월말 이탈리아군 4개 여단은 에티오피아 고원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탈리아군의 병력은 17,000명이었고, 메넬리크 2세의 병력은 73,000, 민병대까지 합치면 12만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이탈리아 군은 첨단 병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군은 결정적 실수를 했다. 작전 지도에 오류가 있었다. 그들은 지도만 믿고 행군하다가 에티오피아군이 쳐놓은 매복지에 걸려들었다. 1개 여단이 2시간만에 궤멸되었다. 아드와 전투(Battle of Adwa)에서 흑인의 나라 에티오피아는 백인의 나라 이탈리아군을 격퇴했다.

아드와 전투는 백인들이 흑인에 대해 종족적 우월감을 말끔히 해소시켰다. 그동안 백인들의 승리는 무기 발전에 의한 것이었지 인종적 우월 때문은 아니었음이 입증되었다. 이 전투는 백인도 흑인에게 패할수 있다는 진리를 유럽에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전쟁을 제1차 이탈리아-에티오피아 전쟁(First Italo-Ethiopian War)이라 한다. 4)

2차 전쟁은 에드와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40년 후인 1935년에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에 의해 일어난다.

 

메넬리크 2세의 불행은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번 이혼하고 세 번째 황후에게서 아들을 얻었는데, 일찍 사망했다. 혼외 자식이 여럿 있었는데, 그중 딸 둘, 아들 하나를 자식으로 인정했다.

메네리크는 죽기 직전에 혼외 공주의 아들을 후계자로 임명했는데, 그가 이야수 5(Iyasu V). 이로써 전설적 건국자 메넬리크에서 시작해 남성 가계로 내려오던 솔로몬 왕조는 메네리크 2세를 끝으로 여성 가계로 전환된다. 그의 외손주 이야수 5세는 관료들에게 둘러 싸여 정식으로 제위에 오르지 못한채 3년만에 폐위되고, 또다른 혼외 딸 제우디투(Zewditu)j가 제위에 오르니, 시바 여왕 이래 에티오피아 최초의 여황제가 된다.

 


1) Wikipedia, Yohannes IV

2) Wikipedia, Menelik II

3) Wikipedia, Treaty of Wuchale

4) Wikipedia, First Italo-Ethiopian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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