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파시즘④…로마 진군에 겁먹은 국왕
이탈리아 파시즘④…로마 진군에 겁먹은 국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20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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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10월, 검은셔츠 대원들의 쿠데타…국왕, 무솔리니 총리 지명

 

이탈리아에 파시스트 정당이 공식 출범한 후 베니토 무솔리니가 잡권하기까지의 기간은 3년에 불과했다. 독일의 나치당이 1919년에 창당해 1933년 집권하기까지 걸린 시간 14년에 비하면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집권은 초단기다. 두 나라 모두 1차대전 직후에 공산혁명의 위기를 겪었지만, 국내 정치의 과정은 달랐다. 독일은 패전국으로 연합국의 감시와 제재를 받았고 공화정을 채택한데 비해 이탈리아는 승전국이었고, 왕정이었다.

이탈리아에선 국왕이 총리 임명권을 갖고 있었다. 192210월의 검은셔츠단의 로마진군에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Vittorio Emanuele III)가 겁에 질려 소수정당의 지도자 무솔리니에게 총리 자리를 넘겨준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초기 파시스트들은 1차 대전 참전을 지지하는 사회주의자 그룹이었다. 열렬한 사회당원이었던 무솔리니가 그들의 대표격이었다. 전쟁 기간 중인 1915년 그들은 파쇼(fascio)란 말을 사용하면서 스스로를 파시스트라 규정지었다. 파시스트는 마르크스주의를 배격했지만 사회주의의 사상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마르크스 대신에 프랑스 사회주의자 루이 블랑키(Louis Auguste Blanqui)를 언급하며 정통 사회주의자와 거리를 두었다. 초기 파시스트들은 소수 정치서클에 지나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고 무솔리니는 19193월에 퇴역군인, 영토회복론자들을 모아 전투 파쇼’(Fasces of Combat)라는 정치단체를 조직하고 정계에 뛰어들었다. 그해 총선에서 무솔리니는 자신을 이탈리아의 레닌이라 자처하며 사회당과의 연대를 통해 지지를 호소했다. 하지만 결과는 참패였다. 무솔리니는 고향에서도 한 표도 얻지 못했고, 파시스트들은 508석 가운데 한 석도 내지 못했다. 사회당원들은 무솔리니의 이름을 적은 관을 들고 그의 집 주변을 배회하며 조롱했다.

그는 전술을 바꾸기로 했다. 1919~1920년에 전개된 붉은 2’(Two Red Years)을 겪은 후 좌파에 대한 염증이 국민들 사이에 퍼져 있는 것을 감지했다. 무솔리니는 우파 진영과 손을 잡았다. 19215월 총선에서 파시스트들은 당시 총리 지오반니 지올리티(Giovanni Giolitti)가 주도하는 우파 연합 국가블록(National Blocs)에 가담해 총선에 뛰어들었다. 이 선거에서 지올리티의 국가블록은 535석중 105(19.1%)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무솔리니의 전투파쇼는 35석을 차지, 원내에 진출하게 되었다. 1)

 

총선에서 소수나마 의석을 얻은 무솔리니는 캐스팅보트를 행사하려 했다. 그는 지올리티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사회당과 협상했다. 사회당도 더 이상 무솔리니를 무시하지 않았다. 사회당과 파시스트세력은 그해 8월 평화조약(Pact of Pacification)을 체결했다. 내용은 좌우파가 서로 위협과 공격, 보복 행위을 중단한다는 것이었다.

무솔리니가 사회당과 타협하자, 파시스트 과격파들이 반발했다. 지올리티 내각은 파시시트의 행동조직인 스콰드리즈모(Squadrismo)를 해체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지올리티 내각이 붕괴되고, 좌파 계열의 이바노에 보노미(Ivanoe Bonomi) 내각이 들어섰다.

무솔리니가 오락가락하는 사이에 파시스트들이 분열하는 조짐이 보였다. 무솔리니는 좌파와의 협조를 단절하고 민족주의자들과 타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파시스트들은 1921117~103차 총회를 열어 전국의 파시스트를 통합해 국가파스시트당(National Fascist Party)을 창당하고 무솔리니가 합의한 사회당과의 조약을 폐기했다. 파시스트당은 2,200명의 파시스트와 32만명의 당원을 자랑했다.

파시스트들이 세력을 확장하자 사회당, 노조가 연합해 반파시스트 총파업을 일으켰지만, 자유주의 정당인 인민당을 끌어들이는데 실패했고, 파시스트들의 폭력에 의해 좌절을 맛보았다. 나라가 어수선해지자, 보노미 내각이 물러나고 19222월에 루이지 팍타(Luigi Facta) 내각이 들어섰다.

 

검은셔츠의 로마행진 /위키피디아
검은셔츠의 로마행진 /위키피디아

 

192210, 무솔리니는 무모한 계획을 세웠다. 파시스트 행동대원인 검은셔츠(Black Shirts)를 무장시켜 로마로 행진(March on Rome)하는 일종의 쿠데타 행동이었다. 로마 행진은 보노, 발보, 비앙키, 베키 등 당내 4인방에 의해 추진되었다. 검은셔츠는 1차 대전 기간에 용맹을 떨친 이탈리아 정예부대 아르디티(Arditi)의 검은색 군복을 의미했는데, 파시스트당의 행동조직 스콰드리즈모의 별칭이었다. 후에 독일 나치가 이를 모방해 SA를 조직했다.

검은셔츠는 무장을 했다. 파시스트당에 동조하는 군부와 경찰들이 무기를 지원했고, 무기를 소지하지 못한 사람은 곤봉, 농기구, 심지어 골프채를 들고 나왔다.

1024일 무솔리니는 나폴리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6만명의 당원에게 우리의 계획은 단순하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이탈리아를 통치하는 것이다.”고 선언했다. 무솔리니는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밀라노에 머물면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2)

 

무솔리니(가운데)와 검은셔츠 지도부 /위키피디아
무솔리니(가운데)와 검은셔츠 지도부 /위키피디아

 

행진에 참여한 사람은 3만명으로 파악된다. 로마에 도착한 인원은 25,000명이었다.

검은셔츠 대원들이 로마를 향해 행진을 시작하자, 루이지 팍타 총리는 에마누엘레 국왕에게 계엄령을 선포할 것을 요구했다. 내각은 만장일치로 계엄선포를 의결했다. 팍타 총리는 국왕이 계엄령 선포를 서명할줄 알았다.

하지만 에마누엘레 국왕은 망설였다. 28일 아침, 계엄선포에 서명을 거부했다. 팍타 총리가 국왕에게 내각의 결의를 부정할수 없다며 항의했지만, 에마누엘레는 서명거부가 국왕의 권한이며, 파시스트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1030일 국왕은 무솔리니를 불러 총리르 맡아 내각을 구성하라고 왕명을 내렸다. 이로써 정치권 밖에서 폭력을 일삼던 파시스트다 합법적으로 권력을 쥐게 된다. 이때 무솔리니의 나이는 39세였다. 3)

 

에마누엘레 3세 /위키피디아
에마누엘레 3세 /위키피디아

 

그러면 당시 왜 에마누엘레 국왕은 무솔리니에게 힘을 실어 주었을까. 검은셔츠단이 무장을 했지만 오합지졸에 불과했고, 400명의 경무장 경찰에 막혀 행진을 포기하려 생각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국왕이 정규군대를 동원하면 검은셔츠의 행군을 충분히 좌절시킬수 있었다. 입헌군주제를 채택하고는 있었지만, 총리지명권과 군 통수권을 국왕이 쥐고 있던 나라에서 아이러니가 발생한 것이다.

당시 국왕의 판단에 대해 구구한 해석이 나온다.

첫째는 검은셔츠단의 총대장 체사레 마리아 데 베키(Cesare Maria De Vecchi)가 파시스트당이 국왕에 거스르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는 것이다. 파시스트 지도부는 행진이 실패로 돌아가면 망명할 생각이었으나, 국왕이 베키의 말을 믿고 로마로 들어오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는, 국왕은 사촌동생인 아마데오 공작이 파시스트를 등에 업고 섭정이 되거나 자신을 밀어낼 것을 두려워 했다는 분석도 있다. 독일혁명, 러시아혁명에서 황제들이 퇴위하거나 살해된 것에 대한 공포에서 파시스트와 야합했다는 것이다. 4)

 

국왕은 밀라노에 특급열차를 보내 무솔리니를 모셔오라고 했다. 무솔리니는 왕실에게 거만하게 굴었다. 그는 왕실에서 걸려온 전화를 세차례나 받지 않았다. 그리고 부하들과 함께 일반열차 침대칸에 올라 로마로 향했다.

 


1) Wikipedia, Italian Fasces of Combat

2) Wikipedia, March on Rome

3) Wikipedia, Victor Emmanuel III of Italy

4) Warfarehistorynetwork, Benito Mussolini & The Fascist March on R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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