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흑인왕국⑨…해방전사 은징가 여왕
아프리카 흑인왕국⑨…해방전사 은징가 여왕
  • 김현민 기자
  • 승인 2020.10.28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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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식민지에 반대, 남성 계승에 도전…은동고와 마탐바 지배

 

앙골라는 아프리카 서남부에 있는 나라다. 면적은 124, 한반도보다 6배 넓고, 인구는 3,100만명 정도다. 앙골라는 1975년 포르투갈에서 독립했는데, 포르투갈이 들어오기 이전에 은동고 왕국(Kingdom of Ndongo)이란 나라가 있었다.

은동고는 북쪽에 있는 콩고왕국의 조공국으로 출발했다가 차음 독립적 지위를 획득했다. 은동고에서 왕을 응골라(Ngola)라고 불렀는데, 포르투갈인들이 이를 앙골라(Angola)라고 발음하면서 후에 나라 이름이 되었다. 은동고도 콩고왕국처럼 포르투갈로부터 카톨릭을 받아들였고, 노예무역을 했다.

1579년 콩고왕국의 알바로 왕은 자가족과의 전투를 도운 댓가로 포르투갈에게 해안도시 루안다(Luanda)를 떼줬다. 루안다는 현재 앙골라의 수도다. 포르투갈은 이후 루안다를 군사요새로 만들어 내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으로 삼는다. 1)

 

은징가 여왕 초상화 /위키피디아
은징가 여왕 초상화 /위키피디아

 

은동고왕국을 설명하려면 은징가 음반데(Nzinga Mbande, 15831663) 여왕을 빼놓을수 없다. 어쩌면 은징가가 은동고의 모든 것을 설명한다.

은징가는 1583년 은동고의 왕 킬롬보(Kilombo)의 공주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오빠와 두 자매가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노예 출신의 후궁이었기 때문에 오빠와 은징고는 왕위계승 서열에서 빠져 있었다.

아버지는 은징고를 아꼈고, 그녀는 아버지를 따라 왕국의 공식회의와 행사에 참여했다. 은징고는 무술을 습득하고 포르투갈 선교사에게서 포르투갈어를 배웠다.

포르투갈은 노예무역을 활성화하기 위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요새를 지었다. 아울러 유목종족인 임방갈라(Imbangala)족을 앞세워 은동고를 무력으로 침략해 왔다. 주변의 종족들이 포르투갈에 협조하는 바람에 은동고만 외롭게 포르투갈과 대치하는 상황이 되었다.

1617년 아버지가 죽고 오빠 음반디(Mbandi)가 응골라()가 되었다. 오빠는 여동생의 아들이 언젠가 자신에게 반역할 것이라는 망상에 시달려 조카를 죽이고 은징가를 불임 처방을 내렸다. 은징가는 그후 아기를 갖지 못했다.

오빠의 가혹한 처사에 은징가는 북쪽에 있는 마탐바 왕국(Kingdom of Matamba)으로 도망쳐 생명을 부지했다. 그런데 오빠 음반디 왕은 포르투갈과의 전투에 잇달아 패전하면서 협상을 원하게 되었다. 왕은 은징가에게 포르투갈과 협상에 응해달라고 부탁했다. 여동생이 포르투갈어도 잘하고 외교적 협상술이 뛰어난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은징가가 포르투갈 총독과 협상하기 위해 루안다로 그는 그림(유네스코) /위키피디아
은징가가 포르투갈 총독과 협상하기 위해 루안다로 그는 그림(유네스코) /위키피디아

 

은징가는 마탐바에서 나와 은동고의 외교사절로 포르투갈군의 근거지인 루안다로 갔다. 그녀는 당시 아프리카인들이 외교합상을 할 때 입던 서양식 복장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전통복을 곱게 차려입고 협상장소로 갔다.

포르투갈 총독은 자기는 의자에 앉고 은징가에겐 거적에 앉으라고 했다. 자신이 높은데 앉아 위압적으로 협상하는 유럽 제국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수법이었다.

은징가는 부하에게 엎드리라고 했다. 그녀는 부하의 등에 앉아 협상을 시작했다. 그녀는 포르투갈어를 유창하게 했다. 그녀는 포르투갈군이 은동고에서 물러나라, 은동고는 포르투갈의 위성국이 아니라, 독립국이다고 주장하면서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포르투갈 총독은 은징기의 완강한 태도에 놀라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약속했다. 양국 사이에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은징가는 이까지 왔으니, 카톨릭 사제에게서 세례를 받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포르투갈은 받아들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셰례를 받고 돌아갔다.

 

은징가가 포르투갈 총독과 협상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은징가가 포르투갈 총독과 협상하는 모습 /위키피디아

 

하지만 포르투갈은 조약을 이행하지 않았다. 제국주의자들은 다시 은동고를 쳐들어왔고, 노예를 잡아갔다.

1624년 오빠가 죽었다. 자살했다는 설과 은징가가 독살했다는 설이 있다. 은징가는 오빠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은동고에서 여성이 왕위에 오른 적이 없었고, 관습에 어긋난다는 주장이 귀족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그 틈을 이용해 하리(Hari)라는 귀족이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왕이라고 주장했다. 하리는 세례를 받아 펠리페(Felipe)라고 했다. 펠리페는 포르투갈에게 왕국을 들어 바쳐 스스로 위성국이 되겠다고 자원했다. 포르투갈은 펠리페를 앞잡이로 내세워 은동고를 보호령을 삼을 작정이었다.

은징가와 펠리페의 전투는 단순히 왕위계승 전쟁을 넘어 제국주의와의 싸움이고, 여성계승권의 싸움이기도 했다. 은징가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적통이라고 주장했지만, 반대파들은 여자가 왕이 되어선 안 되고 게다가 노예의 딸이라고 비난했다. 반대파들의 주장이 먹혀 세력을 확대했다.

은징가는 적통성 논쟁에서 이길 수 없다고 보고 스스로 남자가 되기로 했다. 그는 남성들처럼 전투복을 입고 전투를 지휘했다. 하지만 은징가는 포르투갈과 펠리페의 연합군에 밀려 패주해야 했다. 그녀는 내륙에 있는 마탐바 왕국으로 들어가 왕권을 빼앗고 마탐바의 여왕이 되었다.

 

1641년 네덜란드가 루안다를 점령하고 포르투갈군과 전쟁을 벌였다. 이에 은징가는 네덜란드군과 손잡고 포르투갈군과 싸워, 잃었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수세에 몰린 포르투갈은 브라질에서 군대를 증원해 네덜란드와 은징가 연합세력을 격퇴했다. 은징가는 다시 마탐바로 돌아가야 했다.

포르투갈군은 마탐바까지 쳐들어와 은징가 토벌에 나섰다. 은징가는 거점을 요새화하고 장기전을 펼쳤다. 그녀의 게릴라 전술은 포르투갈군에겐 공포나 다름 없었다.

마침내 포르투갈군이 은징가의 저항에 굴복했다. 165711월 포르투갈은 은동고를 원래의 왕조에게 돌려주고 철수하기로 했다. 이로써 은동고와 포르투갈의 30년에 걸친 전쟁이 끝났다. 은징가는 은동고와 마탐바의 통치자가 되었다. 2)

그녀는 166312월에 8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은후 포르투갈에 적극 협조한 펠리페의 아들은 이용만 당한 것에 분개해 반란을 일으켰고, 포르투갈은 이를 기화로 1671년에 은동고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앙골라 루안다의 은징가 동상 /위키피디아
앙골라 루안다의 은징가 동상 /위키피디아

 

은징가는 남자들을 싸움에 붙여 피를 흘리기를 좋아했으며, 남자들과 잠자리를 한 후에 죽여버렸다는 속설이 있다. 은징가에 곤욕을 치른 포르투갈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녀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앙골라에서는 은징가를 앙골라의 어머니로 추앙하고 있다. 수도 루안다 시내에는 그녀의 이름으로 된 거리가 있고,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녀는 여성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앙골라에선 아프리카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적으로 진출해 있다고 한다.

 


1) Wikipedia, Kingdom of Ndongo

2) Wikipedia, Nzinga of Ndongo and Matamb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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