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파시즘②…사회주의자 무솔리니의 전향
이탈리아 파시즘②…사회주의자 무솔리니의 전향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18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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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 심취, 평등론에 반기…1차 대전후 참전론 주장, 사회당에서 축출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는 사회주의자였다. 한때 반전운동에 가담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이탈리아 사회당의 기관지 편집장을 맡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민족주의를 외치며 노선을 전환했고, 파시스트당을 결성해 정권을 장악, 20여년간 이탈리아를 철권통치했다.

그의 파시즘 사상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프랑코, 포르투갈의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등 당대의 파쇼 독재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당대의 파시시트들이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는 주범이 된다.

 

젊은 시절의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젊은 시절의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무솔리니는 19837월 이탈리아 중부 로마냐의 프레다피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대장장이로 사회주의자였고, 어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아버지는 멕시코의 혁명가 베니토 후아레스(Benito Juárez)에게서 아들의 이름을 따왔다. 어린 시절에 그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통일운동의 지도자 마치니, 가리발디는 물론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카를로 피사카네 등을 우상화했다. 어머니의 권유로 카톨릭이 운영하는 기숙학교를 나와 초등학교 선생 자격증을 땄다.

19살이 되던 1902년 병역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로 건너가 전전하면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이탈리아 사회학자 빌프레도 파레토, 프랑스 사회사상가 조르쥬 소렐의 저서에 탐닉했다. 그는 특히 생디칼리스트의 원조로 꼽히는 소렐에 감명받았다. 소렐은 의회의 부패성을 지적하며 반의회주의를 주창했고, 폭력의 윤리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이런 여러 철학과 사상들이 어린 무솔리니의 정신세계를 파고 들어 파시즘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20세가 되던 1903년에 무솔리니는 스위스에서 이탈리아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신문을 만들고 노동자 조직을 결성하고 로잔 노동자 연맹의 서기로 활동했다. 그 무렵 안젤리카 발라바노프라는 유대계 여성혁명가의 안내로 스위스에 망명해 있던 블라디미르 레닌과 만났다고 한다. 레닌은 후에 이탈리아 사회당이 무솔리니를 축출했을 때 이를 비난하기도 했다. 그는 폭력적 총파업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베른 경찰에 체포되어 2주간 감옥에 갇혔다가 이탈리아로 추방되었다. 다시 스위스로 돌아가 로잔 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1904년 이탈리아가 병역기피자에 대한 사면조치를 취하자 귀국해 입대했다. 18개월의 군복무를 마친후 초등학교 선생이 되었다.

 

무솔리니의 사회당 활동은 1909년부터 시작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이 지배하던 트렌토로 가서 이탈리아인들이 결성한 노동당 서기로서 기관지를 펴내는 일을 맡았다. 이듬해 이탈리아로 돌아와 고향 포를리에서 집필작업을 시작했다. 그는 소설과 단편집을 펴냈고, 일간지를 만들어 글을 썼다. 그의 소설은 반교회적이었다.

그는 저술작업으로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로 명성을 떨쳤다. 19119월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한 리비아 전쟁 반전시위에 가담한 죄로 5개월 동안 감옥에 갇혔다. 석방된 후 이탈리아 사회당내 개량주의자들을 쫓아내는데 일조했다.

그는 본격적으로 사회당 기관지 전진’(Avanti!)의 편집장이 되었고, 이 기관지의 발행부수를 2만부에서 10만부로 끌어올리는데 수완을 발휘했다. 그는 스스로 취재기자가 되어 현장을 누볐고, 마르크스주의적 칼럼을 썼다. 그는 칼 마르크스가 사회주의 이론가들 중에 가장 위대하다고도 극찬할 정도로 사회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1917년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1917년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하지만 무솔리니는 어느 순간 그가 탐독한 니체의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내용과 사회주의자들의 평등주의 사이에 모순을 발견했다. 그는 니체의 반교회 사상과 신(God)의 부정에 영향을 받았고, 마르크스의 결정론과 사회주의 혁명의 오류를 발견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평등주의에서 벗어나 니체의 초인(übermensch)의 개념을 도입하고 반평등주의를 선호하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솔리니가 사회당과 결별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148월에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의 참전 여부에 대한 사회당 내 논쟁이었다.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 프랑스, 영국 등 유럽 모든 나라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고양되었다. 이탈리아에선 시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가 실지(失地) 회복을 주장하며 참전을 주장했다. 아직도 되찾지 못한 이탈리아 영토를 되찾자는 것이었다. 자유당은 참전을 지지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자들은 반으로 갈렸다. 생디칼리스트들은 참전을 지지했고, 이탈리아 사회당은 공식적으로 전쟁 참여를 반대하고 중립국으로 남을 것을 요구했다. 무솔리니는 처음엔 중립론을 지지하며 사회당과 노선을 일치시켰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무솔리니는 전쟁이 이탈리아에게 기회가 될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싸워 잃어버린 영토의 이탈리아인들을 해방시킬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회주의자들이 독일의 호엔쫄레른과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사회주의자를 탄압하는 반동세력으로 규정하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켰다. 오스트리아는 또 자국내 이탈리아인들을 탄압하고 있질 않느냐는 것이다.

 

1914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전쟁 지지 군중대회 /위키피디아
1914년 이탈리아 볼로냐의 전쟁 지지 군중대회 /위키피디아

 

무솔리니가 참전론으로 돌아서자 이탈리아 사회당은 충격을 받았다. 기관지 편집장이면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 정당에서 이데올로그에 해당한다. 그는 반전론 프롤레타리아트가 참전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권파들은 그를 사회당에서 추방해 버렸다. 1)

 

사회당에서 쫓겨난후 무솔리니는 빠른 속도로 사회주의를 탈색했다. 그는 계급갈등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모든 계급이 단결하는 혁명적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191410, 그는 <이탈리아 인민>(Il Popolo d'Italia)국제적 행동을 위한 혁명적 파쇼라는 신문을 창간했다. 그가 파쇼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파쇼(Fascio)란 말은 이탈리아어로 다발(bundle), 더미라는 뜻으로 정치적으로 사용될 때엔 연맹(league, union) 또는 단결이란 개념으로 사용된다. 20세기초까지만 해도 이탈리아에서 파쇼란 말은 정치적 용어로 사용되지 않았다. 1914년 생디칼리스트들이 중립론 또는 반전론자들을 공격하면서 파쇼를 언급했고, 무솔리니가 본격적으로 파쇼라는 단어를 쓰면서 정치적 개념이 되었다. 2)

 

1차 대전중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1차 대전중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191412월 무솔리니는 정통 사회당을 공격하며 민족이란 개념을 끌어들였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민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계급은 국가를 파괴할수 없다. 계급은 이익 집단 그 자체일 뿐이다. 하지만 민족은 정서와 전통, 언어, 문화, 종족의 역사다. 국가는 계급에 의해 잠식될수 없다. 계급투쟁은 잘못된 공식일뿐이다.”

 

반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에 무솔리는 철저한 사회주의자에서 광적인 민족주의자로 변신했다.

이탈리아가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무솔리니는 1915831일 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는 예전에 복무했던 베르살리에리(Bersaglieri) 부대로 원대복귀해 발칸 전선에 나갔다. 상등병이었다. 1차 대전은 상등병 출신 무솔리니와 하사 출신 히틀러를 배출했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이존초 전투에 투입되었고, 19172월 전투에서 포탄에 맞아 부상당했다. 그는 19178월에 두 번째 입대한 군에서 전역했다.

 


1) Wikipedia, Benito Mussolini

2) Wikipedia, fas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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