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대첩 100주년…체코군단 무기로 대승리
청산리대첩 100주년…체코군단 무기로 대승리
  • 박차영 기자
  • 승인 2020.10.23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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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인들, 독립군에 연민 느껴 무기 거래…최신 무기로 일본군 대파

 

100년전인 19201021일부터 26일 새벽까지 만주 청산리에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일본군과 10여회의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뒀다. 일본군은 1,200명이 전사했고, 독립군 전사자는 1200여명이었다.

 

청산리 전투에 앞서 19206월 봉오동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에 대파했다.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조작해 대규모의 일본군을 동원해 독립군을 섬멸하고자 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를 비롯한 독립군들은 백두산 방면으로 이동했다.

일본군은 우리 독립군들이 청산리골에 위치하고 있음을 파악하고 군대를 이동시켰고, 1021일 오전 9시경 백운평에서 일본군과 북로군정서가 교전을 시작하면서 청산리대첩이 시작되었다.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는 백운평에서 일본군에게 승리한 후 갑산촌으로 이동, 천수평에서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고, 어랑촌에서 일본군과 대규모 전투를 벌이게 된다. 어랑촌 전투에는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도 동참하여 일본군의 측면을 기습 공격하여 일본군을 패퇴시키는데 일조했다.

1921225일자 독립신문적의 죽은자는 연대장 1, 대대장 2, 기타 장교 이하 1,254인이고, 부상자는 장교 이하 200이라고 기록했다.

 

청산리대첩 모형 /국가보훈처
청산리대첩 모형 /국가보훈처

 

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이범석 대장이 이끌던 북로정서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으로부터 대량의 무기를 구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체코 군단은 나라를 잃고 독립운동을 벌이는 우리 무장단체에게 연민의 정을 느꼈다. 당시 1차세계대전은 끝나 있었다. 러시아 내전에서 블라디보스톡까지 이동해온 체코 군단은 귀국선을 기다리는 과정에서 더 이상 쓸모 없어진 총을 우리 독립군에게 싸게 팔았던 것이다.

항일 독립군의 입장에서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최선의 방법은 최신 무기를 많이 확보하는 것이었다. 1910년 나라가 없어지자 독립지사들은 중국 땅인 만주로,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가서 독립군 부대를 만들었다. 그들에게 가장 큰 어려움은 무기를 구하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독립군은 블라디보스톡에 귀국선을 기다리는 체코군단을 만나게 되었다.

 

이범석 대장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독립군 무기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구입했다는 사실을 회고했다.

블라디보스톡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청산리대첩 전투도 /국가보훈처
청산리대첩 전투도 /국가보훈처

 

이범석은 체코 군단에 무기를 달라고 하면서 우리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던 당신들처럼 일본에 나라를 빼앗긴 한국인들이오라고 했고, 그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 제국 식민 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리면서 연민을 표시했다고 회고했다. 게다가 1918년말 1차 대전이 종전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독립했고, 체코 군단이 돌아갈 땐 더 이상 무기를 가져갈 필요가 없었다.

체코 군단의 총지휘자 라돌라 가이다(Radola Gajda) 장군이 1920년초 귀국하기 앞서 그의 부대가 보유 무기 일부를 우리 독립군에 팔도록 지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독립군이 체코군단에서 사들인 무기는 소총 1,200, 기관총 6, 탄약 80만발, 박격포 2, 권총과 다량의 수류탄 등이었다. 체코 군단에서 사들은 무기는 암시장에서보다 상대적으로 쌌다는 평가다.

무기구매에는 민족의 정성이 들어갔다. 나중에 체코 골동품 시장에는 종종 금비녀, 금반지, 비단보자기 등이 나왔다고 한다. 아마도 선조들이 총 한 자루라도 더 사기 위해 금붙이들을 요강에 숨겨서 가져갔던 것이 체코 병사들에게 넘어가 보관하던 것이다.

 

대한독립군의 청산리 전투 축하기념 사진, 맨 앞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 /국가보훈처
대한독립군의 청산리 전투 축하기념 사진, 맨 앞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 /국가보훈처

 

청산리대첩은 우리나라 독립전쟁사 상 가장 크고 빛나는 승리이며, 독립군과 민중들이 힘을 모아 일제에 승리함으로써 일제에 대한의 굳건한 독립의지를 보여준 쾌거다.

1921, 독립신문은 청산리대첩의 승전보를 알리면서 승전의 3가지 이유를 들었다. 여기에는 생명을 불구하고 분용 결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 정신이 먼저 적에 지기를 압도함이요. 양호한 진지를 선점하고 완전한 준비로서 사격 성능을 극도 발휘함이요. 응기 수변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를 출함이라.”라고 기록했다.

 

국가보훈처는 청산리 독립전쟁 승리 100주년을 맞아 독립군의 항전 의지와 민중들의 독립에 대한 열망을 기억하는 청산리대첩 전승 제100주년 기념식1024일 오전 10, 국립중앙박물관(용극장)에서 개최한다.

사단법인 백야김좌진장군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열리는 이 행사에는 독립유공자 유족, 독립운동 관련 단체장 및 회원 등 50여 명이 참석한다. 김좌진 장군의 증손인 배우 송일국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낭독한다.

 

청산리대첩의 승전보를 알린 독립신문 /국가보훈처
청산리대첩의 승전보를 알린 독립신문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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