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가야, 이번엔 창녕고분에서 금동관 등 발굴
또 가야, 이번엔 창녕고분에서 금동관 등 발굴
  • 이인호 기자
  • 승인 2020.10.28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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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화가야 지배층 무덤으로 추정…도굴된 적 없어 장신구 무더기 출토

 

또 가야 고분에서 유물이 쏟아졌다. 이번엔 경남 창녕의 비화가야(非火伽倻) 고분이다.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514) 교동 63호분에서 비화가야 지배자의 꾸밈유물인 금동관을 비롯한 장신구 일체가 발굴되었다고 발표했다.

이번에 확인된 장신구 유물은 높이 약 21.5의 금동관과 관에 드리운 금동 드리개와 금동 막대장식, 굵은고리귀걸이 1, 유리구슬 목걸이, 은반지들과 은 허리띠 등 지배자 몸에 둘렀던 상태의 꾸밈유물 일체다. 신발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제외하면 지난 9월 발굴된 경주 황남동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 일체와 비슷한 구성이다.

또 피장자 발치 바닥을 약 40정도 낮춘 공간(길이 220, 너비 130)이 확인되었는데, 2명의 순장자가 안치된 공간으로 추정된다. 이곳에서는 순장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등도 같이 확인되었다.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교동 Ⅱ군 63호분 및 주변 전경 /문화재청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 교동 Ⅱ군 63호분 및 주변 전경 /문화재청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는 2014년부터 비화가야 최고 지배층의 묘역인 창녕 교동과 송현동 고분군에 대해 발굴조사를 시행해 왔다. 201911월에 도굴되지 않은 63호분(봉토 지름 21m)의 매장주체부를 열었으며, 올해 본격적으로 발굴조사를 진행해 매장 당시 피장자의 몸을 장식했던 금동관 등 꾸밈유물(着裝品) 일체를 확인했다.

 

금동관 내부 직물(관모) 모습 /문화재청
금동관 내부 직물(관모) 모습 /문화재청

 

장신구들은 피장자에 부착했던 상태대로 발견되어서, 머리 부분에서는 금동으로 만든 관(), 양쪽 귀부분에서는 금으로 만든 굵은고리귀걸이(太環耳飾) 1쌍이 확인되었고, 목과 가슴에는 남색 유리구슬을 3~4줄로 엮어서 만든 구슬 목걸이가, 허리에는 은으로 만든 허리띠가 있었다. 손 부분에서는 은반지들이 확인되었다. 피장자의 몸을 장식한 꾸밈유물 일체가 온전히 확인된 것은 비화가야의 최고 지배층 고분에서는 최초의 사례다.

 

금귀걸이 노출 모습 /문화재청
금귀걸이 노출 모습 /문화재청

 

금동관(높이 약 21.5)은 가장 아래에 관테(너비 약 3)가 있으며, 그 위에 3단으로 이루어진 3개의 나뭇가지 모양 장식(樹枝形 立飾)을 세운 형태이다. 관테 아래에는 곱은옥(曲玉)과 금동구슬로 이루어진 금동드리개(金銅製垂飾)가 양쪽에 있고, 관테 양 측면에는 원통형의 금동막대 장식이 드리워져 있다. 세움장식 밑면에는 관모(冠帽)로 추정되는 직물의 흔적이 남아 있는 상태였다.

허리부분을 장식한 은허리띠(전체 너비 45, 銀製帶金具)에는 2개의 은장식 손칼(刀子)과 띠끝장식이 드리개로 덧붙여진 형태다. 양손 부분에서는 각각 1(오른손)3(왼손)의 은반지(銀製指環)가 확인되었고, 피장자의 오른 팔뚝 부분에서는 팔찌나 손칼 장식으로 추정되는 원형금판에 연결된 곱은옥과 주황색 구슬들도 확인되었다.

 

63호분 석곽 내 피장자 꾸밈유물 노출 /문화재청
63호분 석곽 내 피장자 꾸밈유물 노출 /문화재청

 

이들 유물이 출토된 63호분의 석곽은 길이 640, 너비 130, 깊이 190의 규모로, 피장자의 머리 방향은 남향이다. 피장자 주변에서 목질흔(木質痕)과 꺽쇠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상자형 목관(箱形木棺)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피장자의 머리 위쪽에는 토기들과 철제유물들이 매납된 부장공간(길이 190, 너비 130), 피장자의 발치 아래에는 바닥을 약 40정도 낮춘 순장 공간(길이 220, 너비 130)이 확인되었다.

순장 공간에는 2명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순장자의 치아 일부와 다리뼈 일부, 금동제의 가는고리(細環, 세환) 1, 항아리 2, 철부(鐵釜, 쇠도끼) 2, 철겸(鐵鎌, 쇠낫) 1점이 출토되었다. 순장 공간 곳곳에서도 꺽쇠가 다량 확인되고 있어 순장자도 목관에 안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비화가야 지역에서는 약탈과 도굴로 인해 당시 지배계층의 상징물이었던 금동관의 일부 편과 장신구만이 확인되었을 뿐 그 전모(全貌)를 알 수 없었다. 이번 조사로 비화가야 무덤의 축조기법과 장송의례를 이해하고 가야와 신라의 접경지역에 위치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문화가 나타나는 비화가야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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