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내전②…해방, 그리고 왕국의 종말
이탈리아 내전②…해방, 그리고 왕국의 종말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2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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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과 레지스탕스의 공동전선으로 해방…국민투표로 공화정 채택

 

독일 나치의 괴뢰 정권 수반으로 다시 권력을 잡은 베니토 무솔리니는 반역자 처단에 나섰다. 그는 사위 갈레아초 치아노(Galeazzo Ciano)를 가장 미워했다. 적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가장 아끼는 딸 에다(Edda)와 결혼시키고, 외무장관까지 시켜주었는데, 그런 사위가 등뒤에서 칼을 꽂다니. 치아노는 장인을 파시스트당에서 축출하는데 앞장섰고 그 바람에 무솔리니는 실각해 감옥에 갇혔다가 독일군에 의해 풀려났다.

치아노는 피에트로 바돌리오 내각이 들어서자 독일로 망명했으나, 독일 나치는 장인을 복권시킨후 치아노를 이탈리아로 귀국시켰다.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 회의에서 자신을 반대한 인물들을 모두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했다. 치아노가 가장 먼저 체포되었다. 재판을 거쳐 치아노와 4명에겐 살로공화국의 이름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스페인으로 망명한 디노 그란디도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

그의 딸 에다는 남편이 사형되기 직전에 스위스로 망명해 농부로 위장해 살았다.

 

무솔리니는 독일의 허수아비로 사는 것을 괴로워 했다. 군대를 휘몰아쳐 넓혀 놓았던 영토는 다 빼앗겼고, 독일 장군들이 자신의 머리 위에 앉아 간섭하는 게 실었다. 그는 전기작가를 불러 자신의 삶을 정리했다. 1945년초, 그는 전기작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끝났소. 나의 별은 떨어졌소. 나에겐 싸울 힘이 남아 있지 않소. 나는 열심히 일하고 노력했지만, 그 모든 것이 한낱 웃음거리가 되어 버렸어. 나는 이 비극의 끝이 오길 기다리고 있소. 나는 더 이상 배우로 살지 않겠어. 나는 이제 마지막 관전자일 뿐이야.”  2)

 

살로 공화국 시절, 무솔리니가 요새를 점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살로 공화국 시절, 무솔리니가 요새를 점검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상황은 막바지로 치달았다. 19446월 로마가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었다. 영국과 미국의 군대는 북진을 계속했지만 산악지형을 활용한 독일군과 이탈리아 파시스트군의 저항에 부딛쳤다.

무솔리니가 통치하는 북부 살로공화국에선 레지스탕스들의 무장투쟁이 격화되었다. 레지스탕스들은 1944년에 10만명에 이르렀다가 이듬해엔 20만명으로 불어났다. 그들은 중부 아펜니노 산맥과 포강 유역에서 게릴라 활동으로 독일군과 파시스트군을 괴롭했다.

공산당, 사회당이 주도하고 카톨릭 등 우파세력을 포괄한 레지스탕스들은 임시정부 격인 국가해방위원회(CLN: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를 조직하고 반파쇼 단일 대오를 형성했다. 남부 이탈리아왕국, 연합군과도 공동전선을 펼쳤다.

 

로마가 탈환된 후 북부 레지스탕스들은 총공세를 폈다. 1944년 여름, 레지스탕스 임시정부는 독일군과 파시스트군을 향해 일제히 공격을 개시했지만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3만명 이상의 전사자를 내며 저항군은 퇴각해야 했다.

1945년이 되면서 전세는 급격히 바뀌었다. 독일은 동부와 서부전선에서 퇴각했다. 4월말 소련과 폴란드군은 베를린을 점령했다.

레지스탕스 조직은 419일을 기해 총궐기를 단행했다. 421일 볼로냐가 해방되었고, 24일 파르마와 레지오 에밀리아가 해방군에 접수되었다. 425일에는 북부 중심도시 토리노와 밀라노가 해방되었다. 이탈리아는 425일을 해방일(Liberation Day)로 기념하고 있다.

 

2009년 4월 25일 이탈리아 해방 40년을 기념하는 행사 /위키피디아
2009년 4월 25일 이탈리아 해방 40년을 기념하는 행사 /위키피디아

 

북부 이탈리아가 레지스탕스 수중에 떨어지자 무솔리니는 정부 클라라 페타치(Claretta Petacci)와 측근들과 함께 스위스로 망명하기 위해 코모호(Lake Como) 주변 별장에 은둔해 있었다. 그는 스페인 내란 때 지원한 프란시스코 프랑코 장군에게 몸을 맡길 요량이었다. 하지만 그 일대의 공산계열 파르티잔들이 무솔리니의 체류 소식을 듣고 427일 그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다음날 무솔리나와 정부를 사살하고, 시체를 밀라노의 광장에 매달아 일반인들에게 공개했다. 이로써 이탈리아 파시즘은 막을 내렸다.

연합군도 북진하면서 독일군을 밀어냈다. 429일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은 카세르타 항복조약(Surrender of Caserta)을 체결했다. 조약은 52일 발효되었다.

 

이탈리아 해방은 이중적 의미를 지녔다. 북부는 레지스탕스에 의해 해방되었지만 남부와 중부는 연합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연합군과 레지스탕스는 나치와 파쇼세력이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는 연합전선을 폈지만, 적을 몰아낸 후 각 정파는 해방이후 정치체제에 대해 견해를 달리했다.

레지스탕스의 주역인 이탈리아 공산당은 북부에서 정권을 장악할 호기를 맞았다. 하지만 공산당은 1919~1920년 붉은 2(Biennio Rosso) 실패의 기억을 소환했다. 섣부른 권력장악 시도가 반대진영의 공포를 유발시키고 반파쇼 연합전선을 분열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레지스탕스들은 퇴각하는 독일군에 길을 열어주고 뒤이어 밀려온 연합군에 행정권을 이양했다. 3)

 

움베르토 2세 /위키피디아
움베르토 2세 /위키피디아

 

북부 레지스탕스들은 왕정을 미워했다. 비토리아 에마누엘레 3세는 1922년 파시스트들의 모마행진 때 계엄령을 발동하자는 내각의 요구를 거부하고 의회내 소수세력인 무솔리니에게 권력을 이양한 원죄가 있었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국왕은 전쟁 참여를 지지했고, 전쟁의 결과물인 에티오피아와 알바니아 국왕을 겸임했다. 북부 레지스탕스들은 국왕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은 지역을 자력으로 해방시켰기 때문에 다시 왕정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대했다.

에마누엘레 국왕도 이런 분위기를 감지하고 타협을 모색했다. 그는 19444월에 왕세자 움베르토 2(Umberto II)에게 섭정의 권한을 부여하면서도 왕위는 놓지 않았다. 세자는 젊었고, 벨기에 왕가 출신인 세자빈 마리-호세(Marie-José)는 국민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종전후 레지스탕스 세력들은 공화정을 원했고, 사보이 왕가(House of Savoy)는 왕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다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차후 정체에 대한 논의를 미루라고 이탈리아 공산당에 지령을 내렸고, 공산당은 일단 왕정 복귀를 받아들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연합군은 두 세력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군은 파르티잔 부대를 해체시켰다. 그렇다고 왕실이 원하는 쪽으로도 흘러가지 않았다. 레지스탕스 세력도 국민들에게서 얼마나 지지를 받는지 투표로 확인하지 못한 상태였다.

섭정이 된 왕세자 움베르토 2세는 여러 정파들에게 제헌의회를 구성할 것을 요구했다. 정파들은 왕정과 공화정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투표에 앞서 59일 에마누엘레 국왕은 왕세자에게 양위했다. 모든 업보는 아버지가 떠안고 아들을 통해 왕국을 유지하려는 속셈이었다.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의 결과 /위키피디아
1946년 6월 2일 국민투표의 결과 /위키피디아

 

194662일 국민투표에서 공화정은 54.26%, 왕정은 45.74%의 지지를 얻었다. 북부 지역은 공화정, 남부지역은 왕정 지지율이 높았다. 66일 알치데 데 가스페리(Alcide De Gasperi) 내각은 왕당파의 저항을 수습하기 위해 서둘러 공화정을 선포했다.

움베르토는 퇴위를 거부했다. 이 모든 것이 공화파의 불법적인 책동이라고 성토했다. 왕당파들은 왕정 지지율이 높은 나폴리로 가서 별도의 정권을 세우자고 주장했다. 하지만 움베르토는 그것만은 바라지 않았다. 그는 더 이상 이탈리아를 분단시키고 내전으로 몰아넣는 일은 하지 않겠다며 612일 퇴위를 선언했다. 국왕에 오른지 34일만이다. 그리고는 다음날 궁궐을 떠나 망명길에 나섰다. 그가 비행기를 탑승하려는 순간, 헌병은 국왕과 악수를 하며 전하, 우리는 전하를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이로써 이탈리아의 사보이 왕가는 문을 닫았다. 4)

사보이 왕가는 1861년 이탈리아를 통일한 이후 1946년까지 85년간 이탈리아 왕국을 지배했다. 이탈리아 공화정은 그후 사보이 왕가 남성의 입국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움베르토 2세는 포르투갈에 살다가 1983년 스위스에서 여생을 마쳤다. 이탈리아는 이후 공화정을 유지하고 있다.

 


1) Wikipedia, Verona trial

2) Wikipedia, Benito Mussolini

3) Wikipedia, Italian resistance movement

4) Wikipedia, 1946 Italian institutional referend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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