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흑인왕국⑧…카톨릭 국가 콩고왕국
아프리카 흑인왕국⑧…카톨릭 국가 콩고왕국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27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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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인들에 의해 카톨릭 전파…노예무역 통해 재정 충당, 망국의 원인

 

아프리카에 콩고라는 이름을 가진 두 나라가 있다. 콩고공화국(Republic of the Congo)과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이다. 이름이 헷갈려 수도 이름을 따 브라자빌 콩고, 킨샤샤 콩고라 부르기도 한다. 두 콩고가 분리된 것은 1884~1885년에 열린 베를린회의(Berlin Conference)에서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 대륙을 제멋대로 갈라 먹으면서부터다. 브라자빌 쪽은 프랑스가, 킨샤샤 쪽은 벨기에가 식민지로 만들었고, 식민지들이 각기 독립하면서 두 개의 콩고가 생겼다.

아프리카가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콩고 왕국(Kingdom of Kongo)이 있었다. 콩고왕국은 지금의 앙골라, 두 개의 콩고, 가봉에 이르기까지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왕국은 수도를 앙골라 북서부에 있는 음반자-콩고(M'banza-Kongo)에 두었는데, 정작 콩고라는 국명을 가져야 할 나라는 앙골라인 셈이다.

 

1770년대 콩고왕국 영토 /위키피디아
1770년대 콩고왕국 영토 /위키피디아

 

콩고왕국은 서양인들이 들어오기 이전인 1390년에 세워졌다. 음펨바 카시(Mpemba Kasi)라는 나라의 왕과 은사쿠 라우(Nsaku Lau)라는 나라의 공주가 결혼해 낳은 아들 디아 은토틸라(Dya Ntotila)가 두 나라를 합쳐 콩고왕국을 건국했다고 전해진다. 왕은 마니콩고(Manikongo)라 불렸다.

인구는 수도에 밀집했다. 포르투갈인들이 15세기말에 왕국의 수도를 방문하고 자기네 나라의 웬만한 도시만큼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고 전한다. 수도 음반자는 16세기말에 인구 50만명이 살았다는 서양인들의 기록도 있다.

 

콩고왕국 수도 음반자-콩고에 있는 초기 카톨릭 교회의 유적 /위키피디아
콩고왕국 수도 음반자-콩고에 있는 초기 카톨릭 교회의 유적 /위키피디아

 

콩고왕국에 첫발을 디딘 유럽인은 포르투갈인 디오고 캉(Diogo Cão)이었다. 그는 1483년에 콩고강을 탐험하고 콩고왕국의 귀족 몇사람을 포르투갈로 데려갔다. 2년후 그는 다시 콩고를 방문해 콩고 왕 은징가(Nzinga)을 만나 카톨릭으로 개종시켰다. 이 흑인왕국에 첫 기독교 신자가 생긴 것이다. 캉은 1491년에 세 번째로 왕국을 방문할 때엔 카톨릭 신부를 데리고 와 은징가 왕과 귀족들에게 세례를 받게 했다. 왕은 이름을 포르투갈 사람들을 좋아해 이름도 주앙(João)이라고 바꿨다.

후앙이 죽은후 왕자들 사이에 왕위계승전이 벌어졌는데, 성모마리아가 나타나 아폰소(Afonso)를 도와줘 왕위에 올랐다고 전해진다. 아폰소는 카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이고, 나라의 군장과 모든 상징물을 기독교식으로 바꿨다. 아폰소 왕은 기독교에 심취해 포르투갈 사제보다도 교리에 밝았다고 한다. 아폰소는 콩고 왕국의 풍습과 카톨릭을 혼합해 독툭한 양식의 종교를 국민들에게 확산시켰다. 포르투갈 사제들이 와서 처음엔 놀랐지만, 곧 익숙해져 현지 개량식 카톨릭을 인정했다.

아폰소는 또 포르투갈식으로 왕위계승방식을 도입해 아들에게 왕위가 이어지게 했다. 콩고왕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회의를 열어 국왕을 선출했는데, 아폰소가 도입한 유럽식 왕위계승제도는 후에 전통방식과 충돌하게 된다.

알폰소는 아들 엔히크(Henrique)를 포르투갈에 보내 사제교육을 받게 했다. 엔히크는 신부가 되어 돌아왔다. 1)

 

포르투갈인들이 콩고 왕을 접견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포르투갈인들이 콩고 왕을 접견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콩고왕국은 카톨릭국가 되어 서구화에 앞장선 반면에 노예 장사를 한 흑역사가 있다. 왕국은 전쟁을 통해 노예를 붙잡아 콩고 앞바다에 있는 상투메(São Tomé) 섬에서 포르투갈 노예상에 팔아 먹었다. 왕국은 끊임없이 이웃부족을 쳐들어가 노예를 획득했고, 노예거래를 통해 얻은 수익을 왕실의 비용에 충당했다. 연간 12~15척의 포르투갈 배가 노예를 실어 날랐는데, 1척당 400~1,000명씩 실었다. 연평균 5,000~1만명의 노예가 팔려나갔다고 한다. 포르투갈 노예상들은 배에 너무 많은 노예를 실어 선상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왕국의 노예무역은 인구 감소를 초래했고, 그 결과 왕국이 쇠퇴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2)

 

콩고왕국 국기 /위키피디아
콩고왕국 국기 /위키피디아

 

장자승계의 원칙은 오래가지 못했다. 귀족들이 서로 왕을 세우면서 왕위계승전이 벌어졌고, 1568년엔 크윌루(Kwilu) 가문에서 왕을 냈다.

크윌루 가문의 첫 왕인 알바로(Álvaro)는 자가(Jaga)족과의 전투에서 고전하다가 상투메 섬에 주둔한 포르투갈군의 지원을 요청했다. 포르투갈군의 개입으로 알바로는 승리했고, 그 댓가로 현재 앙골라 수도인 루인다(Luanda)를 포르투갈에 떼줬다.(1579)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은 루안다에 군사요새를 세우고 아프라카 내륙에 발을 내디딘다.

알바로는 왕국의 서구화를 추진했다. 귀족 칭호를 공작, 후작 등으로 개명하고 수도를 상살바도르(São Salvador)로 개명했다.

 

포르투갈은 루안다를 근거로 콩고왕국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다. 포르투갈은 도망친 노예를 붙잡는다는 명분으로 1622, 1643, 1648년 세차례에 걸쳐 콩고왕국과 전쟁을 벌이며 콩고왕국을 잠식했고, 남쪽의 은동고왕국(Kingdom of Ndongo)을 식민화해 나갔다.

콩고왕국은 늘 불안했다. 왕위계승전쟁으로 1617년엔 은순디(Nsundi) 가문에서 왕이 배출되었고, 그후에도 왕조의 가문이 몇차례 바뀌었다. 게다가 주변 부족과 수시로 전쟁을 해야 했다.

 

콩고왕국 수도 음반자-콩고(1745) /위키피디아
콩고왕국 수도 음반자-콩고(1745) /위키피디아

 

벨기에는 1830년 뒤늦게 네덜란드에서 독립했다. 2대국왕인 레오폴트 2(Leopold II)는 좁은 벨기에를 벗어나 눈을 해외로 돌렸다. 그는 전세계에 벨기에가 차지할 땅을 이리저리 물색하다가 콩고분지가 미지의 대륙임을 알게 된다.

국왕은 국제 아프리카협회(International African Association) 위장단체를 만들어 콩고 식민지 개척에 나섰다. 이어 미국의 유명한 탐험가 헨리 스탠리(Henry Morton Stanley)를 불러 풍부한 재정적 지원을 해주며 콩고 탐험을 의뢰했다. 레오폴트의 에이전트가 된 스탠리는 1879년부터 5년간 콩고에 물면서 콩고 강에 증기선을 띄우고 길을 열었다.

레오폴트는 스탠리의 탐험의 결과물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레오폴트는 1885년 콩고자유국(Congo Free State)을 세우고 자신이 총수로 있는 콩고국제협회의 관리하에 두었다. 벨기에보다 80배나 되는 땅을 개인 영지로 만든 것이다. 그가 자기 땅이라고 우긴 영토엔 콩고왕국의 영토도 포함되었다.

 

1884~1885, 독일의 빌헬름 황제 주도로 유럽국가들이 아프리카 분할회의를 열었다. 벨기에는 콩고자유국을 자국의 식민지라고 주장했고, 프랑스는 브라자빌 일대를 자국령이라고 우겼다. 포르투갈은 앙골라를 자기네 것이라고 내세웠다. 3)

이렇게 해서 콩고왕국 영토는 프랑스, 벨기에, 포르투갈의 세나라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졌다.

포르투갈이 콩고왕국의 수도를 포함해 앙골라를 지배했다. 포르투갈은 1888년에 앙골라를 보호령으로 만들고, 콩고왕국의 왕위는 유지케 했다. 1914년 포르투갈의 통치에 빈발하는 폭동이 일어났고, 포르투갈은 콩고왕국을 폐지했다. 하지만 콩과 왕은 명목상으로 1964년까지 유지되었다.

 


1) Wikipedia, Kingdom of Kongo

2) Wikipedia, Pre-colonial history of the 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

3) Wikipedia, Berlin Con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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