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파시즘⑤…교황청과 타협하다
이탈리아 파시즘⑤…교황청과 타협하다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21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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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당 결점에도 단계적으로 독재화…카톨릭과 라테라노 협정

 

1922년 검은셔츠 대원 3만명의 로마 진군에 국왕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3세가 베니토 무솔리니로 지명하고 내각을 조직하라고 위임했다.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았지만 가장 취약한 곳은 의회였다. 하원 535석 가운데 파시스트당의 의석은 35석에 불과했고,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10명의 의원이 파시스트당을 지지했다. 파시스트당은 총의석의 10%도 되지 않은 소수당으로서 통치를 하기 위해 우파 정당들을 연합했다. 하지만 연정에 참여한 정당들은 각각 제목소리를 냈고 쉽게 분열 조짐을 보였다. 게다가 무솔리니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좌와 우의 폭력 사태는 끊이지 않았다. 집권 두달째인 192212월 토리노에서 파시스트에 반대하는 노동자 폭력사태가 일어나 파시스트 2명이 죽었다. 파시스트들은 보복으로 좌파 공격에 나서 11명이 죽고 10명이 중상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

 

무솔리니에겐 의회를 장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92311월 파시스트당은 득표율 25%를 넘는 제1당에게 하원 전체 의석의 3분의2를 내주는 아체르보 법안(Acerbo Law)을 제출했다. 당시 이탈리아 의회는 전체 의원을 비례대표로 선출했다.

이 법안이 독재적 요소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의회를 통과했다. 파시스트들은 카톨릭계 인민당을 구워 삶았고, 1당이었던 사회당은 법안에 반대했지만 다른 정당을 설득하지는 않았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행동대원을 풀어 법안을 반대하는 의원들을 위협했다. 법안은 통과되었다. 이 법의 통과로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는 사실상 종언을 고했다. 2)

 

자코모 마테오티 /위키피디아
자코모 마테오티 /위키피디아

 

19244, 아르체보 법이 적용되는 첫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가 형식적으로 파시스트 정권하에서 민주적으로 치러진 마지막 선거였다.

파시스트당은 인민당 자유당 등 보수 4개 정당으로 국민리스트(National List)를 결성해 60% 이상 특표율을 얻어 의석 3분의2를 차지했다.

소수당으로 전락한 사회당은 크게 반발했다. 사회당 당수 자코모 마테오티(Giacomo Matteotti)는 의회 연설을 통해 파시스트들의 폭력 행위와 불법 선거를 규탄하며 선거 무효를 주장했다.

마테오티는 연설을 한뒤 610일 행방불명되었다. 무솔리니는 사건을 덮으려고 했다. 하지만 목격자가 있었다. 마테오티 살해자는 무솔리니의 경호원으로 검은셔츠 단원이었다. 뒤늦게 마테오티가 파시스트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자, 극심한 정치혼란이 빚어졌다. 무솔리니는 당내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른 일이라며 시인했다. 3)

 

사회당과 노조는 총파업을 선언하고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을 요구했다. 야당은 의회를 보이콧했다. 하지만 파시스트들은 야당이 출석하지 않은 의회가 오히려 그들이 제멋대로 할 기회로 삼았다. 에마누엘레 국왕도 의회에 절대대수 의석을 차지한 파시스트세력을 무시할수 없었다. 무솔리니 해임은 거부되었다.

913일 파시스트당 간부가 반파시스트 세력에 의해 보복살해되었다. 이번엔 파시스트 극우파들이 쿠데타를 위협하며 무솔리니를 압박했다. 1231일 검은셔츠 리더들은 무솔리니를 만나 어느 편에 설 것인가를 분명히 결정하라고 최후통첩을 던졌다.

좌파와 당내 우파의 압력에서 무솔리니는 단안을 내렸다. 해가 바뀌어 192513일 무솔리는 의회에서 궤변에 가까운 연설을 했다. 그는 최근의 모든 폭력사태에 대해 자신이 책임진다면서 이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전권을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을 계기로 무솔리니는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검은셔츠단을 제압했다. 후에 아돌프 히틀러가 장검의 밤’(Night of the Long Knives)을 통해 행동대 SA를 제압한 것은 무솔리니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이 연설을 계기로 이탈리아에선 파시스트 독재가 시작되었다. 무솔리니는 민주적 요소를 모두 폐기하고 자신을 유일한 지도자로 하는 당과 정치구조를 만들었다. 4)

 

1925년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1925년 무솔리니 /위키피디아

 

이후 무솔리니는 독재를 향해 일사천리로 움직였다. 파시스트들은 절대다수 의석을 활용해 멋대로 법을 만들었다. 총리는 정책을 실행하고 법안을 상정할 때 장관과 의회의 동의를 구하지 않아도 되도록 했다. 총리는 오직 국왕에게만 책임지며, 각료와 장관을 지명할수 있게 했다. 의회는 총리의 허가가 없이 어떤 법률안도 제출할수 없도록 했다. 총리를 맡은 무솔리니에게 절대적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파쇼 정권은 정치선전을 동원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뉴스 시간을 만들어 정권을 홍보했다. 정권홍보물은 무솔리니를 우상화하고 절대적 존재로 부각했다. 그의 뛰어난 웅변과 화려한 퍼레이드는 히틀러에 앞서 원조였다.

1929년부터는 총선이 국민투표로 대체되었다. 국가파시스트당이 의원명단을 제시하고, 국민들은 그 리스트에 대해 찬성과 반대를 표시했다. 파시스트당 이외의 정당은 입후보가 허용되지 않았다. 19293월 투표에서 파시스트당은 98.43%의 지지를 얻었다. 유일당에 대한 찬반투표는 공산당 방식과 다름없었다.

 

1929년, 라테라노 조약 체결 직전의 교황청 성직자와 파시스트 간부들. /위키피디아
1929년, 라테라노 조약 체결 직전의 교황청 성직자와 파시스트 간부들. /위키피디아

 

이탈리아 파시즘이 사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반파시스트 세력의 저항이 있긴 했지만 대체로 무난하게 21년을 지속한 것은 동조세력이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 카톨릭을 기반으로 하는 인민당(Italian People's Party)이 파시스트 지지세력으로 돌아섰다. 로마 카톨릭은 이탈리아 왕국에 대한 적대관계를 청산하는 차원에서 파시즘을 지지했다.

로마 교황청은 1870년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이탈리아 왕국에 의해 교황령을 빼앗긴 원한을 품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사회주의자 시절에 카톨릭을 부정하는 글을 썼지만, 정권을 잡은 후에 카톨릭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인민당에 유화 제스추어를 보냈다. 로마 행진 이후 파시스트와 인민당은 제휴관계에 들어갔고, 1924년 총선에서 연합정당을 구성해 득표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무솔리니는 앞서 1923년에 교육법안을 만들어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까지 카톨릭 교리를 가르치도록 했다. 카톨릭을 국가지도 이념으로 삼은 것이다.

파시스트와 교황청은 대리인을 내세워 5년간 협상을 거쳐 1929211일 라테라노 조약(Laterano Treaty)을 체결했다. 조약의 핵심은 바티칸을 중심으로 일정 영토와 국민, 주권을 지닌 바티칸시국을 독립시키고, 이탈리아는 카톨릭을 국교로 인정하는 내용이었다. 이탈리아는 교황령과 교회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교황청에 175,000만 리라를 지불했다.

교황 비오 11(Pio XI)의 주도로 체결된 라테라노 조약은 무솔니에게 정치적 기반을 굳건하게 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카톨릭 국가인 이탈리아인들에게 교황이 파시즘을 지지하자, 무솔리니의 독재체제는 더욱 공고해 졌다. 교황청은 후에 파쇼 정권의 스페인 내전 개입과 에티오피아 침공을 지지했다. 5)

 

라테라노 조약에 의한 바티칸 시국 /위키피디아
라테라노 조약에 의한 바티칸 시국 /위키피디아

 

1920년대에 독재체제 구축을 마무리한 이탈리아 파쇼세력은 1930년대 들어 대외팽창 정책을 추구했다. 에티오피아, 알바니아를 공격해 이탈리아 제국을 형성했다. 이어 독일의 나치 정권과 철의 동맹을 맺고, 2차 대전 참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1) Wikipedia, 1922 Turin massacre

2) Wikipedia, Acerbo Law

3) Wikipedia, 1924 Italian general election

4) Wikipedia, Giacomo Matteotti

5) Wikipedia, Lateran Trea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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