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갑선, 그 불멸의 신화…이순신의 탁월한 선택
철갑선, 그 불멸의 신화…이순신의 탁월한 선택
  • 김현민기자
  • 승인 2019.05.01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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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 만들어져 이순신이 리모델링…오늘날 조선·철강 산업으로 승화

 

이순신(李舜臣) 장군은 우리 국민들 마움 속에 살아 있는 영웅이다. 왜군들은 이순신 장군이 만든 철갑선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거북선은 용의 머리에서 포탄을 쏟아내고, 갑판에 창과 시칼이 꽂혀 있어 칼 솜씨를 자랑하는 일본 수군이 배 위에 올라 타려다 죽어가게 하는 무서운 존재였다.

일본의 군사서인 <지마군기(志摩軍記)>에는 조선 군선 중에 장님 배가 철로 덮여있다고 기술했고, <정한위략(征韓偉略)>에는 적선이 전부 철로 꾸려져 있어 우리(일본 수군) 화포로는 깨뜨릴수 없었다고 적었다.

이순신에게 혼쭐이 난 일본은 전쟁 패인을 거북선에 돌렸다. 일본의 <등강양정문서(藤江良亭聞書)>에는 조선에서 패한 것은 지리에 어두웠기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 배는 고래 배 모양으로 견고하게 만들어져 쉽게 대적하기 힘들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동서고금의 해전사에서 전함들이 수없이 동원되고, 그 종류도 다양했지만, 거북선처럼 탁월한 성능으로 전쟁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투함은 찾아보기 어렵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와 그리스 해군이 싸운 살라미스 해전, 16세기말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영국 함대와의 전투, 19세기초 넬슨 제독이 거느린 영국함대와 나폴레옹 휘하의 프랑스 함대가 교전한 트라팔가 해전도 어느 한 측에서 우월한 함대를 가지고 전쟁에 임해서 이긴 것은 아니었다. 이에 비해 거북선은 조선 수군이 국난을 극복하는데 앞장 섰던 특수 군선이다. 거북선은 항상 함대의 선봉에 서서 적진 한가운데 뛰어들어 맹활약함으로써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을 완전히 제압하는 원동력이 됐다.

한국인들은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동일시 하고 있다. 서울의 기점이 되는 광화문 사거리에 이순신 장군이 우뚝 서 있고, 그 동상의 발치엔 거북선이 자리잡고 있다. 이순신과 거북선은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을 대변한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전쟁기념관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전쟁기념관

 

그러면 청사에 빛나는 거북선이 임진왜란때 어떤 역할을 했으며, 그 구조는 어떠했을까.

거북선은 전란 14개월 전에 전라좌수사에 발탁된 이순신의 지시로 건조됐다. 이순신은 머지않아 왜군이 쳐들어 올 것을 생각하고, 거북선 3척을 만들었다. 본영에 배치한 영귀선, 방답진에 배치한 방답귀선, 순천부에 배속한 순천귀선이 그것이다. 이 세척의 거북선이 일본 수군으로 하여금 귀신인줄 알고 벌벌 떨게 했다.

15924월 일본 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대륙 정벌의 야망을 품고 조선을 침공했다. 일본 수군의 공격로에서 비껴나 있던 이순신은 전쟁 발발 다음 달인 5월에 일본 수군을 찾아 1차 출동에 나섰으니, 바로 옥포 해전이었다. 1차 출동에서는 거북선이 참전하지 않았다.

거북선은 2차 출동이었던 당포 해전에 참가해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왜적들은 거북선의 기괴한 모습을 보고 놀랐다. 그것이 과연 배인지, 괴물인지 분간조차 어려웠다. 병사는 한사람도 보이지 않고, 노가 저절로 움직이며 몸통에서 포탄이 빗발치듯 쏟아져 나오는 모습에 그들은 싸우기도 전에 겁에 질렸다. 왜적들은 한 사람씩 맞붙어서 싸우는 칼 싸움에 능했다. 왜군들은 조총을 동반한 육지전에서 보름여만에 부산에서 한양까지 파죽지세로 공격할수 있었던 것도 그들의 특장점에 조선군이 지리멸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전에서 이순신의 수군은 거북선을 앞세워 일본 수군의 기선을 제압할수 있었다. 일본 병사들은 적진에 가장 먼저 올라가는 것을 이치반노리(一番乘)’라며 가장 명예로운 전공으로 생각했는데, 거북선에는 접근조차 할수 없었다. 왜군이 갑판 위에 오르자마자, 빼곡히 꽂혀 있는 창과 못에 찔려 바다에 빠지거나 죽었기 때문이다. 거북선은 적 함대 중심부에 들어가 용 아가리와 측면에서 포와 총을 쏘아 적선을 격침시켰다. 거북선은 선봉에서 적 수군의 기세를 꺾었으며, 이순신 수군의 연전연승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거북선은 이순신의 독창적인 발명품은 아니다. 거북선을 의미하는귀선(龜船)’이라는 말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80년 전인 태종 13년 기록에 임금이 임진강을 건너 행차하다가 귀선과 왜선으로 꾸민 배가 하는 전쟁 연습을 구경했다라는 구절이 있고, 2년 후에도 거북선 전법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런 기록들은 조선 초부터 전선에 갑판을 설치한 특수군선(판옥선)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순신이 종래의 귀선을 리모델링(remodeling)함으로써 거북선을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거북선의 장점은 갑판을 개조한 둥근 모양의 상판에 있다. 종래의 판옥선은 갑판에 전투원을 배치하고, 그 아래서 노군(櫓軍)이 노를 저었는데, 거북선은 이 두 부류를 한 층에 몰아 넣었다. 따라서 노를 젓는 군인과 전투하는 군인이 한데 섞여 적진 한 가운데 뛰어 들었고, 이 때문에 선체 내부가 비좁은 결함도 있었다. 정유재란 때 거북선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원균이 통제사가 된 후 조선 수군이 궤멸되다시피 했고, 그 와중에 거북선 3척도 침몰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모함을 받아 백의종군했던 이순신이 통제사로 돌아와 수군을 지휘하며 함대를 복원했을 때 거북선을 건조하지 않았던 것은 제작기간이 많이 걸렸거니와 좁은 전투함의 결점을 인정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전남 여수시 시전동의 선소(船所)유적 (사적 392호).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전남 여수시 시전동의 선소(船所)유적 (사적 392호).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만들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선 수군은 거북선의 막강한 성능을 인식하여 이를 다시 건조했다. 기록에 의하면 거북선은 숙종 때 5척이었다가 정조 6년에 40척까지 늘어났으며, 순조 17년에 18척으로 줄어든 후 어느 사이엔가 자취를 감추었다. 거북선의 실체가 언제 완전히 사라졌는지는 알수가 없지만, 마지막 기록을 기준으로 거슬러 올라갈 때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에는 거북선이 조선의 세바다를 지킨 것이 분명하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주장은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일본인과, 서양인들에 의해 제기됐다. 일본인들은 조선수군의 강점을 강조하며 패전의 원인을 철갑선이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한국 역사학자들은 거북선이 철갑선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니라, 장갑선이라고 고증했다. 목재 갑판 위에 창과 송곳을 깔고 겉옷 격으로 얇은 철판을 깔아 일본의 주력 화기인 조총의 공격을 견뎌냈다는 것이 한국 역사학계의 정설이다.

 

여수 거북선 축제에 등장한 본영 거북선 /여수 거북선축제 홈페이지
여수 거북선 축제에 등장한 본영 거북선 /여수 거북선축제 홈페이지

 

철은 철의 장막’, ‘철의 여인등의 비유법에서 보듯, ‘강함의 상징이다. 역사학자와 조선공학자들의 고증에 의해 거북선은 철갑선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지만,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거북선을 철갑선으로 오인한 것은 조선 수군의 강함을 두려워 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철갑선은 신화로 승화되어 오늘날 우리 역사 속에 살아 숨쉬고 있다. 일본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한국은 이제 세계 제일의 조선대국으로 부상했다. 우리 선조들의 조선 기술이 뒷받침된 거북선 신화는 한국을 조선강국으로 승화시켰고, 거기에 철강산업이 큰 힘이 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철갑선은 사라졌지만, 불멸의 신화를 창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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